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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41 : 조선의 역사 283 (제16대 인조 58) 본문
한국의 역사 741 : 조선의 역사 283 (제16대 인조 58)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청나라(후금)의 건국 과정과 정묘, 병자호란 39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사대부 집안 환향 며느리들 대부분 버림받아 ‘두 번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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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 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 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실절한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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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 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 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종실(宗室)이,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 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은 단호했다. 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혼을 허락할 경우, 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조, 훈신(勳臣)의 독자 장선징에게만 특별히 이혼 허락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 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실절한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 ‘실절한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최명길은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 이번에는 호소문 속에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 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 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 사책(史冊)에도 이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끌려가던 안단 “나를 죽을 곳에 빠트린다” 울부짖어
환향녀들의 운명은 가혹했지만,포로들 가운데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속환해 줄 가족도 없고, 가족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고,또 도망쳐 돌아올 여건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청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속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와중에도 귀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현종대에 도망쳐 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의 사연이 주목된다.
개성 부근에 살다가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1644년 청이 입관(入關)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는 1662년(현종 3)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번 실패한 뒤 1664년 다시 시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대모험이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을 고향인 개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개성에는 그를 품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조정 또한 그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柵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 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 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물경 37년 만이었다. 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의주 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 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안추원과 안단의 사연은 처절하다. 각각 28년, 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둘 모두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 한 사람은 고국에서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했다. 이들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연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 양상 달라졌을 것”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 청군은 병력의 수, 무기 체계,전략과 전술,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 그들은 교전 경험도 풍부했다. 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 경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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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한 것과 똑같다.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오랫동안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 만약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또 김경징 같은 용렬한 인물에게 섬의 방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의 배후에는 엄연히 명이 있었다. 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후금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설사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었다. 적은 나를 너무나 잘 아는데, 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기까지 했던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다. “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잘 몰랐을 것이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그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 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았다.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 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그 상징이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했다. 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수많은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 청은 달랐다.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군율로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역설적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이 보인다. 1627년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에 대한 ‘각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안단 ’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을까? 1997년 혹심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0년 만에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다시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다.
1627년과 1637년,1997년과 2008년.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두려워하고,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하며 글을 마친다.
■ “지금의 경제위기도 10년 전 IMF 원인 규명 미흡했기 때문” 연재 마치는 한명기 교수의 소회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입니다. 지금의 경제난국도 10년 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기획시리즈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가 2007년 1월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꼬박 2년간 모두 104회에 걸쳐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 한 교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위기는 언제든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 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위정자들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 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 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다.
한 교수는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의 전말을 학술 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로 집대성해서 풀어쓴 사례는 드물다. 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광해군’ 등의 저서를 쓴 한 교수는 앞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대중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때문에 현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길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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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시대를 마감하면서......
이로써 인조 시대 역사를 마감하려 한다.
선조에 이어 인조 시대를 기술하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외침이라는 국난을 당하여 나라의 존망이 불투명했던 시기였고 조선의 역사에서 큰 변곡점을 이루는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이러한 국난을 당하여 어쩌면 망할뻔했던 나라를 다시 유지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았고 그러한 국난을 당한 후에도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지 못한채 왕실과 지도층이 권력만 탐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결국 나라가 일제에 어떻게 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단초가 될 것이다.
조선은 두 번의 큰 외침을 당하면서 망국의 기로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다시 명맥을 유지했다는 점이 경이롭다. 선조대의 임진왜란은 그래도 명나라 지원군의 도움과 조선의 일부 부유한 사대부들이 일으킨 의병, 그리고 세계 해전 역사상 영원히 남을 전적을 세운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그리고 행주대첩의 영웅 도원수 권율 등 명장들이 있었기에 다행히 국본을 다시 세울 수 있었으나, 인조 시대의 정묘.병자호란은 오랑캐로 천시하고 무시해왔던 조선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국본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이 특히하다. 그래서 한마디로 이씨 왕조가 사라질뻔 하였고 나라가 멸망당할뻔 했던 대사건이었다.
조선의 이씨 왕조와 사대부, 그리고 양반 계층이 유교를 국시로 삼아 이상론에 불과한 사상의 공리공론에 빠져 말과 글에는 충효가 철철 넘치는 사회였으나 막상 국난을 당하면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지도 못한채 제 몸 사리기에도 바쁜 졸부로 변했던 것이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로 양반 계층이 나머지 신분 계층 대부분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노예처럼 부리며 자신들은 치부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왔던 계층이었다. 양반, 즉 사대부인 그들만의 나라였고 그들만의 사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양반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를 바탕으로 평생 놀고 먹으면서 글 공부나 하여 과거를 보아 출세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였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초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첩도 여럿 거느리고 성적인 만족을 누리면서 살았던 평생 세습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서에 이성계의 반역을 좋게 표현하여 '위화도 회군'이라는 것은 결국 '역성혁명'이었던 것이다. 쿠테타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 시대 창궐하여 부패의 극을 달리던 불교의 폐해를 실감하고 유교를 국시로 삼아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이후 조선은 일부 시대를 제외하고는 정도전이 주장하던 신권우위의 조정이 유지되면서 신권이 왕권을 음양으로 구속하였고 왕자의 난, 세조의 왕위찬탈, 중종 반정, 인조 반정을 통해 수없이 배출된 각종 훈구공신들에 의해 권력이 자손대대로 유지되면서 200여 년 가까이 평화기를 누려왔다.
그러면서 임금들은 항상 왕권 유지와 승계, 정통성 확보에 연연하였고 성종대부터는 훈구 세력에 억눌린 왕권을 세우기 위해 재야 사대부들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대부들을 각종 사회를 일으켜 숙청하는 데 성공하기를 여러번,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서는 유교의 이상론에 근거하여 상호견제를 이루도록 당쟁을 조장하는 한편 결국 훈구 세력들을 몰아낸 사대부들이 권력을 잡자 이제는 그들끼리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군자의 당'이 아닌 '소인의 당'에 불과한 학연, 지연에 다른 파벌과 분파를 조성하여 조정의 각종 정책마다 백성과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당쟁이 아니라 당론에 따라 반대를 위한 반대를 당쟁을 일삼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던 것이다. 모든 사상이 그러하듯이 이상은 좋으나 현실은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탐욕이 굴곡진 역사를 이어왔듯이 그들도 당쟁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부적으로는 점점 부패하여 갔으며 국제정세에 까막눈이 된 채 문약에 흘러 무를 천시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연적으로 국방은 소홀해져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화를 겪으면서 선조와 조정의 무능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 왕권이 실추되었고 적통 후계자 얻기에 고심하던 선조가 50줄이 넘은 나이에 10대의 인목대비를 맞아들여 영창대군을 낳으니 광해군의 몰락과 인조반정의 불씨는 여기서 이미 비롯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전란 중 전공을 세운 의병 출신 등 대북파의 강력한 지원하에 어린 인목대비의 고심 긑에 내린 언문 교지로 어렵사리 왕위를 승계하게 된 광해군은 임진.정유 7년 동안 전쟁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란 당사자로써 전후복구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 만주 지방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태양처럼 떠오르는 후금과 만력제 이후 저물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양쪽의 요구에 고민하였다.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을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기에 중립외교를 펼치며 조선이 전화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강홍립의 조선군을 명의 요구에 의해 파견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적절히 대처하라는 등 절치부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통성 부재라는 불안한 왕권은 물론 대북파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일련의 정적 제거 과정이 자신을 옹립한 대북파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래서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의 유배와 살해, 인목대비 유폐 등 대북파들의 지나친 숙청작업으로 인해 '폐모론'과 '폐륜군주'라는 유교 사회의 절대적인 도덕 및 윤리 추락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친형을 잃은 능양군이 복수를 칼을 갈고 있었고,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남인들이 뇌화부동하여 반정의 싹이 터고 있었던바, 그들의 명분은 대명사대론과 폐륜군주와 폐모론 등 그럴듯한 충효의 논리를 내세웠으나 속으로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 서로 영합함으로써 인조반정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쿠테타가 일어나 광해군이 좇겨나고 능양군이 즉위함에 바로 인조였다.
결과론적으로 인조는 태어나지 말아야할 인물이었다.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복고 쿠테타'였다. 오로지 대북 세력에 의지한 광해군의 실정이 그 원인이 되었지만 광해군의 결정적인 실수는 너무나 많은 정적 제거와 인목대비의 유폐였다. 반정의 명분 중에 '폐모론'과 '폐륜군주'라는 부정적인 낙인은 재야 사대부들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반정에 동조하는 세력을 얻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인조 반정은 광해군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이미 반정군에 포섭된 상태였고 반정의 기미를 알면서도 보고를 받고도 광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임금을 호위하는 훈련도감 군사들이 반정군에 창의문과 궁궐문을 스스로 열어주는 바람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반정군이 밀려들자 광해군은 부랴부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나 결국 반정군에 체포되어 강화도에서 오랜 유배생활 동안 복위를 꿈꾸며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광해는 반정의 기미를 알아차리고도 별다른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의문이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의 왕권유지는 무의미하고 불가하다고 생각하였을까?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는 김류, 이귀 등 반정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임금이 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이들과 상의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한마디로 반정군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당시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무서운 속도로 궐기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던 시기라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투에서 계속 무너지면서 명의 멸망도 머지않은 시기였고 조선의 대명사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태도에 불만을 품은 후금의 노골적인 압박이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던 시기였다.
그러나 인간 만사가 그렇듯이 성공과 자만 뒤에는 반드시 추락이 기다리고 있는 법, 반정공신들의 권력독점은 물론 그들끼리도 서로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대파에 대한 음해와 중상모략을 일삼다가 급기야는 반정공신이며 서북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이괄을 음해하여 궁지로 몰자 이에 격분한 이괄이 서북 지역 방어군 태반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괄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오면서 도원수 장만이 있던 평양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토벌군을 격파한 다음 한양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급히 공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이어 이괄은 반정군 사상 최초로 한양을 무혈 점령하고 승리에 도취해 자만에 빠져 있다가 반정군을 뒤다라 온 장만.정충신 등이 이끈 관군이 무학고개 근방 안산에서 한양을 위협하자 관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대패하게 된다. 이에 이괄을 비롯한 반란군은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남은 일부 기병 병력을 이끌고 몰래 한양을 빠져나가 이천으로 도망을 치게 된다. 그러자 이미 반정군이 대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치는 등 패배를 실감한 이괄의 수하들에 의해 이괄을 포함한 반정군 지휘부가 대부분 살해되면서 이괄의 난은 허무하게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괄의 난으로 서북방면 방어군 태반이 반정군에 가담하여 소멸되는 바람에 서북 방면 방어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와 조정은 반정 사태를 수습하며 흩어진 민심을 무마하는 한편 서북 방면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병사와 물자를 보급하려도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태라 병력 보충이 거의 불가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종심방어와 축차방어 두 가지 방어 전략을 놓고 왈가왈부 하던 중 '청북포기론'이 대두되어 결국 청북 지역을 포기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잇는 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정하여 적과 결전을 벌인다는 전략을 세우고 두 곳을 축성하기로 하고 강화도를 축성하면서 경기.어영청 병력과 남도 수군 등으로 보강하였으며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설치하는 등 방어 태세를 준비하였다. 당시 청북 지역은 후금의 위협과 관리들의 수탈, 가도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 모문룡의 오랜 작폐로 인해 인구가 태반이 빠져나가고 농토가 황폐한 상태로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어 방어의 실효성이 의문시되던 상태라 이에 조정에서 결정한 방어 전략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축차방어 전략을 채택하여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선에서 후금군을 축차적으로 방어한다는 개념을 주장하여 그 전략에 따라 주요 지역 산성을 보강하고 후방의 병력을 보충하는 등 방어준비를 하였으나,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를 못하였다. 실제 정묘.병자호란 시에는 그러한 전략이 아무런 역활을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후금군은 기병을 주축으로 조선군이 주둔한 산성을 우회하여 평야지대를 통해 신속하게 남하하는 바람에 주로 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아무런 역활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군은 후방 지역에서 올라온 병력은 오합지졸로 훈련이 제대로 되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후금군의 철기병인 팔기군을 방어할 수 있는 전술도,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보병 위주의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의 대기병 장애물과 조총 운용 전술을 모르고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기병 전술을 전개하다가 7천 조선군이 전멸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정묘.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후금군의 팔기병을 전혀 효과적으로 방어할 무기나 전술도 개발하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으니 그동안 조선 조정이 반정과 반란, 내부 갈등 등으로 국력배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고 얼마나 군비 혁신에 소홀하엿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결국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서 46일을 버티다가 근왕병들의 대패와 강화도의 함락, 지독한 혹한, 그리고 군량이 떨어지자 인조의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으로 끝났다. 삼학사와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볼모는 물론 일부 사료에는 50만이 넘는 포로들이 끌려갔다고 한다. 남자들은 노예로 팔려가고 여자들은 성노리개로 전락하여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연명하다가 다행히 가족들이 돈을 구하여 속환되어 돌아오기도 하였으나 가난한 가족은 그것조차도 어려운 실정이라 통곡소리만 넘쳐나고 있었다. 또 일부 포로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도망쳐 왔지만 청의 강력한 요구로 다시 잡혀 청으로 끌려가서 발목을 짤리는 혹형을 당하였다. 사대부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석방되어 돌아온 여자들은 이미 청나라에서 이눔 저눔에게 더렵혀진 몸으로 지금의 홍제동 근방 냇가에서 몸을 씻고 환향녀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외면하거나 손가락질하는 형편이었으니 그녀들이 집으로 돌아와도 살아갈 엄두를 못내고 이혼을 당하거나 스스로 자결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나가 거지가 되고 미친년이 되어 전국 산천을 떠돌다가 굶주림과 약탈, 강간 등을 당하는 등 이름모를 산하에서 소리없이 죽어갔다.
이것이 무능한 지도자와 지도층을 만난 백성들의 고통이요 슬픔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런 조상의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원통하고 분함을 억누르기 힘들고 슬픔과 눈물이 절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후손들이 아니다. 이게 조선의 역사인가? 이것이 이씨 왕조라는 조선인가? 이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 백성들이 한없이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조선의 이씨 왕조와 조선 사대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런 현상이 나만의 현상인가?
우리들이 싸이의 말춤을 추며 즐기고 있을 동안 지금 우리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과거 인조 시대에 버금가는 비참한 역사를 다시 반복하려는 듯하다. 풍전등화같은 이 시대의 난국을 우리는 과연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 모두가 인조 시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격변하는 국제정세와 시대의 흐름, 내부적인 취약점, 각자의 사고와 생각 등을 한 번 쯤은 곰곰히 생각해 볼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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