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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2 : 조선의 역사 4 (개요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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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2 : 조선의 역사 4 (개요 3)

두바퀴인생 2012. 1. 12. 03:49

 

 

 

한국의 역사 462 : 조선의 역사 4 (개요 3)

 

 

 

후기

 

붕당 정치의 변질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禮訟)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이 정체(政體)문제와 관련을 가지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예(禮)의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붕당정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예송은 효종인선왕후의 국상(國喪)에서 자의왕대비의 복제(服制)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차자로서 왕통을 이은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1659년(현종 원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숙종 원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되었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않는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 때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여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탕평 정치의 전개

영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당파 싸움에 영조는 넌더리를 낸 나머지 조정을 어지럽히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탕평이란 정치를 할 때 편과 당을 좇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이고 신념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후 탕평책은 영조 때 정국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이 되었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주요 조치를 살펴보면 대신 한 사람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이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임금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세도 정치의 전개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일시적으로 암흑기를 가졌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갔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몰락한 양반홍경래의 지도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조선 후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후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음력 9월 20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서, 쇄국정책을 써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개화 후의 영친왕(가운데)과 내각대신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음력 10월 11일 과 국교를 열었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청-일-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수 없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명성황후의 진영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청나라가 간섭하지 못하게 막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막고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서 조선이란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