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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3 : 조선의 역사 285 (제17대 효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743 : 조선의 역사 285 (제17대 효종실록 2)
제17대 효종실록(1619~1659년, 재위 : 1649년 5월~1659년 5월, 10년)
1.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1637년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돌아가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 중 셋째 아들 인평대군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립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야 귀국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둘 다 8년 동안 함께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나간 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활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은 반청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에서 생활상은 역관이나 사은사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에 심취하여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몹시 분개했다. 게다가 귀인 조씨와 김자점 등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시킴으로써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불만과 불심ㄴ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 즈음 청나라는 명을 멸망시키고, 세자 일행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 1645년 2월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이조는 전혀 세자 일행을 반기지 않았다. 세자의 큰 아들은 당시 조선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인조는 청으로부터 철저한 반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은 조선과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인조와 상의하지 않고 심양의 조선관에서 소현세자와 상대하기를 원했다.
이런 청과 소현세자의 태도는 인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김자점, 귀인 조씨 등이 소현세자가 입국하면 왕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인조의 경계심을 더욱 높여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그런 내막을 모른채 도착하자 마자 곧 인조를 찿아뵙고 청의 내부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조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고, 그가 서양의 책과 문물, 기계 등을 보여주자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며 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얼굴을 향해 던져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앓아 눕고 말았다. 병의 원인이 울화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그를 진찰했던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때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그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나 침을 놓았는데, 그는 이 침을 맞더니 3일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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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은 역사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었다. 드라마 <추노>에서도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세자가 송태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천근같네. 이 서찰이 그대에게 무사히 전달된다 해도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듯싶네. ……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먼저 가네. 친구!”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 한 예이다. 그렇다면 과연 소현세자는 정말로 독살되었을까?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8년 동안의 볼모생활에서 벗어나 1645년(인조23) 2월 1일 마침내 심양을 떠나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4월 26일, 며칠 전 발병한 학질이 위중해져 정오경에 사망하고 만다. 건강했던 세자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세상에 세자 독살설이 퍼지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강한 정황 증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학질은 1645년 4월 23일 발병하여 사흘 만인 26일에는 급사할 만큼 악화되었다. 게다가 사망한 이후 약물에 중독된 듯 한 증상까지 나타났다는 점에서 독살의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27일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어머니 인열왕후의 서제가 세자의 염습에 직접 참여하여 목격한 것을 전한 것이니만큼 독살설에 더욱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누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원하였는가?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친청파인 소현세자를 왕위에 올릴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실제로 세자는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심양에서 이미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인조의 권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하였다.
인조와 세자의 갈등 관계는 1644년(인조 22) 2월 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장례 참여문제로 절정에 이른다. 장인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세자 내외가 청나라의 허가를 얻어 임시로 귀국하였으나, 인조의 반대로 끝내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8년 만에 귀국한 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처부모도 찾아뵙지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귀로에 세자는 인조의 명 없이 독단으로 평양에서 선비들의 글짓기를 시험하고, 친히 무재들의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후에 당시 선발된 진사 김연 등이 급제를 내려줄 것을 상소하는 일이 발생한다. 상소를 접한 승정원의 여러 신하들은 세자가 임금의 명도 없이 과거를 치른 일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릴까 염려하여 이를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8월 29일) 게다가 그 사이 3월 21일에는 심기원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였고 여기에서 세자 추대설이 등장하였으니, 인조는 더욱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자에게 침술을 시술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이형익을 처벌하지 않은 점이라든지, 세자의 상례를 지나치게 소략하게 치루었다는 점 또한 의문을 증폭시킬 만하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추측에 무게를 싣는다.
그러나 『실록』외에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등을 참조하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승정원일기』 등의 기사는 세자가 귀국하기 전부터 이미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귀국 전후로 세자의 병과 관련된 기사가 여러 번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실록』에서와 같이 건강하던 세자가 갑자기 급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병사로 보는 주장을 살펴보자. 「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에서 김종덕은 『심양일기』와 『을유동궁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세자의 병력을 날짜별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간 이후 고초로 인해 산증을 얻어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울화병이 있는 상태에서 한기와 접촉하여 산증이 재발하였고, 귀국 후 의원이 이를 학질로 잘못 진단하고 치료하는 바람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명호 교수는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현세자는 1월 9일에 심양에 도착하였고, 그의 병세가 조선에 알려진 것은 1월 10일이었으므로 병세를 기록한 보고서는 1월 9일 이전에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들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세자의 병세가 수행 의원의 실력으로는 고칠 수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음도 뜻한다. 2월 18일 귀국 이후에도 세자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것은 세자의 질병, 죽음과 관련하여 실록의 기사가 전부가 아님을 반증한다.”
이러한 주장을 종합해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할 충분한 동기는 있었으나 세자의 병세가 이미 심각하여 실제로 독살을 감행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또한 소현세자의 죽음을 명백하게 독살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구체적인 증거도 나오지 않았으나 인조의 태도와 사후 시체의 상태, 초상, 참관 제한, 능묘 조성, 치료한 어의에 대한 처벌 등의 행위에서 독살로 단정짖는 것이 대부분의 시각이다. 결국 소현세자는 건강이 안 좋은 상태로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오던 중에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과 독살설, 또 정확한 질병의 사안을 잘 모른채 진료한 어의의 실수로 인한 의료사고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소혀세자가 죽고 난 뒤 세자빈 강씨와 원손들에 대한 인조의 사사, 유배, 사망 등의 결과를 놓고 볼 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원손들의 죽음, 그리고 세자빈 강씨의 복위 문제로 인해 일어난 장살사건은 물론, 병리학적으로 독극물에 의한 죽은 시체의 상태, 학질의 병리 현상 등을 분석해보면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사가들은 이러한 여러 정활을 미루어 보아 독살로 추정할 뿐, 실제적인 진실은 인조만 알 뿐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무능한 인조 시대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볼모 생활에서 보인 대청 협력 관계, 명의 멸망 과정, 아담 샬 등 천주교와 서양 문물에 대한 심취, 개화 사상에 대한 그의 생각, 세자빈 강씨의 조선 포로 구출 및 속환 노력, 무역과 경제적인 활동 등에서 그가 만약 죽지 않고 인조에 이어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면 아마 조선은 개화의 눈을 빨리 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일 것이다. 그래서 그로 인해 조선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부국강병을 이루어 후대에 일제에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기대감이 그의 죽음에 대한 미련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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