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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11 : 6월,호국보훈을 생각하며...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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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11 : 6월,호국보훈을 생각하며...7

두바퀴인생 2011. 6. 11. 04:39

 

 

 

우면산의 여름 11 : 6월,호국보훈을 생각하며...7

 

 

                                                                           서초카페 거리에 있는 수초  

 

장마는 다음 주말에나 올 모양이다. 공터에 심은 상치와 호박이 잘 자라 자연의 고마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제는 단골집 아줌마가 뽕잎을 시골에서 가져와 약간 주었다. 깡된장 찌게를 만들어 뽕잎.호박잎과 같이 익혀 삼을 싸 먹었다. 아줌마 말에 의하면 금년에 시골에는 병충해로 뽕나무에 오디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쉼터에서 쉬면서 길가에 핀 장미를 유심히 보아도 벌이 보이지 않는다. 바이러스로 토종벌이 대부분 죽었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보통 때면 꽃이 피면 벌을 포함하여 나비까지 많이 달려들던데... 아마 장미도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다. 미혼 여성이 시집을 가지 못해 혼자 자식없이 늙어가는 것처럼......공해와 병충해로 자연이나 인간 사회나 생식기능과 번식에 큰 혼란이 초래되는 게 아닐까? 기형아를 출산하고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을 기피하며 읍주와 흡연, 농약에 찌들은 음식, 바이러스 투성이 환경, 오염된 물과 공기, 신종 병원체의 확산 등으로 인류의 멸종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서울 거리는 점점 불꽃이 피고 있다. 반값 등록금 집회는 분산, 집결, 방향을 전환하면서 거리집회를 하는 등 게릴라식으로 진행하면서 경찰을 힘들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등록금 시위에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 학부모, 재야 세력, 야당 정치인, 반정부 세력 등 순수와 불순이 같이 참여하여 지난 광우병 쇠고기 촟불집회를 재현하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는 듯하다. 6월 만세 사건, 민주화 항쟁을 들먹이며 좌파 신문 기고, 논설위원, 기자들이  연일 집회의 확산을 바라며 충동질을 부추기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가 국민 복지가 최대의 목표인지는 몰라도 포플리즘에 영합하여 과잉 복지를 추구하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재정 위기에 봉착하여 파산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나라가 망하면 복지고 행복이고 모두 물건너 간다는 점이다. 문제는 정치권과 대학이다. 헛공약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한 점이나 대학들의 도덕성이다. 사립대가 대부분인 우리 나라 대학들이 재단의 비리와 독식, 교수 연봉이 억대를 넘고 예치금이 수천, 수조억원에 달하면서도 등록금은 물가 상승율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매년 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대학 졸업시키는데 한 학기 500만원에서 1,000만원을 상회한다고 한다. 4년이면 8,000만원에서 1억을 넘는다. 그것도 휴학과 졸업을 연기하며 취업 준비로 6~7년을 대학에 안주하는 요즘의 대학생들의 실태에서 부모들의 허리는 등골이 휜다. 촟불집회는 가장 약자인 서민들의 피땀을 훌쳐가는 권력과 가진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항거일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가진자들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집회나 데모를 통해서만 추구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신문, 인터넷, 블로그, 카페, 방송 할 것 없이 거짓과 기만이 넘쳐난다. 홍보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고, 문구를 이상하게 호기심이 유발되도록 제목을 만들고, 방송이라는 화면은 위선과 거짓으로 과장된 모습으로 연일 도배를 하고 있다. 가입만 하면 모든 것에 엄청난 금액으로 보상해줄 것 같이 종일 방영되는 보험상품 광고, 효심을 자극하며 노인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가입을 유도하는 상조업체 광고, 못난 얼굴을 미인으로 둔갑시켜줄 것 같은 화장품 광고, 각종 보석, 각종 옷가지, 가방 등등...

 

맛집이 맛이 잇어서가 아니라 돈주고 방송이나 기사를 내는 짜고치는 광고와 상술, 길거리에서 만난 연예인인 것처럼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자작극 광고, 미모, 체형, 성기능을 극대화시켜 준다는 거짓 광고, 이처럼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거짓 광고에 시달리며 그 말에 현혹되고 속아넘어가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바보같이 만족해하는 모양이다.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속아 전재산을 헌금하고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학까지 졸업했고 중년 나이가 될 때까지 인생 경험도 많고 사회 경험도 다양하니 말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머리속에 들어 있는 개인의 지식이나 앎은 컴퓨터의 1바이트도 안되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박사는 그 분야에서 박사이지 다른 분야의 박사는 아니다. 두루 해박한 지식을 포괄하여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미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에게 속고 광고에 속고, 사기꾼에 속고, 다단계에 속고, 사이비 종교에 속고, 교인말에 속고, 중의 말에 속고, 신부 말에 속으며 점쟁이 말에 속는 것이다. 점집을 찿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안개처럼 모호하여 판단력이 없고,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는 혜안은 많은 책과 경험을 통해서만 축적이 가능하며 그것은 바로 종합적인 판단력이다. 그것은 개인이나 지도자, 단체, 기업은 물론 특히 전쟁터에서 군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군인이 전쟁에서 종합적인 판단력이 필요한 것은 한 분야만 보는 좁은 안목은 전체를 그르치기 쉽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 패배를 초래한다.

 

한국전쟁시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 이미 전쟁 초기부터 구상하였던 인천 상륙 작전을 미 합참의 극렬한 반대에고 불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실시한 결과 작전은 성공하여 한국 전쟁의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다. 미 합참은 최대 9미터가 넘는 인천의 조수 간만의 차, 좁은 수로, 수많은 수중 장애물, 상륙지역의 협소, 적의 저항 등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참모들로 하여금 사전 충분한 정보를 판단케 하였는데, 조류와 지형, 날씨, 시기를 고려하여 가능성을 판단토록 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의 가장 결정적인 점은 수도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에 주력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민군의 주력을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의 결단은 정확했고 미래를 보는 예측력이 매우 뛰어났던 장군이었다. 남들은 물론 참모들 중에서도 불가능하다고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는 가능성을 찿았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그의 인기는 트루만을 능가하는 상태였고 트루만은 그것이 매우 불편편하였던 것이다. 웨이크 섬에서 만난 맥아더는 먼저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트루만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인  한국 전쟁의 목표는 적의 격멸은 북한의 지휘부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한반도 통일이라고 했다. 공산군이 더 힘이 커지기 전에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주 폭격을 주장했고 필요시 핵폭탄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트루만은 3차 세계대전을 염려하여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트루만은 두 사람의 견해차가 큰 것을 알고 돌아와서 고심끝에 그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우둔한 정치 지도자와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었던 전쟁 영웅과의 차이점이다. 그것은 고대 사치와 항략에 빠져 무능하던 지중해 강대국 카르타고 조정과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 장군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조선의 눈물은 계속된다.

 

 

15. 맥아더와 트루만 갈등

당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돌파하여 북진하는 문제를 맥아더 장군은 고민하고 있었다.중공군의 개입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강력하게 북진을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만일에는 중국과 전쟁도 감수해야 한다.그리고 어쩌면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과도 동시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생각하고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의 한 섬에서 만나 상의하게 된다.

 

트루만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소련과 동시전쟁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계 3차대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련.중국 등 전 공산권이 대동단결하고  미국을 위시한 전 민주주의 국가들이 또다시 세계 3차대전의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야 한다? 아니지... 미국과도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조그만한 반도 한국, 그기에다 미개한 반쪽나라 신생국 한국을 위해서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치루기에는 명분이 약했고 실익도 별로 였다. 그리고 세계 3차대전을 치루게 될 지 모르는 대 재앙을 초래할 빌미를 미국이 제공한다는 자체가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자신이 책임지기에는 역사의 지탄을 받기는 싫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대로 만주를 폭격하고 중공군의 전쟁개입을 차단하고 중국이 별다른 항의나 반격없이 그리고 소련의 전쟁개입도, 공산권의 대동단결과 대미국 전쟁불사도 없이 한반도를 미군과 연합군이 무력으로 통일시킨다면 맥아더의 인기와 갈채는 대통령인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대로 한반도는 북한의 침략만 물리치고 38도선에서 현상유지가 더이상 아무런 손실없이 일본을 지키는 완충지대로 한국의 역활만 생각하면 되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과를 최대한 확대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군인은 군사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구상한다.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공군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을 폭격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민에게 강대국에 의해서 반쪽이 된 반쪽나라가 아닌 북쪽의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완전한 한나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민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며 공산진영의 교두보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함부로 쉽게 미국과 대항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원폭사용도 불사한다. 완전한 승리! 그것만이 전쟁을 지휘하는 군사지도자가 바라는 최종목표이다. 어정쩡한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자신은 휴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한번 시작한 전쟁은 적 군사력의 완벽한 괴멸과 지휘부의 완전한 소탕이다. 그래야만 두번 다시 이민족에 불행을 막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태평양 외딴섬에서 맥아더 장군과 만나 서로의 생각과 견해를 나눈 결과 엄청난 차이가 있슴을 확인하게 되고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야 하겠다는 결심하게 된다. 

 

 

맥아더와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서옹진반도에서 동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트루먼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받은 일본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대만·필리핀·인도차이나 등의 방위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다. 27일에는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견과 42개국의 지원을 결정했다. 때마침 소련대표는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중공이 들어와야 한다고 총회에 계속 불참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부권은 행사되지 못했다. 29일 맥아더 장군은 수원비행장에 내렸다. 60년 전의 일이다. 맥아더도 수원시민도 잊지 못할 날일지 모른다. 맥아더는 군용 지프차를 타고 선글라스와 파이프를 물고 한강으로 향했다.

 

패잔병과 피난민이 남하하는 모습을 보며 한강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해 1월 26일 70회 생일을 맞이한 노병이었다.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아시아의 방위선에 38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한 것은 그보다 2주 전이었다. 이 발언으로 한국전쟁은 미국의 유도전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 뒤의 자료에서 미국은 49년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 정부와의 외교관계를 위해 방위선을 남하시켰다는 점이 해명되기도 한 것이다.

 

어쨌든 이 발언으로 오판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작품이 6·25침략이었다. 이 논쟁은 스탈린이 몸통이고 김일성이 깃털이라는 것이 필자의 평가다. 맥아더는 7월 31일 대만을 방문한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의 대만중립화정책을 변경시켜 장개석 군대의 유엔군 합류와 본토공격 등을 구상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특사로 해리먼을 보내 맥아더의 구상을 중지시킨다. 맥아더는 이를 개탄한다.

 

그는 9월 12일 사세보 기지에서 맥킨리호를 타고 인천으로 와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9월 29일 맥아더는 탈환한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한의 행정권을 이양한다. 10월 2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드디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개시했다. 우리 국민은 궐기대회를 열어 북진을 결의한다. 맥아더는 이에 힘을 얻었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갖는다. 대통령과 군 사령관이 첫 대면 하는 자리라 더욱이 대통령이 비행기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맥아더는 해외파견 14년간의 군 생활이었기 때문에 1945년 4월에 취임한 대통령과 상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모습이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바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다시 만주폭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3차대전의 위험성을 들며 반대한다. 맥아더는 공산권의 타파는 아직 군사력이 약한 현시점이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를 전쟁광으로 비판하는 소리도 나왔다. 마침내 12월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후퇴시켰다.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간청도 있었겠지만 맥아더의 주장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서울을 재탈환했으나 4월 12일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맥아더의 만주폭격에 대해 불안했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날 새벽 200만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일본의 오늘은 실로 맥아더의 도움이고 6·25전쟁 덕분이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들의 환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4월 19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군 사령관이 미국 국회에서 퇴임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참모습인 모양이다.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 위협은 세계적인 것, 아시아 유화정책으로는 유럽에서도 반공이 안된다. 대만도 다시 중국 본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고 연설을 마쳤다. 그는 실로 52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친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미국군가의 후렴이다. 우리 군가 ‘전우의 시체를 넘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와 엄청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962년 맥아더는 미육군사관학교를 방문, 사열을 받고 연설하고 훈장을 받았다. 그의 생애는 이렇게 마쳤다. 그는 이승에서 6·25 60주년을 기념하며 미의회가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해 북한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의결한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것이고, 우리 국회의 천안함 대북결의안 채택은 불투명한 채 참전국과 참천용사들에 대한 감사결의안만을 의결하는 모습에 그의 심경도 불편하리라.

 

 

맥아더 장군의 마지막 의회 연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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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Douglas MacArthur's

"Old soldiers never die" Speech

(April 19,1951)

 

 

 

국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대통령 각하, 의장님, 그리고 고명하신 의원 여러분

  저는 깊은 겸양과 자부심을 가지고-즉 저보다 먼저

이 자리에 섰던 위대한 미국 역사의 건설자들의 궤적을

따르고자 하는 겸양과,

이 입법부의 토론장(국회의사당)이 지금까지 고안된

가장 순순한 형태로 인간의 자유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여기에 전 인류의 희망과 열망과 신념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떤 당파적인 명붑을 옹호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중략)

저는 저물어 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어떤 적의나 비통함에서가 아니라

단지 마음에 품은 한 가지 목적 곧 내 조국을 섬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에 개입하려는 결정을 하기에 앞서

저와 상의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결정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건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그 결정은 우리가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그들의 군사력을 격감시킴으로써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으며 우리의 목적은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동원하여

개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전쟁과 전혀 새로운 상황을 야기시켰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군이 북한 침략자들에 맞서 배치되었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외교 분야에서 군사 전략의 현실적 조정을 허용하도록

새로운 결정을 요구했습니다.

이 결정들은 조속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제 정신으로는 우리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는 것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치적 목적이 처음의 적을 물리쳤듯이

이 새로운 적도 물리치는 것이었다면 이 새로운 상황은

전략을 과감하게 수정할 것을 긴급하게 요구했습니다.

한국의 비극은 군사적인 행동이 그 영토 한계 안으로만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구해 내려는 그 나라가 전면적인 해상 폭격과

공습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고

반면에 적의 은신처는 그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전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만이 지금까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모든 것을 건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한국인의 훌륭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은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는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Don't scuttle the Pacific." "태평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막 떠나 왔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온갖 시련을 감당했으며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참 훌륭하다고

기탄 없이 여러분께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전쟁을 최소한의 시간 손실과

인명피해만으로 명예롭게 끝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늘어가는 유혈사태는 저에게 더없이 깊은 고통과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용맹스런 병사들은 제 생각과 기도 속에

항상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52년간의 군복무를 끝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그것은 소년시절의 제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의 평원에서 선서한 이래 세상은 여러번 바뀌었고,

희망과 꿈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했던

그 당시 병영 최고의 애창곡들 가운데 한 곡의 후렴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으로서의 이력을 마감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한사람의 노병으로서

다만 사라져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라져가는 노병 맥아더장군

(연설 후 국회를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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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군사적 안목과 정치적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을 당연시 생각할 수 있으나 트루만 대통령의 정치적 안목과 판단은 인류의 또다른 큰 불행을 자초하지는 말자는 안목이다. 물론 트루만의 안목과 생각대로 결과적으로는 한반도가 원래대로 반쪽씩 현상유지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반쪽씩 나누어지게 되었고 남과 북은 반세기 넘게 서로 사상과 체제를 달리하면서 아귀다툼하며 죽고 죽이는 살륙을 진행해 오고 있다.  조상을 잘못 만나 탓으로 오늘의 불행을 당하고 있는 이러한 민족의 불행은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고대 로마시대 '포에니 전쟁'을 떠 올리게 한다.

 

이탈리아 반도 끝 메시나 해협 건너 시칠리아섬에 그리스 도시국가 '메시나'가 이웃도시인 '시라쿠사'가 당시 해양 강대국인 '카르타고'를 등에 업고 '메시나'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은 갑론을박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위협을 방치할 수 없는 관계로 당시 신생국이던 로마는 힘은 부족하지만 '메시나'를 지원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제1차 시칠리아 쟁탈전, 제2차 한니발 전쟁, 제3차 카르타고 멸망까지 장장 150여년 동안 로마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도 마지막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고 그후  약 2000년 동안 지중해 일대와 에스파냐, 프랑스.독일.영국,  동유럽, 그리스 및 소아시아, 이집트,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메김하는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