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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7 : 조선의 역사 289 (제17대 효종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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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7 : 조선의 역사 289 (제17대 효종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10. 23. 08:05

 

 

 

 

한국의 역사 747 : 조선의 역사 289 (제17대 효종실록 6)

                                                                                                                                                                                  

 

                   

 

 

 

제17대 효종실록(1619~1659년, 재위 : 1649년 5월~1659년 5월, 10년)

 

 

2. 효종의 북벌정책과 조선 사회의 안정(계속)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화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해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 쓴 <경민편> 등을 간행하였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신료들과 마찰을 빚기고 했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안빈 이씨 등 4명의 부인에게서 1남 7녀를 얻었는데, 인선왕후 장씨 소생으로 현종을 비롯한 숙신, 숙안, 숙명, 숙휘, 숙정, 숙경 등 여섯 공주이고, 안빈 이씨 소생으로 숙명옹주 1명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위치했다가, 후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졌다.

 

인선왕후 장씨는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 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항복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에 시행되지 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정식으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 그녀는 효종과 함께 영릉에 묻혔다.

 

 

 

 

3. 효종실록 편찬 경위

 

효종실록은 총 21권 2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49년 5월부터 1659년 5월까지 효종 재위 10년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60년 5월에 시작되어 도창당상 3명, 도청낭청 4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그리고 그 외 실무진 39명 등 총 5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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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급서와 사라진 북벌의 꿈

현실적으로 효종의 북벌 계획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당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할 때여서 군사력을 확충할 만한 재정이 부족했다. 그리고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들도 북벌에는 회의적이었다. 효종과 함께 북벌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서인의 거두 송시열조차 북벌에 찬성하지 않았다. 1657(효종 8) 송시열이 올린 시무책인 정유봉사(丁酉封事)에서 송시열은 효종에게, 내치에 힘써 백성을 수고롭지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말은 전쟁 준비에 백성을 내몰지 말라는 뜻이었다.

 

효종이 급사하기 전인 1659(효종 10) 3 11일에 있었던 사람의 기해독대에서도 효종이 북벌의 의지를 밝히자, 송시열은 뜻이 옳다고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효종에게 자신은 자신이 없는 일이며 효종도 내치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왕의 뜻을 완곡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증오심으로 전쟁까지 일으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거의 소탕해 중원을 완전히 제패한 상태였다. 불안한 상태의 조선이 강력한 청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기해독대에서 효종은 10년간 준비를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송시열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대답은 마음 공부에 치중하시라는 말뿐이었다.

 

기해독대가 있은 2개월 뒤인 1659(효종 10) 5 4일에 효종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실록에 보면 4 27일에 처음으로 효종이 머리에 종기를 앓아 약방의 진찰을 받았다. 종기가 갑자기 심해져 일주일만에 죽은 것이다. 효종이 죽던 종기가 심해져 의원 신가귀가 종기를 앓는 머리에 침을 놓았는데 피가 멎지 않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벌을 꿈꾸던 강인한 군주 효종은 41세의 나이로 어이없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당시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효종은 북벌 계획을 거의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효종이 강화했던 부대인 어영청, 수어청, 금군 등은 한양을 방어하는 군대였고, 백성들에게 성을 보수하도록 시킨 것을 보면, 효종은 북벌보다는 외침에 대비하려는 목적이 컸던 아닌가 싶다.

 

다만 죽기 얼마 송시열과 독대했던 기해독대에서 10년을 준비해 북벌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사실이 효종을 북벌 군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해독대는 사관마저 물리치고 효종과 송시열 둘이 나눈 이야기이다. 기해독대에서 나눈 이야기는 효종이 죽은 송시열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공개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해독대의 이야기도 얼마나 객관성을 지닌 사실인지는 하늘만이 일이다.

 

 

 

소중화사상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오랑캐로 여겼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화의 나라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적 문화적 근본이었던 명나라가 오랑캐의 손에 사라진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과로 조선에서는 소중화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한족의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이 오직 세계의 중심이고 민족은 오랑캐라는 의미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족의 명나라가 망하고 명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한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으니,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바로 소중화사상이다.

 

소중화사상은 사대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러나 역시 현실적이지 못한 사상이어서, 조선은 정치적으로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청나라를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망한 나라인 명나라를 계승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사고로, 명나라 황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만동묘나 대보단을 세우기도 했다. 훗날 영정조 시대에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실학이 태동하기 전까지, 소중화사상은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사상이었다.

 

만동묘 성공문(여행편지).jpg

  <만동묘. 송시열은 괴산의 화양구곡에 만동묘를 세워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올렸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황제였고 의종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 조선은 만동묘에서 명나라의 두 황제를 제사 지내며 소중화사상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