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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33 : 고려의 역사 1 (고려사에 대하여...) 본문
한국의 역사 233 : 고려의 역사 1 (고려사에 대하여...)
서언
고려!
한반도에서 신라에 이어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고려사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해온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이었다. 5백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는 역사를 단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가운데 끼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제라도 고려시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한민족 단일 국가의 출발점이 바로 고려라는 시대적인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려의 역사를 출발하기전에 후삼국시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후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유일무일한 전국시대요, 잃어버린 영웅시대이다. 반백 년에 이르는 이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임에도 그간 한 번도 깊이 있게 조명되거나 연구된 바 없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후삼국시대의 중요성과 그 의미에 대해서 전혀 알 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뒤어어 수립된 고려왕조는 후삼국의 진통을 겪고 태어난 고려는 '고려사' 사료에 근거하여 고려왕조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전반적인 내용을 추가하여 증보판으로 펴 낸 책이다.
고려왕조실록의 복원 의미는 아래와 같다.
첯째, 많은 사람들이 고려사를 조선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고려가 불교가 아주 성행했던 불교국가로만 알고 잇다는 점이며,
셋째, 고려를 삼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는 고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 수십 개의 나라가 섰다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5백 년을 버티며 참으로 지난한 세월을 지탱한 고려인들의 강인함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국제정세 속에서 실리와 대의명분을 함께 취하는 고려인들의 현실감각은 비슷한 상황에서 처해 잇는 작금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왕조사는 단순히 왕족들을 위한 역사가 아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중재자이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표명사일 뿐, 절대 권력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사가 왕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고 해서 왕실의 이야기를 정리해놓은 종묘사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왕으로 하여금 사관들의 사초를볼 수 없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고려왕조실록을 통해 고려인들의 진면목을 다시 살펴보고 역사를 이해하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려인들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강대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던 저항정신을 우리들은 배워야 할 것이여, 그런 가운데서도 이룩한 찬란한 문화적 위업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한 쪽이 과하면 다른 한 쪽이 반드시 반기를 들고 정권을 뒤엎었던 무신정권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의 과오와 회한을 우리들이 이해하고 그들이 내세우던 이상과 꿈을 우리들은 또한 배워야 할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고려를 재발견하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 작가 박영규씨 '고려왕조실록' 서언 중에서 -
고려의 역사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학창시절 고려사를 배운 기억은 단지 무신정권이 장기간 통치하였다는 것, 몽고군의 침공으로 전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주요 아까운 문화재들이 다수 소실되었다는 점,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군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주조하였다는 점,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벌이면서 마지막 한사람까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점, 몽고의 내정간섭으로 왕실과 조정이 몽고풍으로 변하였고 내정간섭과 몽고를 등에 업고 권문세도가들이 고려 조정을 뒤흔들었던 점, 그리고 몽고가 망하고 명이 발흥할 즈음 고려 말년에 이성계의 쿠테타로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 조선이 세워졌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정도이다.
고려는 글자 그대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멸망한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신라, 후백제, 태봉의 호족들에 의한 연합정권으로 왕권이 근본적으로 취약한 가운데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왕건은 궁예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한 틈을 이용하여 수하들과 같이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덕장이었던 것이며 결혼 동맹으로 호족들과 동맹을 맺고 신라 경순왕의 귀부로 왕건이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강력한 경쟁자였던 후백제의 영웅 견훤이 내분으로 장남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중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탈출, 고려로 귀순하게 되자 왕건에게는 천운이 따랐다고 볼수 있겠다.
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의 장렬한 전사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엿던 경우라던가 견훤의 생부 아자개가 왕건에게로 귀순한 점도 천운이 따랐던 징조였다. 견훤이 신라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경순왕으로 갈아치운 과정에서 보여준 폭거도 신라인들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쏠리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광종의 개혁으로 고려는 정치적인 안정기에 접으들면서 이후 계속된 왕위 쟁탈전과 강조의 반란, 거란족의 침공으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으면서 고려 장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귀주대첩으로 불리는 전쟁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룬 강감찬을 비롯한 수하 장졸들의 용맹성과 애국정신은 고려의 역사를 중흥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과거시험의 실시로 대거 등용된 문신들의 횡포는 결국 무신들의 반란을 조장하게 만들었고 100여 년이 넘는 무신정권이 피의 보북으로 점철되는 정치적 불안정기를 만들게 되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몽고군의 7차에 걸친 침공으로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본토의 산천초목은 모두 불바다로 변하고 수많은 백성과 부녀자들이 몽고군에게 수도 없이 끌려가고 중요 문화재는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전국토가 유린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결국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 고려 조정은 몽고의 지배를 받는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자체적으로 대몽항쟁을 벌이면서 강화도-진도-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최후의 일인까지 봉고군에게 항쟁하다가 고려-몽고군의 토벌로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고려-몽고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2차에 걸친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대부분 수장되고 물러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몽고의 고려 내정 간섭은 몽고에 귀부한 고려인 출신들이 몽고 조정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면서 조정을 뒤흔들고 몽고말과 몽고풍의 옷을 입고 귀족행세를 해야 대접받는 시대였으니 오늘날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을 유학하고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미국을 등에 업고 이땅에서 위세를 부리는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왕권이 추락하고 귀족들의 부패는 극에 달하는 시대가 중원에서 일어난 주원장의 명나라가 몽고군을 물리치면서 고려에서도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몽고군이 물러가자 고려는 조정을 정비하고 몽고 잔재를 일소하고 자주적인 기풍이 조성되면서 고려 조정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고 최영 장군을 위시한 주전파에 의해 만주 땅인 고구려 고토회복을 위해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정시켰으나 이성계는 압록강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어쩌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만주 땅을 정복하지 못했던 것이 한민족이 영원히 대륙으로의 진출을 좌절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꼭두각시 우-창왕의 시대를 거쳐 이성계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초대 임금인 태조이다. 그로써 고려는 파란만장한 5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는 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과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9세기 말)에 들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기에 이르렀고, 이 중 군인 세력인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를 세웠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고구려를 세웠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
고려(高麗)는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한 이후,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70여 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왕조이다. 한국사에서는 이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였다.
전기
고려는 신라 말기 송악 지방의 호족 왕건이 개국하여, 송악을 개경(開京 : 현재의 개성)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다.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였다.
거란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섬멸하였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고려 사회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가 향상 되어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났으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는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기
12세기 중반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후로는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이 수립되었다. 또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전국 도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한편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고,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이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이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의 항쟁은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원의 간섭기 동안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또한 새로이 등장한 권문 세족은 불법 행위로 사회 모순을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과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 기반 마련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고려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왜구와 홍건적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의 이성계는 정도전을 위시한 신흥 사대부들과 결합하였고,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권문 세족을 압박하는 개혁을 확대하여 정치·경제적인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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