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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9 : 조선의 역사 1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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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9 : 조선의 역사 1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두바퀴인생 2012. 1. 9. 04:31

 

 

 

한국의 역사 463 : 조선의 역사 1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근정전

 

자! 이제 조선의 역사를 시작하려 한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1년  정도 안에 달려갈 예정인바, 그 속도는 고공을 날으는 비행기에 버금갈 것이다. 그러나 속도가 빠른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일일이 다 싣지 못하니 이해하시기 바란다.

 

선조들의 피눈물을 옆에서 지켜보며 분노와 절망으로 땅을 치기도 할 것이고 가슴을 쥐어 뜯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였고 삶이였기에 우리는 다시 그들의 고뇌와 삶을 재조명해 볼 것이다.

 

세종대왕 옆에서 그의 지혜로움과 현명함을 배울 것이고, 김종서 장군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여진족을 정벌하고 그의 충절을 되새겨 볼 것이다. 그리고그의 억울한 죽음과 한명회의 간교함을 살펴볼 곳이고 세조의 탐욕과 비정함, 그리고 단종의 눈물과 한을 위로할 것이고 사육신의 충절을 되새겨 볼 것이며 생육신의 삶도 살펴볼 것이다. 성종대의 궁중 암투, 연산군의 한과 눈물, 폭정을 살펴볼 것이고, 중종반정과 선비들의 탐욕, 선조의 무능과 당쟁을 살펴볼 것이고 탄금대에서 신립의 장렬한 최후를 눈여겨 볼 것이다. 그리고 남해바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나 그의 이야기도 듣고 그의 충절을 되새기며 밤을 지샐 것이다. 광해군의 고뇌와 고통도 함께 나눌 것이고 인조의 무능함과 소현세자의 눈물어린 불모생활도 살펴볼 것이며 억울한 죽음의 세자비 강씨와도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효종과는 북벌에 대해서 사실을 알아볼 것이고 영.정조시대의 탕평책과 개혁군주 정조와 이야기도 나눌 것이다.숙종의 환국정치를 살펴보고 안동 김씨의 부상과 세도정치를 알아볼 것이다. 북방 눈바람 휘날리는 국경에서 홍경래의 웅비를 느끼게 될 것이며 장길산 만나 그의 한을 살펴보기도할 것이고 그와 같이 산 속에서 밤을 지샐 것이다. 임꺽정과 한탄강 가에서 시대를 논하고 홍길동과 같이 재상집을 드나들 것이다.

 

또 궁중 속에서 벌어지고 있던 암투와 질투, 독살을 사주하는 후궁, 궁녀, 환관, 나인, 간신배들을 옆에서 지켜볼 것이고 무능한 왕으로 갈아치우려고 반정을 모의하는 선비들의 탐욕도 살펴볼 것이다. 민초들을 수탈하던 탐관을 만날 것이고 18년 간 유배지에서 글을 쓰던 정약용도 만날 것이다. 동학봉기를 일으킨 교주와 민초들도 만날 것이고 철종과 같이 강화도에서 머슴살이도 해볼 것이다. 이하응 만나 그의 개혁의지와 쇄국정책, 민비와 치열한 권력싸움도 살펴볼 것이다. 조정과 탐관들의 비리와 부패를 살펴볼 것이고 일제의 음흉한 마음도 읽을 것이고 안동 김씨들의 부패한 삶도 살펴볼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고려말 상황을 살펴보고 최영을 만나 그의 마음애 대한 이야기 들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고려 최영과 이성계의 반정(쿠테타, 위화도 회군) 

      

고려는 인종 당시 외척 이자겸에 의해 왕권이 빼앗기고 고려 왕씨 왕조가 멸망할 지경까지 갔지만 운 좋게 다시 살아났다. 또 묘청의 난으로 김부식의 토벌군이 패배하였다면 묘청이라는 스님이 권력을 잡고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이자겸이 고려 왕실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씨 나라를 세웠다면 그 나라도 부패하고 탐욕스럽던  이자겸이나 그의 자식들의 성향으로 보아 오래가지는 못햇을 것이다. 또 무신들이 집권하였을 때 고려 왕실을 멸망시키고 정중부,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중 누군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치더라도 정치력이나 가문, 가족들의 성향으로 보아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몽고에 항복하고 부마국이 되면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던 상태이며 다행히 명나라가 일어나는 바람에 운 좋게 국체를 보존하며 반몽친명 정책을 추구하며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공민왕의 정신적인 타락으로 환관에게 살해를 당하는 바람에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우왕과 창왕의 능력으로는 이미 수명이 다하고 쓰러져 가고 있었던 고려라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단지 최영이라는 한 무장에 의해 겨우 버티고 있던 중 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이 결국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를 상대하여 요동을 칠 명분이 약했던 이성계는 4대불가론을 내세우며 출병을 반대하였으나 최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출병하게 된다. 어쩌면 최영이 자만심에 빠져 큰나큰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이성계의 회군이 유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총사령관격인 최영이 우왕과 후방에서 전선을 지휘하려했다는 점도 문제였거니 주력부대인 좌.우군을 출병을 반대하던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안겨 무리한 출병을 서두른 점도 실수였던 것이었다. 이성계의 설득으로 회군에 동조한 조민수는 기회주의자로 판단되며 그는 이성계에게 결국 이용만 당한 꼴이 되고 말았고 그가 숙청되자 결국 모든 권력은 이성계 쪽으로 넘어가면서 고려가 멸망당하고 조선이 창업되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 '시이저'가 군대를 해체하고 단신 개인자격으로 국경을 넘게 되어 있던 규정을 어기고 그의 군대를 데리고 루비콘 강을 건널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계가 회군을 결심하였을 때는 이미 목숨을 걸고 쿠테타를 결심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반정, 반역이며 실패시에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과 측근들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회군을 결심하였는가?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 속성을 들어다보면 저절로 답은 나올 것이다. 

 

 

 

위화도회군은 과연 정당했던가?

 

우리는 여기서 쿠테타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쿠테타임에도 불구하고 왜 위화도회군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그것은 조선이 그들의 쿠테타에 대하여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변형된 용어선택일 뿐이다. 이성계는 고려 왕실 입장에서 분명 반역자였고 역도였으며 고려 정권을 뒤엎은 역신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성계의 쿠테타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가? 아니면 정당성이 있는가? 정당성이 없다면 이씨 조선도 마찬가지로 정당성이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계의 회군을 정당성이 없다고 강변하지 못하고 그가 세운 이씨 조선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조선을 세우고 유교를 통치사상으로 정하고 충효를 덕목으로 삼고 선비들의 나라를 세웠다. 뿌리가 역신인데 그들  선비들을 과연 충신이 될 수 있는지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역신이 세운 나라였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성계 일파들이 고려를 뒤엎고 세운 조선이라는 그들 역신들이 세운 나라에서 살아왔고 또 후손들이 태어났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던 땅에서 역사를 부정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역사로 인정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정의와 불의가 반복되는 정반합의 원리처럼 원죄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5.16혁명과 12.12 군사쿠테타를 부정할 수 있을까? 부정한다면 박정희도 역신이고 전두환도 역신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역사를 장식하였고 패자들은 그것을 비난하며 악으로 규정하지만 단지 패자들의 항변일 뿐이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며 승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그들에게 유리하게 역사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패자쪽에 줄을 잘못 선 사람들은 반역자로 전락하여 이슬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래서 힘이 지배하는 인간사회는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말로는 부르짓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도덕과 비윤리와 타협하며 자신의 권력추구와 출세를 위해서는 도덕성과 윤리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말로는 대의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입신출세를 지향하는 이중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반정이나 반역, 쿠테타를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함부로 규정하기에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우리들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면서 동화되어 살아왔다는 점이다.

 

 

 

권력과 재물, 고인물은 세월이 지나면 썩기 마련  

 

이성계는 정권을 잡자 고려 왕족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왕족들 모두를 배에 태워가다가 강화도 앞바다에 모두 수장시켜 버렸다. 이성계 본인이 직접 하지 않고 수하들이 하였다하더라도 그것은 이성계의 승인없이 함부로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살아 남았던 고려 왕족 중 왕씨들은 모두 성을 바꾸고 음지로 사라졌다. 충신들 72명은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일체의 외부출입을 하지않고 두문불출하며 여생을 보냈다. 고려 태조 왕건은 50년 동안 후삼국 시대의 풍진세파를 이겨내며 한반도를 통일한 유일한 군주엿다. 그러나 그도 마진국의 궁예를 몰아내고 쿠테타로 나라를 빼앗은 역신 출신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정복과 역신들이 세운 나라가 반복되어 창업되고 사라지곤 하였던 정반합의 원리처럼 반복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는 불의를 불의라 부르지 못하고 정의를 정의라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사회의 탐욕으로 악순환을 거듭해온 것도 사실이다.

 

 

권력과 재물, 고인물은 세월이 지나면 썩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 사회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재물은 오물과 같으며 지니면 썩어 냄새가 나고 주변이 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한다. 흐르지 못하는 고인물이 썩듯이 인간은 배 속에 내부적으로 항상 썩고 있는 오물이 가득찬 상태이며 음식물을 섭취하고 오물을 내보내듯이 인간 사회도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몸이 썩는 것처럼 썩기 마련이다. 그래서 권력은 한 사람이나 특정 무리가 장기간 오래 장악하다보면 반드시 썩기 마련이기 때문에 끓임없이 순환되어 새로운 인재가 등용되어야만 썩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권력을 잡으면 천추만대 자신의 족벌들이 권세를 누리기를 희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비만한 아들이 드물다는 이야기처럼 후대로 내려갈 수록 족벌세습은 통제불능의 폭군이나 유약하고 무능한 임금이 나타나 나라를 망치기 쉽고, 유능한 인재만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층은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능한 임금이 즉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도전이 주장한 신하들이 왕을 견제하며 조선을 통치해야 한다는 신권이론이다.

 

그래서 조선은 초기 태종, 세조 등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면서 정권을 농단하였다. 그래서 사림들 간에 파벌이 조성되어 주자성리학 이론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냈고 권력을 서로 잡기 위해서 당쟁이 격심해졌고 그런가운데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극심해졌다.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정묘,병자호란은 우유부단한 왕과 말만 앞세우는 유약한 유신권신들이 지배하면서 조정이 무능해졌고, 유학의 허례허식, 사림들의 횡포와 수탈, 각종 국가제도의 부실로 국력 및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외침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당한 것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신라는 스스로 붕괴되어 후삼국시대라는 춘추전국시대를 야기하였고 결국에는 경순왕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쳤다. 당시 신라 조정은 겨우 서라벌 주변만 통제할 수 있는 소호족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삼한을 통일한 고려는 광종대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과거제와 노비안건법으로 사회체제가 혁신되었다. 유교와 불교 등 문치를 내세우며 문화정치가 융성을 하였고 문신우위의 사회가 지속되면서 의종대에는 향락과 타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무신들이 집권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고려는 80년 동안 무신정권 치하에서 신음하다가 후반부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대몽항쟁을 벌이며 항쟁하다가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원종이 몽고에 항복하고 부마국이 되어 다시 100여 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 몽고가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부마국으로 국체를 유지시켜준 것은 30여 년의 긴 항쟁을 통해 고려 민족을 항쟁 정신을 재인식하게 되었고 고려 민족에 대한 일종의 동족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은 내부의 적인 이성계에 의한 쿠테타로 고려 조정이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새운 조선은 1,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자식들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인명이 살륙되었고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기, 세종의 문화창달과 태평성대, 세조의 왕위찬탈로 수많은 충신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왕권 강화기를 거쳐 예종, 성종시대에는 훈구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사림을 대거 등용하면서 문치를 융성시키다가 중종반정으로 폭군 연산군이 실각되자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권우위의 조정으로 교체되었다. 무능한 중종시대를 지나 인종, 명종시대의 격심한 사림들 간에 권력싸움으로 여러 옥사를 거치면서 유능한 인재들이 죽임을 수없이 당하는 등 혼란을 겪다가 선조가 등극하자 사림들이 파벌을 조성하면서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사림들이 분열되고 붕당정치가 격화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고 부산포와 동래에서 잠깐 저항을 하였으나 북상하는 길목에는 조선의 관원들과 군사들이 이미 도망을 가 버리는 바람에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왔고 이일의 어이없는 상주 패주, 신립이 7천 기마대와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전사로 조선군은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선조는 비내리는 날 밤 어가를 타고 북을 향해 몽진하는 대열을 향해 백성들이 돌팔매를 날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양 궁궐은 백성들의 사뭇힌 원한으로 붉게 불타면서 밤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전 강토가 왜눔들의 말굽에 초토화되었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었으며 의주까지 피난을 가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선조는 만주로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던 왕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장 이순신에 의해 해전에서 전승하면서 왜군의 보급로가 막혔고 각지에서 곽재우, 권율 등 의병들이 불꽃처럼 일어나 왜군과 싸움에서 민초들이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명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지리한 휴전회담이 계속되다가 휴전이 이루어지는 듯 하였으나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왜왕 히로부미가 죽은 바람에 7년간의 왜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도 전에 선조는 50대 나이에 10대의 왕비를 맞아들여 영창대군을 낳고 죽자, 광해군이 어렵게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명청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펼치면서 현실정치를 전개하였으나 젊은 대비와 싸움으로 영창대군을 살해하면서 신하들의 반감을 싸게 되어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반정 성공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왕권은 실추되고 권신들에 의해 부정부패가 격심해지면서 제도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수탈은 극에 달하게 된다. 그래서 그 후 조선은 내부적인 부패와 무능으로 끝없는 수난을 겪게된다. 정묘.병자호란시에는 삼전도에서 항복 한 이후 청의 속국이 되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왕족과 3학사,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나라는 토탄에 빠지고 말았다. 청의 간섭과 강압적인 요구에 순응하면서 왕권을 유지하던 인조는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생활에서 돌아오자 청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왕권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서양의 신문물을 익히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의 압력으로 왕좌를 양위해야 할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끼고 갑자기 소현세자가 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기록에는 없으나 멀쩡하던 세자가 죽었다는 것은 독살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자식도 죽이는 것이 권력이다. 소헌세자가 독살되자 세자비 강씨와 세 아들, 그리고 측근 세력들 모두가 죽음과 유배를 가게 되는 비참한 골육상쟁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던 인조가 죽자 이어서 둘째 봉림대군인 효종이 즉위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등 북벌을 계획하고 추진하려하였으나 사림들의 격심한 반대와 방해, 그리고 즉위 10년 만에 어이없는 죽음으로 북벌은 무산되고 말았다. 효종의 어이없는 죽음도 북벌을 반대하던 사림들의 간계로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처럼 자신들의 안락한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문제를 야기할 임금도 죽여버리는 탐욕이 가득한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이미 망했어야 할 나라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이순신이라는 한 충신의 기적같은 23전 23승 해전의 승리와 굴욕적인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건졌고,.병자호란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피를 댓가로 나라를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종시대는 예송 정쟁으로 사림들 간에 지리한 논쟁으로 세월을 다 보내고 이후 숙종이 즉위하면서 환국정치를 펼쳐 왕권을 다소 안정화시켰으나 계속되는 정쟁으로 옥사는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살길이 막막하여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떼가 되었고 장길산이란 신출귀몰한 인물이 이 당시 활동하였다. 비운의 왕 경종이 짧은 치세를 마감하고 죽자 영조가 즉위하여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안정복, 홍대용 등 실학선구자들이 나타나고 서얼계급이 성장하는 등 사회적 변화도 가져왔다. 영조가 오랜 통치끝에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즉위로 문화정치와 실학을 장려하여 박지원, 정약용, 박제가 등이 나타나 실학이 융성하기도 하였고 노비의 신분 상승 운동과 노비정책의 변화도 가져왔다. 그러나 정조의 각종 개혁도 선비들의 반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가 권력 전면에 나서게 되자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 정권이 등장하고 조선의 세도정치를 부정한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았다. 바로 외척들의 준동이 시작되어 능력도 없는 멍청한 헌종, 철종대는 외척들이 무능한 임금을 골라 즉위시켰으며 조선은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60여 년간 계속된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동학의 탄생 등을 가져왔으며 조선은 망국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하응의 치밀한 계산아래 즉위한 수난의 왕 고종이 어린 나이를 기화로 섭정을 하게 된 대원군이 강력한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전권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수탈하던 지방 서원을 철폐하는 등의 개혁정치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대원군과 민비의 처절한 권력싸움이 전개되면서 외세를 끌여들여 조선은 청.일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고 그러는 사이 동학란 등 민란이 계속 발생하면서 진압을 빌미로 진주한 청.일이 전쟁이 벌어지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 청국이 패배하자 일본의 조선 합병은 가속화되었고 결국은 내부의 부패와 권력싸움으로 기력을 상실한 조선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조선은 우리들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겨준 왕조

 

시기와 때를 놓친 조선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고 청나라, 러시아, 일본의 힘의 대결 각축장이 되어 수난을 계속하다가 결국 순종대에 일제에 합병되는 가장 바보스런 왕조가 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수난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백만 인명이 억울하게 이름모를 전장터, 탄광 등지에서 사라져갔고 36년간 지리한 식민통치 아래 정신과 육체, 국토와 문화가 모두 일제에 빼앗기는 치욕스런 세월을 보내야만 했고 해방이 되었지만 미.소에 의해 두동강난 이 땅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처절한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지금까지도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모두가 조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은 우리들에게 오늘까지도 고통받고 살아야 하는 영원히 씻지 못할 천추의 한을 남겨준 나라였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박영규씨는 그의 책 '조선왕조실록' 서두에 조선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평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 사회에 대해 매우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거나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나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는 싶지는 않다. 독자들이 언젠가는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 왕조를 극구 찬양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 세계속에서 여전히 끔틀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미처 그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해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 문명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라고 했다.

 

물론 박영규씨는 역사학자로서 그의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 후손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과 상처를 준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지독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나라로 양반과 선비들만을 위한 나라, 훈구대신들의 권력 세습과 독식, 사림의 등장과 확산 그리고 치열한 당쟁과 부패, 표리부동한 허례허식주의, 수많은 세월을 낭비한 성리학, 왕권의 실추와 외척의 준동과 부패 등으로 신권사회가 가져다준 부패와 탐욕이 결국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씨가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의 글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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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급선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국 중국.왜눔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미국.독일.불란서.러시아.화란 등 얼굴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그리고 색깔도 다른 수많은 외국들이 들어 닥치고, 전에 보지도 못하던 총.육혈포.자명종.천리경.인쇄기 등이 들어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지 그 누구하나 그들의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강변한 사람은 없었다.

 

일이 급해졌다. 이제까지 바다 가운데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의 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을 하여 봉건시대의 막부를 집어치우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 하고,  나라를 열어 세계 모든 열강과 교통을 하면서 우리더러 나라를 열라고 트집을 해온다. 일찌기 이런 세상은 보지를 못하였다. 우리나라 유신들이 보기에는 '사서삼경'에서도 못보던 것이요, '팔만대장경'에서도 못 보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씨고 이씨고 양반이라 자랑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양반이요 상눔이요를 가릴 수도 없다. 노론이요 소론이요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대국 중국이 코쟁이 양눔들에게 꼼짝을 못하고 청국군대가 서양군대에 대패를 하고, 그래서 항구를 조차하고, 땅을 빼았기고 ,배상을 물지않나? 이런 경우는 절대로 본적이 없는 조선은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가 혼돈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때 유신들이 하는 일이란 제것 챙기고 나라 망하기 전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대에 물려주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들 쥐어 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가련한 것은 우리 조선의 선량한 민중들 뿐이라! 이때에 살려거든 우리도 한 민족으로 깨어 말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발달해 가는 새 지식.새 기술을 배워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나갈 결심을 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는 천당.지옥만 찿다가 말았다. 그후 홍경래가 나타나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보려 하였지만 비만 들다가 조선의 더러운 찌꺼기를 쓸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고, 개신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나 민중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라 그만 지쳐 수구려들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래도 행운.시운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 일본이 '페리 제독'의 강권에 못이겨 나라를 열게 된 것은 참 운이 좋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으나 종내 그저 지나가고 말았다. '하멜' 일행이 십수 년을 제주에 있었건만 서양 소개를 못하였고, '병인양요'에 불란서가 물러간 것은 저희 나라 일 때문이건만 이쪽에서는 우리 세력이 세서 됐거니 생각하여 점점 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동강에 '셔먼 호'가 들어온즉 때아닌 홍수에 속아 불타 실패하게 되고, 일이 모두 이런 식이어서 기회는 다시오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도 '페리' 같은 강한 함대가 몰려와서 조선 양반눔들 간담을 쓸어내려 왜 강제로라도 열게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막

그때 우리나라 꼴은 무엇보다 전주 이씨 집안에 잘 나타나 있다. 하필이면 대원군이요, 민비인가? 이것이 다 마지막 망국극을 하기 위해 준비된 마지막을 선택된 배우들이었다. 당파 싸움을 하다 하다, 외척이 전권 세도를 하다 하다, 끝마무름이 그 궁중의 싸움이었다.  흥선은 영악한 왕족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천하가 계속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미친척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철종이 후사가 없으니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다 계산된 임금 만들기를 예견하고 죽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거지처럼,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친척 숨죽이고 있다가 철종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자 왕족의 혈육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 열두 살짜리 고종으로 등극하고, 그리고 섭정을 보게 된 그 아버지 흥선군은  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이었지, 그 운명이 그 아이의 손에 잡혀 있던 연줄처럼 끓어져 나갈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어린 임금의 왕후를 구하는데 고르고 골라 외척들이 말썽이 없을 만한 민씨집 딸을 대려올 때, 그것이 다음날 자기와 세력을 겨루다 집안 망치고 나라를 망칠 싸움의 적수인 민비가 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을 것이다.

 


'마지막황실 대한제국과 덕수궁' 사진전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위로는 임금과 왕후를 포함하여 모든 당상관들은 매관매직에 정신이 없고, 평양감사 자리는 민씨네 집안이 독식하고, 지방의 모든 관리는 부패와 무능이, 매관매직으로 본전 뽑기에 백성 수탈이 판을 치고 백성들은 굶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랑민이 되어 도적떼가 되거나 낭인신세가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장터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거지신세가 된지 이미 오래고, 지방곳곳의 향교는 유신들이 진을 치고 백성들을 대려다가 곤장을 치고 관리를 협박하고 향교에 몰려 앉아 양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수구파요 개화파요,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 하는 파들을 갈라 배치되어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모양이 늙은 창녀촌 갈보와 같다 아니 할 수 있으랴!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 하자는 생각은 없고 오늘 이눔에게, 내일은 저눔에게 빌붙어 가랑이 벌리고 그때 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고 돈푼께나 받고 군것질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눔에게도 사랑을 잃고 저눔에게도 미움을 사 몹쓸 병이 들어 자식 하나 없이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창녀처럼 한 몸이 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먼저 깬 사람들이 갑신정변.갑오경장 하는 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싸움의 결과 대원군은 중국에 붙들려 가고, 민비는 일본눔들 손에 죽고, 임금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아들이 대신 들어섰다가 그나마도 오래 못가고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 버렸다.

 

이 민족의 부끄럼이 이제는 끝에 간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욕을 먹었는지 모르고, 신라때는 매 맞았는지 모르고, 고려 때에는 넘어졌는지 모르나, 이번에는 아주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고구려에는 발해가 있고, 신라에는 마의태자.궁예가 있고, 고려에는 최도통.정포은이 있었으나 이조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들 뿐이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민충정'이 서울에서 푸른 대를 올렸으나, 그것으로 가리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나 컸다.

 

신라가 당나라에 수구렸다 하나 그래도 반도의 땅을 찿는데 힘을 쏟았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였으나 나라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아주 없어지고 남의 한 개 식민지가 되어버렸으니, 5천년 역사에 먼저간 조상들이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한 모습이었을까! 수많은 영웅과 충절을 지키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7년 전공 23전 23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항몽.항청을 통해 수많은 애국 충신들은 무어라 통곡하였을까? 5천년 역사에 나라 팔아먹는 일,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일본은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바다를 건너가 구주지방에 정착한 민족의 물결이었다. 그들의 신화가 말해주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한자와 유교.불교를 전해주었고 대륙의 모든 문물이 우리들이 전해 주었고 그래서 임나도 나온 말이요 왜구도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그렇게도 반도 해안을 들락거리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아온 집나간 자식같은 말성꾸러기 일본이었다.

 

우리가 고구려 이래 전래된 용맹한 기상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힘과 제도를 정비한 힘찬 주권을 가지고 만주를 뒷마당 근거지로 북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고 일본 열도를 앞 방파제로 삼아 대국경영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친일.친로.친청 하며 몇십 년을 국제 매음을 하다가 우리가 길러내고 업신 여기던 섬나라 일본한테 나라를 몽땅 빼았겼으니, 이것은 마치 행랑체 머슴한테 그집 주인 아내 주부가 정조를 주고 집문서 내주면서 서방눔은 독살하고 그 머슴눔의 바지가랑이 밑에서 힘찬 밤일 즐기기를 좋아하는 창녀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빠졌다. 3.1운동의 물결이 일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민족의 의식은 실날같이 꺼져가는 촟불같은 신세로 빠져 들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과 처자들이 전선으로 끌러가서 천황눔의 총알받이가 되고, 정신대가 되어 이팔청춘 다 썩히어 썩은 몸이 되었고, 온 반도는 먹는것 입는 것 지하지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탈의 극을 달했다. 몽고도,중국도, 만주족도 그토록 이 땅에서 고혈을 빨아가지는 않았다. 씨를 말리고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일본눔들 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36년간의 길고긴 암흑의 시대.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흡혈귀처럼 빨려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빨릴 피마져도 남은 게 없는 앙상한 여윈 몰골로 휘청이는 민족, 그것이 피맛이냐 ? 물맛이냐? 고통이 온 반도에 뼈저리도록 사무치게 휘몰아 쳤고, 민족은 짐을 싸서 만주로 간도로 사할린으로 고향을 떠났다.

 


창덕궁 마지막 단풍

 

이것으로 우리 고난의 역사 대충 보기는 끝났다. 돌아보면, 아, 아, 삼국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왔고 발길에 채어왔다. 그리고 5백 년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더 심한 연옥의 바닥으로 거꾸러져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러나 그보다도 날이 장차 오면 이것이 다 뜻이 있는 한 구절이 될 줄 믿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