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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9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5

두바퀴인생 2012. 6. 29. 08:59

 

 

 

 

우면산의 여름 9 : 민족의 불행 한국전쟁, 호국보훈을 생각하며...5

 

 

 

 

 

 

조선의 눈물은 계속된다.

 

 

11. 낙동강 방어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점점 남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북쪽 낙동강 전선은 한국군 제1,6,8,9,3사단이 다부동-팔공산-영천-포항을 연결한 전선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으며, 다부동 전투, 영천회전, 포항 형산강전투에서 적의 공격 예봉을 꺽으면서 전선을 버티고 있었고, 대전지역에서 미 24사단이 무너지자 미군은 낙동강 중부-남부전선에 미25사단, 미 기병7사단, 해병 여단, 영국.터키.호주의 참전국 부대 등이 마산-창녕-진주-합천- 추풍령-구미-왜관 전선에 투입되었다.

 

                                                   

                                                                         낙동강 전투 전황도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의 공방은 뺏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 전개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미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의 강력한 지휘아래 내선작전의 잇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왜관일대 적 밀집지역에 대한 공중 융단폭격이 실시되었고 미공군의 지상전 지원은 방어선 지탱에 큰 힘이 되었다. 제공권은 미공군이 적을 제압하고 있었다. 

 

UN군이 참전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는 여전했다. 북한군은 파상공세로 밀고 내려왔고, 국군과 UN군은 최대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며 전투력을 회복하는 지연전을 벌이며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부산까지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완수하고자 하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을 사이에 두고 맞서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형산강 전투, 영천전투, 다부동 전투를 통해 국군과 UN군은 마산-대구-포항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고, 북한군의 전쟁목표를 꺾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지 못했다면 한국 정부는 제주도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다. 낙동강에서의 승리는 방어 전투에서 공격 전투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12. 인천상륙

 맥아더는 미합참과 해군의 반대에 논리적이며 자신감 있게 설득하여 인천으로 상륙작전 지역을 결정하고, 미해병 1사단 등 상륙부대를 편성하여 부산에서 승선시키는 한편 상륙함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양동작전으로 원산만 일대 기만기동, 장사일대 양동상륙이 실시되는 한편 상륙 본대는 서해안을 돌아 인천으로 이동하여 월미도를 향하여 함포가 불을 뿜어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불루비치와 래드비치에 상륙을 시작한 연합군은 인천시내를 소탕하고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일부부대는 수원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하여 남으로 공격하였다. 행주대교 일대에서 도하한 연합군은 서울 서쪽을 향하여 공격하였고 서울남부, 동부 방향 등 세 방향으로 서울을 압박하였다.

 

 

                                            
                                                                       상륙지역을 바라보는 맥아더 장군

 

'생명의 항해 사진전'-야간사격하는 미주리 호

 

 



(서울=연합뉴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는 맥아더 장군(위). 201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을 재현한 모습(아래). 2010.9.15 << 연합뉴스 DB >>

13. 북진

북한군 지휘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인천이나 군산, 진남포, 원산을 상륙 가능지역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상륙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기 전에 반격부대를 투입하는데는 위치선정이 너무 멀었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 상륙부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 지휘부는 가용병력을 서울 서쪽과 남쪽 방향으로 투입하여 초인적인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북한군 전선에 전파되자 낙동강 전선의 적은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될 것이 예상되자 전선 지휘체계가 일시에 마비되면서 각부대는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태백산맥 등 산간 도로를 따라 소부대 단위로 북상 도주가 시작되었고 일부 부대는 지리산 등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군은 낙동강을 넘어 북으로 추격전이 부대별로 경쟁적으로 실시되었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맥아더는 38선 돌파문제를 고심하다가 트루만 대통령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만국경으로 전 연합군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평양을 단숨에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선봉부대인 한국군 6사단이 압록강변에 도달하게 되고 미해병 제1사단은 흥남-원산일대에 상륙하여 장진호를 향하여 깊숙히 진격하고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

 

 

한편 미 본토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  워싱톤은 몰론 전국이 2차대전 후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치 고대 로마시대 제2차 포에니전쟁시 약관의 20대의 로마장수 '스키피오'장군의  로마 원정군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북아프리카 지역 '자마회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전 로마시민이 미치도록  열광하듯이... 

 

그러나 '설치관계'의 한반도의 맹주 중공군이 만주지역에 집결되고 있었고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20만명 이상이 잠입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항공정찰로 만주지역에 집결하는 중공군의 모습만 확인 되었지만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잠입하고 있는 중공군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14. 중공군 개입

연합군의 파죽지세 공격이 중지되고 위력수색만 실시토록 전군에 하달되어 공격을 멈추고 중공군을 찿는데 정보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연합군 후방에 나타난 중공군은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청천강 일대에 나타난 중공군이 포위전술로 연합군의 후방차단이 시도되자 미군과 연합군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신속하게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장비와 무기는 물론 병력도 심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한편 장진호 가까이 '고토리'까지 진격한 미 해병 제1사단은 추위와 싸우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지나면서 많은 장비와 병력 손실을 입고 천신만고 끝에 흥남에 도착하여 피난민과 같이 철수하게 된다.

 

 


'생명의 항해 사진전'-전사자의 시체

 

 

중공군의 공세로 전선은 38도선 까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맥아더 장군'이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후임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하였다. 전선은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게 피탈되고 다시 수복하는 등 38선 일대에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현리전투, 지평리전투, 백마고지 전투, 다솔산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 철의 삼각지에서는 뺐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휴전이 제안되어 판문점에서 지리한 휴전회담이 진행되다가 3여 년 간 진행되던 한국전쟁은 종국을 맞이하게 된다.

 

 

 
'항미원조'를 외치는 중국 시위대의 모습

 

 

항미원조(抗美援朝), 북조선을 도와 미국을 몰아내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한 유엔군과 한국 연합군은 통일에 한발짝 다가선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의 염원은 1950년 10월 13일, 중국군이 개입을 결정하면서 다시 멀어져 갔다.

 

기사본문 이미지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에서 발견된 6.25전 참전인의 사진

유엔군의 참전 이후 김일성에게 중국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단둥(丹東)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에는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6.25전쟁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가 전시돼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10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주앙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이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으며,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군의 다급한 처지가 기록돼 있다.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며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고 적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중국 참전 결정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으며, 중국과 한국의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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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지원군들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중국이 내세우는 6.25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 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 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규모는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이때의 상황을 백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혀 새로운 전쟁’이라고 술회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더라도 중국의 개입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참전이라는 현실을 제때 직시하지 못했다. 이로써 유엔군과 한국 연합국 자유진영은 다시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흥남철수와 1.4후퇴를 맞게 된다.

 

현재 서울 인사동 갤러리 떼에서 진행중인 '전쟁과 일상'전에 전시 된 중국군의 훈장과 상이군인임을 증명하는 수첩은 한국전쟁이 중국에게도 중요한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중공군의 휴대용 밥그릇
중공군의 군용 컵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인주통
중공군 가방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
전쟁 당시 그들이 입은 솜을 넣은 군복, 비상식량이었던 미숫가루를 담은 자루와 순모로 만든 군용담요, 항미원조의 구호가 적힌 법랑과 컵 등 군용물품을 보면 당시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남한에 비해 철저한 준비 끝에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미숫가루와 곡식 등을 넣어 어깨에 차던 중공군의 전투식량 주머니
'항미원조' 기념훈장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상징물품 ⓒ 뉴데일리
중공군의 휴대용 수통

육군교육사령부의 ‘한국전의 기동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 병사는 통상 하루 치 식량을 휴대했고 대대와 연대에서 각각 이틀 치 추가식량을 보유했다. 중공군 전투식량인 초면(炒麵)은 미숫가루와 비슷했다. 미군 보병사단은 식량 등 하루 보급품이 600t인 데 비해 북한은 60t, 중공군은 50t에 불과했다.

 

겨울에는 야전상의를 뒤집어 입고 눈밭을 다니며 폭격을 피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기억에서 흰색 망토 같은 천을 두른 무뚝뚝한 사람들로 남았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을 당시 6·25전쟁에 나선 중공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중공군의 모든 물품에는 ‘항미원조’ 문구가 선명하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로 6·25전쟁에서 전사한 중공군은 18만3108명이다. 미군 전사자 5만4246명과 유엔군 전사자 2143명을 합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다.얼마전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한국전쟁 전문가 상하이대 화동사범대 선즈화 교수의 말을 인용해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소년의 스탈린이 승인하면서 초래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기관지가 6.25를 남침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미군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며 정당성을 주장했던 그들이 남침을 인정하는데 꼬박 60년이 걸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3년 동안 밀고 밀리는 피눈물나는  희생을 치르면서 한반도는 다시 한번 초토화 되었고, 수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휴전이 되었지만 아직도 평화회담이 체결되지 못한채 전쟁 지속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로부터 62년! 눈물과 갈등의 세월을 보내면서 한국은 정치적인 혼란과 혼돈을 거듭하면서 5.16 이후 경이적인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일구었고, 눈부신 성장 결과 세계 10대 무역 강국, IT 최강국, 문화예술 강국으로 발돋음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인고의 고통스런 세월을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삶이 풍요해졌고, 많은 국민들이 비만과 다이어트를 걱정하며 식사량을 줄이는 기이한 세상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화폐개혁 등 경제실패, 핵무기/재래식 무기 등 군사강국을 지향해 오면서 국력의 대부분을  쏟아붓다보니 주민 생활은 극도의 굶주림과 가난으로 탈북자가 줄을 잇게 된 것이다. 그들도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경우와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 북한에서 지금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가난의 평등을 가져온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소련을 위시한 동구 공산권이 무너진 경우를 보고 잘 알면서도 체제붕괴의 두려움 때문에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은 인권 탄압, 학살, 고문, 처형, 배급제 등으로 주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으며 저강도 전력을 대량 양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북한의 인권,  탄압,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실상을 한국의 좌파 부류들은 외면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그들의 능멸전술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무능한 전략.전술로 일관하고 때리면 맞고 터지며 죽어나가도 대량보복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바보같은 평화주의자들이다. 탈북자들의 눈물이 두만강 압록강 물이 되어 동해로 서해로 흘러가고 있는 세월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08년 한국통계정보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묻는 질문에 '북한'이라고 제대로 답한 학생은 59.9%에 불과했다. 특히, 초등학생 35.1%는 "한국이 일으켰다"며 북침설를 주장했다.또한, 2004년 국방부가 실시한 입대장병 의식조사에서는 75%가 반미감정을 드러내며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답한 장병이 36%에 불과했다고 하니, 대한민국체제에 대한 불신과 북한체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6.25전쟁에 대한 이해 미흡과 친북적 인식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우려스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62주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