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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37 : 조선의 역사 379 (제26대 고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837 : 조선의 역사 379 (제26대 고종실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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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청의 내정 간섭과 갈등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온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갑신 정변 전후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동학 운동과 갑오개혁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4년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용은 1895년 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일본, 러시아의 내정 간섭
을미사변 (명성황후 암살)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암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 일본은 1895년 낭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유길준과 개화파, 조선 군벌 등이 일본인 낭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나중에 윤치호는 입궐하여 명성황후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있었다면서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주회, 이진호, 윤석우, 구연수 등의 존재를 폭로하였다. 여기에 개화파 정치인인 유길준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노라고 폭로하였다. 황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고종은 충격을 받았다. 박은식 역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세자(후에 순종이 됨)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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