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461 : 조선의 역사 3 (개요 2)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461 : 조선의 역사 3 (개요 2)

두바퀴인생 2012. 1. 11. 05:13

 

 

 

한국의 역사 461 : 조선의 역사 3 (개요 2)

 

 

 

 

 

중기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특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경제 체제의 해이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우선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결국 모두 세습되어 갔다. 게다가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시켰다. 그들은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여 갔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農莊)의 확대를 가져왔고, 따라서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더구나 이런 농민들의 고통을 이용한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져 있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이이(李珥)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또 환곡 제도에 의하여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에서는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그런데 이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그 제도를 해체시켜 갔다. 초기에 있어서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高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대역(收布代役)의 제(制)가 관행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은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인들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많은 농민들이 유민(流民)이 된 관계로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자가 임꺽정이었다.

 

 

정치 구도의 변화

중종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초반 중종의 왕권은 미약하였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심정 ,홍경주 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왕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당시에는 어좌를 두고 파평 윤씨 일가의 당쟁이 극에 달하였는데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이 세자경원대군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종이 보위에 오른 지 1년 채 안되어 승하를 한 후에 명종이 보위에 오른 후 대윤을 몰아내는 사건인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그에 연루된 인명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후부터 윤원형의 세력이 조정 내에서 활개를 쳤고 문정왕후의 극단정치가 시작됐다. 문정왕후는 당시 수많은 인명들을 사사함으로 인해 큰 질책을 느꼈던 문정왕후로서는 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숭유배불을 중심으로한 유교 사회인 조선 최초로 불교의 승려인 보우판선교 양종사도 대선사라는 정2품 직책에 앉혀 불교 중흥에 힘썼고 도첩제를 실행해 승려를 뽑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때 문정왕후는 수많은 질책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 섭정시대는 1553년에 종결을 내렸으나 이미 정세는 문정왕후의 세력에 기울어 있었고, 문정왕후의 정치간섭이 이루어져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자신의 의사대로 친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비가 죽어 주변에는 모두 소윤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은 신하 앞에서도 임금으로서의 권한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약 12년간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문정왕후도 쇠약해지고 있었다.

 

1565년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정치는 안정을 되찾았고, 윤원형과 정경부인 정난정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함으로서, 명종은 왕권을 펼칠 기회가 왔으나 기울던 조정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다. 또한 명종 스스로도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생을 달리하였다. 이 시기로 인해 조선의 정치 구도가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적으로 사림들의 시각에서 비춰진 관점이므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수용하기는 어렵다.

 

1552년 왕위에 오른 선조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켰으며, 훈구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이 양파의 대립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이 생겼으니 일찍이 이준경(李浚慶)이 붕당의 징후가 보인다고 한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외적의 침입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내부 갈등을 통합해야 할 필요를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시켜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으며,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인조반정).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전란이 계속되고, 붕당이 심해지는 이 시대에도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1597년과 1608년에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동의학을 기준으로 하여, 대부분 의학서를 참고하고 만들었다.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고있다.

 

한편 이와 같이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곁들여, 7년에 걸친 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대대적인 침략·파괴 행위로 그 피해는 막심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렇게 파탄에 직면한 사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병제(兵制)와 세제(稅制)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과세(課稅)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가난에 쪼들리는 백성들을 더욱 못 살게 굴어 농촌사회는 극도로 황폐하게 되었으며 정부에 대한 반항의식을 조장시켰다.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문화대국인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 며 청나라를 혐오하여 강력히 배척한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서거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효종 이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고립화의 길을 걸어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하였다.

 

그에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