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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4 : 조선의 역사 286 (제17대 효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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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4 : 조선의 역사 286 (제17대 효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10. 20. 03:26

 

 

 

 

한국의 역사 744 : 조선의 역사 286 (제17대 효종실록 3)

                                                                                                                                                                                                          

 

 

                               

 

 

 

제17대 효종실록(1619~1659년, 재위 : 1649년 5월~1659년 5월, 10년)

 

1.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계속)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의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좋아하는 궁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었는데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헸다. 다만 그의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일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관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는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회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의 조카 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식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담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였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첯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안되는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도록 했다.

 

이후 소현 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세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케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추종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반청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명사대모화 사상은 정묘.병자호란을 불러왔고, 결국 자신이 무릎을 끓고 청태종 앞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수많은 백성과 삼학사, 그리고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까지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에서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찬양하며 조선이 변화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인조에게는 그런 세자가 청의 첩자 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자신의 통치철학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배반감으로 이어져 결국 아들을 독살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독살되자 그때까지 심양에 남아 있던 봉림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645년 5월이었다. 인조는 한 달 뒤인 6월에 신하드들에게 세자 책봉 의사를 밝혔으며,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 여를 심양에서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사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 외교를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빈청사상을 한껏 고조시켰던 인물이었다. 이같은 그의 반청 행동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였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불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하였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