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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32 : 조선의 역사 374 (제25대 철종실록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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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32 : 조선의 역사 374 (제25대 철종실록 8)

두바퀴인생 2013. 1. 17. 04:15

 

 

한국의 역사 832 : 조선의 역사 374 (제25대 철종실록 8)  

                

                                                                                              

                                                                               철종의 예릉

 

 

제25대 철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6. 조선 말기의 사상운동 : 동학의 탄생

  

철종 대는 안팎으로 거대한 변화가 휘몰아치던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인간 평등과 존중 사상을 제시하며 동학이 나타나자, 그것은 영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번지기 시작하였다.

 

동학은 1860년 철종 11년 4월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면사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이 널리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사상운동이자 종교'로 대두된 데에는 나라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던 서민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해 공명하는 자가 많아진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최제우 자신 또한 몰락한 양반가의 서출로 태어났으니 그러한 교리가 세워진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이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가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찿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최제우는 사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바꾼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찿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고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시는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사상은 후에 일어난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자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를 두었으며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 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해 11월 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에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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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동학 사상과 관련된 몇가지 자료를 올린다. 참고하시길...

 

 

 

'동학'이란 무엇인가?

 

동학(東學)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한편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 또는 쇠퇴하여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종교를 제창, 동학이라 하고 종래의 풍류 사상과 (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21자의 주문 '至氣令至, 願爲大峰,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태워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제병장생(濟病長生),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적서제도(嫡庶制度) 등을 부정하는 현실적·민중적인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3년(철종 14)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 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동학의 교회 조직은 최시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즉 전국 각지에 세포 조직인 포(包)를 설치하여 접주(接主)로 통솔케 하고,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도접주(都接主) 또는 대접주(大接主)라 하여 여러 포를 통솔하는 한편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6가지 직분을 두었다.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즉, 천주교유교적인 윤리에 젖은 민중에게 영합되지 않을뿐더러, 천주교를 신분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지배논리를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천주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리로 부정과 비판을 하는 불온한 종교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널리 유포되지는 못하였다.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최제우

 

최제우(崔濟愚, 1824년~1864년)는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경주이다.

 

1824년 음력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巫俗),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32세(1855)에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한 끝에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지경에 처한 가족을 처가에 맡긴 채 구도 생활을 계속하던 수운은 36세(1859)가 되던 해에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1860년(철종 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하게 된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사건이 있었다(→제2차 아편 전쟁). 이 여파로 조선에 대한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조선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즉,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는데, 갈수록 신도가 늘어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연대기

  • 1824년 경주군 현곡면에서 출생
  • 1833년(10세) 모친 별세
  • 1840년(17세) 부친 별세
  • 1842년(19세) 울산 밀양박씨와 결혼
  • 1844년(21세) 장삿길에 나서 이후 10년간 전국을 주유
  • 1854년(31세)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 시작. 음력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이사
  • 1856년(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의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중단.
  • 1857년(34세)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일 입산기도.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
  • 1858년(35세) 용광업 그만 둠.
  • 1859년(36세)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
  • 1860년(37세) 음력 4월 5일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 1861년(38세) 음력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체계를 세움.
  • 1861년 음력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布德) 시작. 음력 7월에 <포덕문> 지음.
  • 1861년 음력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 <안심가> 지음.
  • 1861년 음력 11월 경주 관아에서 수운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짐. 수운은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감. 음력 12월에 남원에 당도. 이후 남원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
  • 1862년(39세) 음력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여집에 은신. 음력 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
  • 1862년 음력 9월 29일 경주진영에서 수운 체포. 수운은 음력 10월 5일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옴. 음력 11월 9일 흥해 매산리로 피신. 음력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
  • 1862년(40세) 음력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옴. 음력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동. 음력 7월에 최경상(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
  • 1863년 음력 12월 10일 조선 왕조의 관군에게 체포됨.
  • 1864년(41세) 음력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斬刑)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