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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2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2

두바퀴인생 2013. 1. 20. 05:14

 

 

우면산의 겨울 12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2

 

 

                                                                                         춘천 의암호 석양

 

 

지금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2

 

이황과 이이

선비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의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탈물질주의적 생활을 추구하는 게 선비정신의 중핵을 이룬다는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선비정신의 기원은 멀리 통일신라시대 최치원과 같은 유학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통상적으로 선비정신의 출발은 고려 말로 소급된다. 당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유학자 그룹이 등장했으며, 이들에 의해 선비정신이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특히 고려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킨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을 이으려는 조선 시대 사림파는 선비정신을 유독 강조했다. 그래서 선비정신이라 하면 흔히 사림파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평소에는 자기 수양과 학문에 전념하지만, 때가 되면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어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돌보려고 했던 이들이 다름 아닌 선비들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을 구현한 관리를 지칭하는 데 쓰인 말이 바로 청백리다. 청백리는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과 관리 수행능력을 두루 갖춘 이상적 관료상이었다. 의정부에서 뽑은 이 청백리는 조선시대에 217명이 배출되었는데 황희, 맹사성, 이원익, 이항복, 김장생 등은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이황과 이이는 바로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우리 역사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이자 지식인들이다. 이들 두 사람은 조선 중기 이후 우리 유학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뤄온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만큼, 그동안 결코 적지 않은 연구들이 이뤄져왔고 이들은 전통사회에서 활동하였던 학자이자 지식인의 모범이었다.

 

 

 

                                                        선비정신이란 난초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게 아닐까......

 

 

이황은 1501년 연산군 7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호이고 호는 퇴계이다. 아버지는 이식이며 어머니는 박씨 부인이다. 12세에 작은 아버지인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학업을 연마해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로 관리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출사를 거듭하였지만, 50세 전후부터는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이황의 학문 연구는 주로 고향에서 이뤄졌는데, 그는 46세에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토계'를 '퇴계'로 바꾸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물러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 호는 학문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담긴 셈이다.  60세에 이황은 '도산서원'을 지어 여기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으며, 또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대에 이황은 이미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학자로 칭송받았으며, 숱한 업적을 남긴 다음 1570년 선조 3년에 세상을 떴다.

 

이황은 매우 진지한 학자였으며, 대단히 인간적인 지식인이었다. 이황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외유내강(外柔內强)'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자신을 닦은 후에야 남을 다스린,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지만 타인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웠던 학자였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황의 기여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성취하고 이를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완성했다는 데 있다. 이황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적잖이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이황은 우리 역사에서 주자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한 최고의 학자로 꼽히고 있다.

 

이황의 성리학의 찰학적 기초는 우론적 '이기론(理氣論')에 있으며 이는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인 '기(氣)'와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에 의해 이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세계의 본질이 이에 있는가 아니면 기에 있는가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현실정치와 정책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가 큰 주목을 받아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했으며, 이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이황의 견해는 이와 기가 동일한 비중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시각이다. 이황 철학의 핵심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황 이후 영남학파에서 '주리론'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현실문제의 해결'보다는 이론적 원칙의 탐구에 주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이황이 기대승과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다. 성리학에서 '사단(四端)'이란 맹자가 실천도덕의 기본으로 제시한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희.노.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에 따르면, '사단이 이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면, 칠정은 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는 인간 마음의 작용을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의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서 이의를 제기했다.

 

더 이상 구체적인 이론에 대해서 논할 수 없으나 당시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논쟁다운 논쟁이 제대로 벌어졌고 이에 지식사회가 호응함으로서 학문적 공론장이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여름 우면산의 갈대,인간의 지식이란 이런 갈대에 불과한 조그만한 양에 불과하다

 

 

조선사회는 개국 이후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안정기를 누리린 다음 연산군 이후 침체기에 들어갔다. 이후의 과정은 일련의 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점철됐다. 이러한 침체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 비젼이 제시되어야 했는데, 이 역사적 과제를 담당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정암 '조광조'였다. 하지만 패기만만했던 조광조의 정치적 기획은 기득권자들인 훈구파에 의해 여지없이 좌절되었고, 권력투쟁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다. 이황의 학문 연구가 진행되던 시대적 상황은 이러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지식인의 본령은 진리 탐구에 있으며, 이러한 진리 탐구에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선행사상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체계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 혼돈스러울 때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상황에서 물러나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식인의 선택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이뤄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놓인 '구조적인 조건'과 '상황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기도 했으나 이황이 살았던 당시에 놓인 시대적 상황은 정치보다는학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이 강하게 작용하였던 시대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기에 수입된 성리학은 적어도 이황 시대까지 그 온전힌 이해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황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일차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왕도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조광조의 좌절로부터 얻은 교훈도 있겠으나 울바른 통치를 위해 먼저 올바른 학문을 세우고 이 학문을 이어갈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이황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며, 이황은 이를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이황이 남긴 저작들은 <퇴계전서>에 집약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학십도>이다. 이황은 그의 나이 68세가 되던 해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학문의 핵심을 10개의 도표로 정리한 책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성학십도>이다.

 

이 책은 서론격인 '진성학십도차'와 '태극도', '서명도', '소학도', '대학도', '백록등규도', '심통성정도', '인설도', '심학도', '경재잠도', '숙흥야매잠도' 등 10개 도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7개는 앞선 학자들이 만든 것을 고른 것이지만, '소학도', '백록등규도', '숙흥야매잠도'의 3개 도표는 이황이 직접 만든 것이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심통성정도'인데, 여기서 이황은 '사단칠정'과 '이기론'을 다루고 있다. <성학십도>가 갖는 의의는 성리학에 대한 이황의 이해가 대단히 깊었다는 데 있다. <성학십도>를 통해 조선의 주자학은 중국의 주자학과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황은 초야에 물러나 있으면서 현실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올린 바로 그해에 이황은 '무진육조소'를 상서했다. 이 소에서 이황은 '성학을 돈독하게 존숭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하고, 인군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을 밝힘으로서 인심을 광정하게 할 것'을 강조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이황의 학문적. 정치적 소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이황의 학문은 그의 제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뤘다. 이들과 이들의 후예들은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학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에 소개되어 도쿠가와 시대 이후 일본 유학사상의 발전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황의 삶과 사상에서 특이한 것은 이이와의 만남이다. 이이는 23세가 되던 해 도산을 찿았다. 그때 이황은 어느듯 나이가 53세였다. 당대의 조선 최고의 대학자를 찿아간 이이는 학문적 배움을 구하기 위해 찿았고 이황은 젊은 나이의 이이가 자신을 찿아 온 점과 그의 뛰어난 학문적 식견을 보고 기꺼이 이이를 맞았다. 이이는 이황 곁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배움을 구했고, 두 사람이 나누었던 문답은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이이가 학문적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으나 대단히 이채로운 만남이 었고 후일 이이가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이황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이는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치가로 지식 영역과 정치 영역에서 모두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정치 참여에서 이이의 태도는 이황보다 적극적이었으며, 진리 탐구에서도 이황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사상과 정책을 동시에 아우른 지식인 정치가라는 점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경세가의 모범이 다름아닌 이이였다.

 

이이는 1536년 중종 31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 또는 석담이다. 아버지는 이원수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이이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였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8세 때에는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고 한다. 13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23세에 유명한 '천도책'을 지어 장원 급제하였다. 이이는 이후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이의 삶에서 주목할 이력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이듬해 하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에 다른 충격으로 보여지는데, 그의 사상에 불교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하게 만들고 이 이력은 후일 이이를 종장으로 하던 서인 세력에게는 정치적 부담을 지속적으로 안겨주기도 하였다.

 

이이가 29세에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나간 이후 이이는 출사를 거듭하였다. 이 시기는 '을사사화' 이후 사림파가 지식 영역은 물론 정치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때였으며, 그만큼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시대정신이 함의하는 바가 자기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신과 해법의 탐구에 있다면, 이이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요구되는 개혁을 치열하게 모색하였다. 이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6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중쇠기로 진단하고 일대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판단하였다. 창업과 수성을 지나 조선은 이제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이의 정치적 기획은 어느 한 분야에만 치중된 게 아니라 국방.경제.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는데, 특히 그는 민생을 중시하고 폐법 개혁을 강조했다. 그가 남긴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은 바로 이런 일련의 종합적 개혁안, 다시 발해 시대정신을 제시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성리학 연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참여를 모색했던 이이는 지천명에 이르기 직전 49세였던 1584년 선조 17년에 세상을 떴다.

 

 

 

 

이이는 나이 46세에 대사간직을 수행할 때 지식인의 정치 참여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하늘이 낸 백성으로 자처해 반드시 유가의 이상적인 문화와 도리가 크게 행해지는 것으로 보고서야 세상에 나와 벼슬길에 드는 사람, 또는 세상의 도리를 서서히 구원하되 군주가 날아들을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깨우쳐나가는 사람, 끝으로 하.은.주 세 왕조의 이상 정치를 거론하며 그것대로 실행하라고 청하다가 그 말이 수용되지 않으면 곧바로 떠나는 세 가지 유형이라고 했다.

 

이이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 길이었다. 출사하여 한편으로는 개혁의 정책적 청사진을 잇달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서히 균열의 기미를 본인 동서 분당을 막으려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자기 사회를 실천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조광조와 유사한 노선을 걸었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통합을 중시하면서도 개혁을 추진한 이이의 정치적 실천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이는 열정적인 정치가인 동시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이다. 이 이론은 음양동정하는 작용인 기가 발하면 그 작용원리인 이는 거기에 탈 뿐이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다. 이이는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보고 기의 능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론은 이후 '주기론'으로 체계화되었으며, 이황을 따르던 영남학파와 비교해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가 현실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한 이가 이황이라면,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조선 특유의 성리학을 주체적으로 확립한 이는 이이다. 또한 이이는 유학의 양대 주요 저서인 <소학>과 <대학>에 대응하여 <격몽요결>과 <성학집요>를 펴냄으로서 유학의 토착화를 이뤄냈다는 점 역시 평가 받고 있다.

 

이이가 남긴 주요 저작들은 <율곡전서>에 집약되어 있다. 그 중 주목할 저서는 <성학집요>이다. 그의 나이 40세때 집필된 이 책은 군주의 학문에 요점이 되고 도학의 정수가 될 만한 내용을 유교 경전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여기서 이이가 주장한 것이 '대동사회(大同社會)'이다. <성학집요>의 '위정공효' 부분에서 이이가 <예기>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늙은이는 종신할 곳이 있고, 젊은이는 쓰일 곳이 있으며, 어린이는 자랄 곳이 있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사람, 병든 자와 불구자도 모두 부양될 곳이 있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이이의 대동사회론에 담긴 의미는 경장의 시대에 요구되는 최선의 가치를 '민생개혁'과 '사회통합'에서 찿았다는 데 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은 오늘날 우리 사회 최대 현안인 민생개혁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복지국가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정치의 본질이 국민 다수의 물질적.정신적 삶의 향상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란 원래 반복과 변화에 있다. 반복하되 변화하는 나선형 발전이 역사의 실체를 구성한다. 역사의 반복성을 강조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이나 역사의 비약을 강조하는 '단절론적 역사관'보다 대동사회에 담긴 의의는 이러한 역사의 순환과 단절을 넘어선 정치의 분질에 대한 보편적 메세지에 있다고 본다. 국가의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이 대동사회에 담겨 있으며, 바로 여기에 이이 사상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개혁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이루지 못한 채 이이가 이승을 떠난 이후 붕당정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왕조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였다. 그의 개혁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는 정도전 이후 조선 최고의 지식인 정치가였다. 그의 학문은 기호학파로 계승되어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로 대표되는 기호학파는 서인 세력의 중추를 이루었고,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까지 정치를 주도했다. 이이의 영향이 서인 세력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학문의 현실성을 강조한 면에서 실학정신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등의 실학파들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표본이다. 이황이 학문 연구에 중점을 둔 반면 이이는 학문과 정치를 병행했다. 두 사람 모두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치열하게 모색한 동시에 시대적 대의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이황과 이이가 활동하던 시기가 대략 500여년 전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우리 학문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오늘날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두 가지로 나누는데, '보편적 지식인'과 '특수직 지식인'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보편적 지식인은 정치 참여가 자신의 학문적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권력 비판은 무엇보다도 권력의 외부에서 그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자유롭게 비판이 가능하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많은 지식인들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담론을 형성한 것은 지식인의 초라한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날 언론을 통해 권력에 기생하려는 지식인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특수적 지식인의 경우는 정치 참여가 자신들의 연구가 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책 개발과 추진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다. 그동안 특수적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로 정책적으로 얼마나 적용되어 현실을 변화시켰는가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참여 자체를 불온시 하는 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히려 주요한 것은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하는 데 지식사회와 정치사회 간에 생산적 상호협력과 견제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자기 사회와 무관한 지식과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말에는 이미 현실 참여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그 참여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시대가 어지러워 물러나 학문에 전념한 이황의 선택과 시대가 요구해 경세를 치열하게 모색했던 이이의 선택은, 그 차이를 떠나 현재에도 여전히 그 울림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한 두 사람의 천재적인 지식인이 바꿀 수는 없다.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연구를 하던, 이룬 학문을 바탕으로 출사를 하던 그 시대의 지도층의 도덕성과 윤리관과 사회적인 정신체계가 성숙되어야만 개혁과 부국강병을 이룰 수가 있다. 이황의 학문이나 이이의 정치 참여가 공허한 사상적인 울림만 남기거나 개혁에 실패한 것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마음 속에 내제된 탐욕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한 시대를 한 두사람의 지식인이 바꿀 수는 없듯이 한 시대의 시대정신은 사회적인 통합정신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공부한 선비나 학자, 교수라도 현실 참여에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실패한 사례가 더 많다. 만약 그의 정책이 실패한다면 엄청난 국가 재정을 파탄내고 국가 부도사태 또는 심하면 망국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최근 유럽의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사건에서 보듯이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와 그 사회적 도덕적.윤리적 정신 세계가 붕괴된 경우에 해당된다. 또 그것은 결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양산할 수도 있다. 또 4년을 혹독한 사관생도 생활을 통해 조국, 명예. 충성을 배운 사관생도들도 임관후 세월이 지나면  그들 무리 중 일부는 누구보다도 탐욕스러워지고 비리와 부패에 연루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고급 장교가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듯이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겉으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실적이 좋거나 아무리 혹독한 정신교육과 훈련을 통해 연마하고 배웠다고 하나 실제 참여 현장에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다양한 위기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종합적인 대처 능력이 미흡하거나 도덕성.윤리성이 붕괴되면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지식인들이 현실 참여로 잘못된 정책은 많은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유발하다는 점에서도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사전 충분한 실험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야 현실에 적용하는 방안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