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가을 32 : 안보강국의 길을 묻다 2
불탄 집도 포탄 구멍도 고스란히…돌아온 주민들 불면증·불안 호소
“두차례 연평해전 겪고도 무방비…이런 軍 어딨나” 무능력에 격분
“잠시 충격… 이젠 뇌리에서 사라져”…‘국민 안보 불감증’ 개탄 한목소리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지난 19일 방문한 연평도는 전화(戰禍)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파출소 뒷면엔 폭발에 의한 화염과 파편 흔적이 선명했다. 마을 종합운동장 벽면에 박혔던 지름 1m의 포탄 구멍도 그대로였다. 800여 가구가 사는 마을 군데군데 불탄 가옥과 무너진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다. 마을뿐이 아니다. 연평도 섬 전체에 전쟁의 상처가 깊이 새겨져 있다. 포격 직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이 보도돼 국민에게 충격을 줬던 연평도 산불 현장은 이제 민둥산이 됐다. 불타고 그을린 나무들을 베어냈기 때문이다. 계곡 깊이 자리 잡은 군부대가 훤히 드러났다. 울창한 숲에 가려 있을 땐 완벽하게 은폐됐겠지만, 이제는 초소와 건물 등 주요 위치가 노출돼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주민이 편할 리 없다. 아직도 불면증과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이가 많다. 노년층과 어린이들이 심각하다. 헬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 바람에 문이 닫히는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마을 공공 확성기가 ‘딸깍’ 하고 켜지면 “또 무슨 일이 터졌나” 하고 걱정부터 앞선다는 것이다. 이날 임시 보건소를 찾은 한 교사는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전쟁이 벌어져 북한군이 우리를 데려가는 꿈도 꿨다”고 말했다.
연평도 종합운동장 벽면에 지난해 11월23일 북한의 포격 도발 당시 포탄을 맞아 생긴 지름 1m의 구멍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벽면 피탄 자국 뒤로 운동장 국기게양대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연평도=안석호 기자 |
계속되는 불안과 긴장 속에 섬을 떠난 주민들은 귀가를 망설인다. 연평 면사무소 관계자에 따르면 주민 1800여명 가운데 1200명만 섬으로 돌아왔다. 언제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이 두렵고, 부서진 채 방치된 이웃집 모습이 보기 싫기 때문이다. 정부는 뚜렷한 대책도 없이 주민들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주민들은 “인천에 피난해 있을 때 우리를 방문한 정치인들이 ‘언제 다시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안전대책도 마련하지 않고는 ‘우리 땅이니 돌아가야 한다’고 해 총알받이가 된 느낌이었다”며 분개했다.
연평도 주민 사이에선 군의 무능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포격 도발 당시 불과 12㎞ 떨어진 북한 땅에선 해안포 수십문이 우리를 겨눴는데 우리측 대응전력은 K-9 자주포 6문이 전부였다. 그나마 3문은 제대로 포탄을 날리지도 못했다. 북한군은 민간인에게까지 무차별 폭격을 가했지만, 우리 군은 교전수칙에 얽매였다. 공격 후 4분 만에 출격했다던 F-15K 전투기에는 북한 해안포기지를 공격할 공대지 미사일이 없었던 게 드러났다.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이유성(84)씨는 “두 차례 연평해전을 겪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군에 화가 난다”며 “이딴 놈의 군대가 세상에 어딨느냐”고 격분했다.
반면에 북한의 전비는 생각보다 탄탄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래됐다고 얕잡아본 북한의 해안 장사정포는 위력적이었다. 주민들은 북한이 군부대와 파출소, 보건소, 한전, 수협 등 요지마다 포격을 가한 것을 보고 놀랐다. 오랜 기간 정보를 축적하고 실전 연습한 흔적이 역력했다. 일부 주민은 자신들 가운데 간첩이 섞여 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고 입을 모았다.
연평도 포격 도발은 우리 국민의 안보불감증이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주민 이기옥(51)씨는 “1·2차 연평해전이 바로 앞바다에서 벌어졌는데, 남의 동네 싸움 구경하듯이 했던 게 사실”이라면서 “북한이 우리에게 이렇게 포를 쏘아댈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밝혔다.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에도 국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의 도발이 국민에게 잠시 충격을 줬을 뿐 금세 잊혀졌다는 지적이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모(58)씨는 “연평도 마을과 산이 이렇게 불타고 파괴됐는데 우리 국민은 너무나 빨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면서 “서울 용산에 포탄이 떨어졌더라도 이랬겠느냐. 연평 주민의 상처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온 국민이 마음을 다잡고 안보태세를 강화해 제2의 연평도 사건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 안보체제 전반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연평도가 지역구인 박상은 국회의원(한나라당)은 20일 기자와 만나 “연평도 포격 도발의 가장 큰 교훈은 평화가 얼마나 귀하게 얻어지느냐 하는 것”이라면서 “지난 수년간 우리 국민은 안보착시에 빠져 있었다. 연평도를 계기로 군은 강력한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국민은 정신자세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윤길 옹진군수도 “연평도 피격 현장 일대를 안보공원으로 조성해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떤 나라도 외부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대응과 사후조치다. 2001년 9월11일 세계 최강국 미국은 일개 테러집단의 공격을 받고 휘청거렸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스라엘은 극단 이슬람주의자의 테러 기도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지만 단 한 발의 로켓 공격에도 대대적으로 보복한다.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들을 에워싼 3억 아랍인을 대적하는 700만 이스라엘 국민의 생존법이다. 대한민국도 이제 안보문제에선 보다 단호해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불에 탄 연평도 뒷산이 다시 푸른 숲이 되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만큼 시간이 흘러야 주민도, 군부대도 포격의 상처가 아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의 적은 너무나 가깝고 상상 이상으로 대담하다. 서둘러 안보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연평도 포격 도발의 교훈이 더 이상 공허한 메아리로 그쳐서는 안 된다.
연평도=안석호 기자
6·25때 피란 나와 정착한 박연수 할아버지 ‘쓴소리’
“두번씩 전쟁 겪게 하다니 대한민국은 더 강해져야”
2010년 11월23일 연평도 포격 도발은 대한민국 안보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북한은 작심하고 우리 군과 민간에 포격을 가했다. 민간인 2명과 군인 2명이 숨지고 60명이 다쳤다. 주택과 상가 등 건물 46동이 전파됐다. 연평도에는 피란민촌이 들어섰고, 주민은 지금도 불안감을 호소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해 천안함 폭침에 이은 연평도 포격도발은 대한민국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했다. 느슨한 안보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안보강국의 기치를 내걸 때다. 연중 기획시리즈 ‘안보강국의 길을 묻다’를 시작하는 이유다. 안보강국으로 향한 길을 찾는 격주의 여정에 들어간다.
무너진 삶터에 한숨만… 6·25전쟁 당시 북한 황해도 옹진군에서 연평도로 피란온 박연수 할아버지가 지난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무너진 집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바로 옆 자리에 포탄이 떨어져 55년간 살아온 정든 집이 박살났다. |
해 질 녘 연평도. 82세 박연수 할아버지가 다 쓰러져가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널브러진 시멘트 블록과 녹슨 골조 틈새에 혹시 남아 있을 가족의 흔적을 찾는 중이었다. 연평도 포격 도발 때 앞마당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할아버지 집이 부서졌다. 지붕이 날아가고 담벼락이 무너졌다. 당시 박 할아버지는 이웃집에 있어서 화를 면했다. 할아버지는 혼자 살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와 몇 해 전 사별했고 자식들은 모두 인천과 김포 등 객지에 산다. 지축을 흔드는 포탄 소리에 황급히 대피소로 피신하고 왔더니 집이 이렇게 돼 있었다. 망연자실했다. 55년 동안 살아온 정든 집이었다.
박 할아버지는 6·25 전란을 피해 아내, 딸과 함께 연평도로 피란왔다. 이 집에서 자식 넷을 더 낳고 길렀다. 낡은 집은 할아버지의 삶이요, 역사였다. 그런데 모든 게 무너졌다. 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도, 자식들과의 사랑스러운 기억도 남김없이 날아갔다. 북한 황해도 옹진군 개머리 해안포 진지에서 날아온 170발의 포탄 때문이었다. 황해도 옹진은 그의 고향이다. “내가 6·25를 피해 내려왔는데 지난번 포격으로 전쟁을 또 겪었어. 내 평생에 전쟁을 두 번이나 치렀네.” 연평도 포격은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6·25전쟁이었다.
할아버지는 두 번이나 전쟁을 ‘겪게 한’ 대한민국 정부와 군에 불만이 가득하다. “우리 군대가 잘못 대비했으니까 이렇게 두들겨 맞았지. 이 동네 사람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매일매일이 불안하거든. 군대가 더 든든하게 해서 북한이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게 해야 해. 우리야 죽을 날이 가까웠으니 상관없지만 후손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은 더 강해져야 해.”
나라를 향해 한바탕 쓴소리를 내뱉은 할아버지는 다시 시멘트 조각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뒤적인다고 이제 더 나올 것도 없지만 쉽게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모양이다.
연평도=안석호 기자
예방접종 받았던 분 끝내 주검으로”
4월20일. 북한의 포격 도발이 벌어진 지 5개월 만에 연평도를 떠나는 배에 올랐다. 공중보건의로서 1년간의 도서지방 근무가 끝나고 내륙으로 발령이 났다. 연평도는 아름다운 곳이고 사람들도 좋았다. 하지만 북한의 포격은 좋은 기억을 모두 날려버렸다. 북한은 변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이제 연평도를 빨리 떠났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지난해 11월23일 오후 2시36분. 보건소에서 진료를 하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곳곳에서 불이 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이어 주민 2명이 보건소로 뛰어들어왔다. 한 명은 포탄 파편에 이마가 찢어졌고, 다른 사람은 고막을 다쳤다. 응급 치료를 해준 뒤 보건소 2층 숙소에 있던 아내를 불러 대피소로 피했다.
쾅! 쾅!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들렸다. 어딘가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임신 6개월인 아내 머리 위로 흙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열흘 전 아내를 불러들인 게 후회됐다. 공기 좋은 연평도에서 쉬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오히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을 고비만 겪게 만들었다. 포탄은 비 오듯 날아들었고 대피소 주민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난생 처음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전쟁이 터지는구나.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말없이 울고 있었다. 미안했다. 수시로 아내의 배를 만지며 태아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기는 잘 노는 것 같았다.
두 차례의 맹렬한 포격 뒤 포성이 멈췄다. 나는 다시 보건소로 돌아가야 했다. 보건소 바로 뒤에 어진 포탄에 건물 뒷면이 반파됐다. 보건소 위쪽에서 불까지 나 더 이상 보건소에선 진료할 수 없었다. 직원들과 함께 필수 의약품과 의료도구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을 다니며 부상자를 돌봤다. 포격에 의한 열상과 찰과상이 대부분이었다. 마취도 못하고 상처를 꿰매기도 했다. 크게 다친 군인과 주민은 인천의 병원과 국군수도병원 등으로 후송됐다.
오후 10시쯤 마을과 뒷산의 화재는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추운 대피소에 두고 온 아내와 아기가 걱정됐다. 그렇게 포격 후 첫날밤이 지나갔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군부대 공사현장에서 숨진 민간인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경찰서장과 동행해 시신을 수습했다. 한 명은 얼마 전 예방 접종을 하러 왔던 아는 분이었다. 다른 한 구의 시체는 너무 처참하게 훼손됐다. 마음이 아팠다.
포격 후 보름이 지난 뒤 인천에 대피한 연평도 주민들을 방문해 진료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일반인 사이에선 ‘연평도 포격이 언제 있었나’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놀랍게도 북한의 도발은 2주 만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연평도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북한의 포화 속에 지켜낸 딸 효민이가 별 탈 없이 태어나준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연평도=안석호 기자
※이 기사는 연평도 포격 당시 끝까지 섬을 떠나지 않고 주민을 치료한 이상협(비뇨기과·33·사진) 보건지소장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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