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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36 : 조선의 역사 378 (제26대 고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836 : 조선의 역사 378 (제26대 고종실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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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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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희(李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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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863년 ~ 1907년 |
출생일 | 1852년 9월 8일 |
사망일 | 1919년 1월 21일 (66세) |
황후 | 명성황후 |
부친 | 흥선대원군 |
모친 | 여흥부대부인 |
이전 왕 | 철종 |
다음 황제 | 순종 |
고종(高宗, 1852년(철종 3년) 음력 7월 25일(양력 9월 8일) ~ 1919년 양력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재위 1863년 ~ 1897년)이자 대한제국의 광무제(光武帝, 재위 1897년 ~ 1907년)이다. 휘는 이희(李熙) 또는 이형(李?), 초명은 이재황(李載晃), 아명은 이명복(李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과 헌종의 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三從叔)인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 민씨 일족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열강의 개항 요구와 개항하는 즉시 청-일-러 3국의 3파전이 치열한 가운데 국권을 보존해왔으며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양위하였고,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하자 그가 독살당했다는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의 독살설이 기록으로 전한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국새가 발굴되었다.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63년부터 1864년까지 삼종숙모(三從叔母)이자 양어머니인 신정황후 조씨(神貞皇后 趙氏)가 섭정을 하였고 1864년부터 1873년까지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을 하였으며 1873년부터 1907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2009년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
생애
출생부터 즉위 전
출생과 가계
고종은 헌의대원왕과 순목대원왕비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사저 운현궁은 처음 구름재댁으로 불리다가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운현궁이라는 궁의 이름을 받게 된다. 처음 이름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조선의 26대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또한 처음 자(字)는 명부(明夫)였다가 즉위 후 성림(聖臨)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본래 영조와 사도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뒤에 고종 때 장종으로 추존)의 서자 은신군은 자신의 작은할아버지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고, 다시 순조는 아들이 없던 서삼촌 은신군에게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7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로써 남연군은 인조의 8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양증손자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고종에게는 생모 순목대원왕비 소생인 친형 흥친왕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다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복 형 이재선과 이복 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은신군의 이복 형이던 의소세자와 정조의 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 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효명세자빈 조씨(훗날의 조대비)전을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헌종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가 없던 신정왕후는 그런 흥선군의 조건을 수용한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즉위 이전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도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즉위 배경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혼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하나는 김병학의 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병문의 딸이었다. 이런 밀계로 흥선군은 안동 김씨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를 찾아가 물밑 교섭했다. 조대비의 아들은 헌종이었으나 헌종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강화도령 덕완군 원범이었다. 철종이 헌종보다 윗 항렬이므로 헌종의 양자가 될 수 없었고, 익종에게도 동생뻘이기 때문에 익종의 양자가 될 수도 없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는 이 점을 보고 철종을 간택하여 순조의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히게 도와준다면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계를 맺었다.
추측하건데, 조대비는 그동안 괄시받으며 지내온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무력화 시킬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고, 풍양 조씨가 다시 권력을 장악할 속셈, 장남보다 차남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는 계산, 파락호 생활에 빠져 있던 흥선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후일 왕후 민씨의 간택 과정에서도 조대비가 풍양 조씨 가문의 규수를 세우려 하였으나 흥선군에게 당한 경우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1863년 12월 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대비와 조성하, 조영하, 정원용 등은 비밀리에 옥새를 접수한 뒤, 흥선군의 적실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으로 입승대통한다는 교서를 재빨리 발표한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직후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형식상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정에서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대원군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그녀가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들은 열기구를 본따,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모든 군사와 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와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대원군은 국왕의 고유권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친정 초반
개항과 친정
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음력 9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 중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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