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스파르타쿠스 반란 본문
스파르타쿠스 반란
스파르타쿠스 전쟁 | |||
![]() 로마 공화정 당시의 이탈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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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로마 공화정 | 도망노예 및 검투사 | ||
지휘관 | |||
크라수스 | 스파르타쿠스 | ||
병력 | |||
8개 군단 (약 4만~5만 명) | 약 12만 명 (비전투원 포함) | ||
피해 상황 | |||
상당한 손실 | 대부분 죽거나 십자가처형 당함 |
스파르타쿠스 전쟁 또는 검투사 전쟁은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노예와 검투사들과 로마 공화정과의 3년에 걸친 전쟁를 말한다. 노예 반란군의 지도자인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라고도 하며, 이전의 두 차례의 노예 반란에 이은 세 번째 노예들의 전쟁임으로 제3차 노예전쟁으로도 부른다.
로마 공화정의 노예
고대 로마에서 노예는 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군사적 확장으로 정복된 피정복민을 노예로 삼거나 야만족을 노예로 삼았고 노예의 수는 대략 자유민의 30~45%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예는 다양한 일을 했는데 그리스어나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노예부터, 회화, 조각 등 숙련기술자, 검투사,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노예, 라티푼디움의 농장 노예 등 다양하고 많은 노예가 있었다.
로마에서 노예는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그 계층이 너무도 다양하였다. 또한 로마에서는 일정조건의 해방노예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잇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노예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로마인은 노예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자"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노예들의 전쟁
이미 로마는 두 차례의 노예전쟁을 경험했다. 제1차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부터 132년에 일어났고, 제2차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에 일어났다. 두 차례 모두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시칠리아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곡창지대로 대규모 농장이 있었고 그농장에서 노예를 많이 부렸고 학대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두 반란 모두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74명의 검투사들이 집단 탈주했고 이들은 무기를 들고 험준한 베수비오스 산으로 도망쳤다.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크릭수스는 갈리아 출신이었다. 로마 당국은 이들을 막으려고 처음에는 정규 로마 군단이 아닌 3,000명의 토벌군을 보냈으나 검투사들은 간단히 토벌군을 제압했고 이 소문이 퍼지자 주변의 농장에서 노예들이 집단 탈출하여 베수비오스 화산으로 몰려들었다. 이 캄파니아 지방은 대농장이 많았고 주로 부유한 로마 귀족들이 휴가를 보내는 별장지역어어서 노예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검투사 군단에 합세한 것이다.
로마 당국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르니우스의 지휘 아래 정규 2개군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정규 2개군단도 노예 반란군에 괴멸되고 바르니우스는 거의 붙잡힐 뻔하였다. 노예군은 로마군의 장비로 무장을 보강했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노예들이 새로이 반란군에 가담하여 병력이 늘어났다. 기원전 73년의 겨울 동안 스파르타쿠스는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반란군을 조직화하고 훈련시켰다.
전쟁의 양상
기원전 72년 봄, 노예군은 숙영지에서 나와 북쪽 갈리아로 향했다. 원로원은 법무관의 군단이 패했고 반란군의 규모가 커지자 그 해의 집정관 푸블리콜라와 클로디아누스를 모두 토벌에 투입했다. 처음에 푸블리콜라의 로마군은 크릭수스가 이끄는 노예군 3,000명을 가르가노 산에서 만나서 2/3를 죽였고 크릭수스도 전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아드리아 해를 따라 북상했다.
이 대목에서 아피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 약간 달라지므로 스파르타쿠스의 행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집정관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거나 따돌리고 로마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한 다음 피세놈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노예군이 집정관의 군대를 다시한번 격파하고 북쪽으로 계속 향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내려와 스파르타쿠스를 저지하려 했으나 역시 패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아피아누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도망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스파르타쿠스가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이유는 알 수 없다.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와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다급해진 원로원은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전직 집정관이 남긴 2개군단과 새로운 6개군단을 합쳐 모두 8개군단을 주었고 토벌하라고 했다. 그때까지 별다른 군 경력이 없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 반란 토벌로 공을 세우고 싶어했고 매우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응징했다. 기록에 따르면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하자 적에게 등을 돌린 군단병중 60명을 뽑아 나머지 동료들이 죽이게 했다고 하며, 군단병은 크라수스가 적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고 한다. 크라수스의 잔인함 때문인지 로마군은 노예군을 상대로 승기를 잡고 노예군은 험준한 산속에 가두어 두는 데 성공했고 스파르타쿠스는 키리키아 해적과 협상을 하여 시칠리아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도망치려는 시도는 모두 불발로 끝나고 스파르타쿠스는 고립되었다.
이때 마침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물리치고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귀환했고 루쿨루스도 마케도니아에서 귀환하여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잘못하면 이들에게 반란군을 진압한 공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크라수스는 군단병들을 다그쳐서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하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은 크라수스의 정규 군단병의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공격에 급격히 무너졌고 결국 대부분이 전사하고 괴멸하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는 끝내 찾아낼 수 없었지만 그도 역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결말
폼페이우스는 이 전쟁에서 직접적으로 스파르타쿠스와 대적하지 않았지만 잔당을 소탕하는 데 협력했다. 크라수스는 직접적인 전쟁의 승리자로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고 대부분의 노예군을 학살했다. 살아남은 노예군 6,000여 명도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아피아 가도변에 모두 십자가형을 당했다. 십자가는 수십km에 달했다고 한다. 이로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로마에서의 위상은 더욱 커졌다.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라틴어: Spartacus)는 기원전 73년부터 2년 뒤인 기원전 71년까지 노예들을 이끌고 반(反)로마 공화정 항쟁을 지도한 노예 검투사이다.
계급투쟁
그에게 동조하는 70명의 검투사들과 이탈리아 남부의 카푸아의 검투사양성소를 탈출,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남부전역을 장악했다.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는 계급투쟁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로마 공화정의 어리석음과 대농장(라티푼디움)을 소유한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몰락농민들의 불만덕분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계급투쟁은 투쟁 노선대립으로 인한 내분(스파르타쿠스는 노예들을 착취하는 로마 제국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대다수의 노예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했다)등으로 인해 진압당했다. 진압으로 붙잡힌 6,000명의 포로들이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당했을 정도로 스파르타쿠스의 계급투쟁은 거대한 항전이었다. 당시 포로들은 계급투쟁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고 묻자, 서로 자기가 스파르타쿠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억압받는 계급들의 영웅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이야기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1951)
- 미국의 작가 하워드 패스트는 1951년 자비로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출간한다. 하워드는 매카시즘이 횡행할때 미 의원의 반미조사활동위원회에 명단 제출을 거부하여 3개월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는데, 이 때 이 소설을 구상하였다. 하지만 혁명가의 생애를 다룬 그의 소설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직접 자비출판하게 된다. 소설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로마 귀족과 장군들의 기억과 회상을 기준으로 전개된다. 미국에서는 1991년, 페이퍼백으로 재출간되었는데 작가의 서문 《스파르타쿠스와 블랙리스트》가 새로 추가되었다. 한국에서는 2008년 출판사 미래인에서 김태우 번역으로 출판되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
- 영국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로 옮겼다. 베스트 셀러 원작에 커크 더글러스, 로렌스 올리비에, 피터 유스티노프, 진 시몬스, 토니 커티스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었다.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커크 더글러스의 야심과 큐브릭 감독의 연출관 차이로 불화를 빚기도 했다.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피와 모래》(2009)
- 미국 Starz 채널에서 2009~2010년 시즌에 방송된 13부작 미니시리즈이다. 트라키아인 스파르타쿠스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글래디에이터로 명성을 떨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당시 로마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 방영시 TV-MA 등급을 받았을만큼 잔인한 장면과 선정적인 장면이 많이 있다. 한국 케이블 TV 방송에 방영 되었다.
크라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 경 – 기원전 53년)는 로마 공화정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술라파로 정계에 등장하여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진압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다. 파르티아와 전쟁중에 대패하여 죽었다.
초기의 성장
크라수스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다. 크라수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고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기간에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잃었다.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술라파를 숙청할때 크라수스는 킨나의 박해를 피해서 히스파니아로 도망했고 기원전 84년 킨나가 죽은 뒤 아프리카로 가서 술라의 편에 합세했다. 술라가 로마로 다시 돌아올때 크라수스는 술라의 충실한 협력자로 함께 로마로 입성했는데 이때 로마의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라수스는 큰 공을 세웠다.
로마로 복귀한 크라수스는 자신의 가문의 재산을 찾는데 힘썼다. 술라가 마리우스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가자 그는 이에 편승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크라수스는 은광산의 노예거래, 화재가 난집에서의 재산 거래등 악날한 방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불려나간 것으로 악명높았다. 당시 크라수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술라의 사후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정치적으로 평판은 좋지 않았다. 당시 상당한 군사적 업적을 쌓은 폼페이우스에 비해 자신은 군사적 업적이 없었기에 집정관직등 로마의 공직에 오를 가망이 없었다.
스파르타쿠스 전쟁
때마침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인 세르토리우스와의 전쟁으로 히스파니아에 가 있었다. 초기에 반란은 원로원의 안일한 대응으로 규모가 더욱 커졌고 급기야 2명의 집정관이 토벌군으로 나섰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모두 패하고 말았다.
크라수스는 8개 로마 군단을 거느리고 잔인하게 반란군을 진압해 나갔고 크라수스는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보다 더 공을 세워야 했기에 군단병들을 다그쳤고 본보기로 아군을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함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생존자 6,000명들도 성서고고학자들이 가장 잔인한 형벌로 규정짓는 십자가형으로 죽였다.
로마 정치에서의 경력
기원전 70년 . 두 사람은 서로의 야망을 위해 술라의 정책을 무효화하고 서로 보이지 않게 경쟁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을 토벌하고 아시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기원전 65년 크라수스는 감찰관이 되었고 자신의 엄청난 부를 이용하여 로마에서 우호세력을 만들었는데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돈을 꾸어 주는 방식으로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기원전 62년에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점점 사이가 나빠지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를 중재하고 기원전 59년 세사람은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크라수스는 끊임 없이 폼페이우스를 견제했고 점차 사이가 벌어졌다. 세 사람은 서로 협력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챙겼고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5년 간의 시리아 속주 총독직을 인정받았다.
파르티아 원정과 죽음
기원전 55년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이후 파르티아와 로마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두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길 원했고 그것을 파르티아와의 전쟁중에 이루려고 애썼다. 초반에 파르티아를 상대로 너무나 쉽게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였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너무 깊숙이 쳐들어갔다. 그러나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 군은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의 아들은 전사하고 크라수스도 적의 계략에 말려서 살해당했다. 약 4만명의 파르티아 원정군중 살아서 도망친 로마병사는 약 1만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로마군은 참패했다.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붙잡혀온 크라수스의 목에 황금을 녹여부었다고 한다.
연표
- 기원전 115년 경 - 태어남
- 기원전 97년 - 아버지가 집정관이 됨
- 기원전 87년 -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피해 히스파니아로 도망
- 기원전 84년 - 술라와 합류하여 마리우스파 제거
- 기원전 74년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발발
- 기원전 73년 - 법무관에 선출
- 기원전 71년 - 스파르타쿠스 격파
- 기원전 70년 - 집정관 선출 (폼페이우스와 공동집정관)
- 기원전 63년 - 카틸리나 역모
- 기원전 59년 - 제1차 삼두정치 결성,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정관 되다
- 기원전 56년 - 루카의 회담
- 기원전 55년
- 두 번째 집정관 선출 (폼페이우스와 공동집정관).
- 11월 시리아로 떠나다
- 기원전 54년 - 파르티아 원정
- 기원전 53년 - 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 죽음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스파르타쿠스 ( Spartacus, 1960, 미국 ) 감독 : 스탠리 큐브릭, Inner Link 시오노 나나미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로자 룩셈부르크 글래디에이터 마이클 조던 로렌스 올리비에 커크 더글라스 영광의 길 멜 깁슨 오손 웰즈 시민 케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조시프 매카시 예전엔 로마사를 알기 위해서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야 할 만큼 당연하게 읽어야 하는 책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손에 꼽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로마사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것도 민족적 편견일지 모르겠으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저서들을 읽다보면 그 안에서도 국적에 따른 혹은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지역색 혹은 특유의 정서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영국 출신 필자의 글을 읽을 때는 특유의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정의(定意)하는 듯한 문장이나 살짝 비꼬는 투의 블랙유머가 담긴 문장이 재미있고, 프랑스 필자들의 경우엔 그들 특유의 다변(多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와도 가까운 일본 출신 필자들이 저술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은 권력지향적인 해석, 승자에 대한 경배이다. 가령, 대영제국의 흥망을 다룬 두 개의 각기 다른 저서 “대영제국쇠망사”(나카니시 데루마사, 까치)와 “영국제국주의”(사이언 C. 스미스, 동문선)는 모두 비슷한 시기의 대영제국의 역사와 제국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연구자가 다르니 결론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카니시 데루마사가 내리고 있는 대영제국(즉, 영국 제국주의) 몰락의 결정적인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연합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식의 뉘앙스가 풍긴다. 물론, 영국이란 한 국가의 몰락 원인을 찾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찾는 것은 당연해보이지만 독일과 전쟁을 지속하지 않는 수준에서 제국을 재정비했다면 그 결과를 최소한 유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결론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쓸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까닭은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참고하기 위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뒤적이다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이야기가 정말 쥐꼬리만큼 다뤄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노천광산에서 일하는 노예였다. 그는 동료를 괴롭히는 경비병에 반항하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검투사감을 찾던 상인에게 발탁된다. 중부 이탈리아 지방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 들어선 스파르타쿠스 - 그는 이곳에서도 교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동료 검투사들 사이에서는 신망을 얻었다. 특히 이디오피아 출신의 검투사 드라바와의 우정은 돈독했다. 검투사들의 진짜 대결을 구경하고 싶어한 크라수스의 아내를 위해 드라바와 스파르타쿠스가 검투 대결을 벌인다. 검투 대결에서는 드라바가 승리했지만 드라바는 스파르타쿠스를 죽이기 보다는 크라수스에게 덤벼들어 죽는 길을 택한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마음에 두고 있는 바리니아를 상대로 욕정을 품는다. 이를 바라보는 검투사 양성소의 바티아투스. 안토니누스 역의 토니 커티스, 바리니아 역의 진 시몬즈, 크라수스 역의 로렌스 올리비에, 바티아투스 역의 피터 유스티노프(좌측부처 시계방향으로) 크라수스의 총애를 받으나 그를 버리고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군에 합류하는 안토니누스 -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는 원래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암시하고 있었으나 개봉 당시에는 부적절하다 하여 삭제되었었다. 노예반란을 주도한 스파르타쿠스는 비록 검투사들이라고 하나 오합지졸에 가까운 다양한 민족이 분포한 세력을 이끌며 초기 몇몇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퇴시키는 뛰어난 전술을 보여준다. 주연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 - 두 사람은 영화를 제작하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촬영에 사용된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로마네스트 양식의 별장과 넵튠 수영장 검투사(劍鬪士)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말기에 이른 로마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73년 카푸아에서 일어나 71년 훗날 삼두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크라수스가 이끄는 진압군에 패해 모조리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한때 이들 반란군은 정예 로마군단을 연파하며 12만 명에 이르렀으나 내부 분란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결국 6,000여명의 노예가 포로로 잡힌다. 그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져 아피아 가도 양편 길가에 매달렸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의무는 없고, 해석에 따라서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실제 로마 제국에 끼친 영향도 미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원전 210년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로 꼽히는‘진승, 오광의 반란’이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그 의미가 재평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역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의미가 결코 미미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노예제라는 경제적 하부 구조를 갖고 있던 당시 로마 사회를 고려한다면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근간을 이렇게 위협할 수 있었던 사건은 흔치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그것이 종료된 시점에 이미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시오노 나나미는 단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있던 시대에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이 시오노 나나미의 저술이 재미있고,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로마사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다. 검노(劍奴), 글라디오토르 만약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해 독일의 공산당 무장혁명조직이었던 ‘스파르타쿠스단’을 연상한다면 그 의미는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비인간적인 억압과 정치적 압제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오랜 상징이었다. 우리는 얼마 전 검투사를 의미하는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를 본 적이 있는데, 이 말은 검(劍)을 뜻하는 라틴어 ‘글라디우스(gladius)’에서 나온 말이다(글래디에이터는 영어식 발음이고, 원래 로마식으로 읽자면 ‘글라디오토르’가 맞다). 로마에서 검투의 역사는 이탈리아의 선주민이랄 수 있는 에르투리아인들로부터 기원했다고 하는데, 로마에서는 장례식 행사 중 일부로 진행되어 어느 한 편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워 경기 도중 목숨을 잃은 이가 내세에서 죽은 이를 위한 무장 수행원이 된다고 믿었다 한다. 동서양을 막론한 순장(殉葬) 풍습의 흔적일 수도 있다. 기원전 264년경 최초의 검투경기가 있은 뒤로부터 검투 경기는 점차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어느 경우 엔 축제 형태로 100일 동안 계속된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현대의 프로 스포츠 인기에 버금가는 것이었고, 규모면에서 보자면 프로 스포츠를 오히려 능가 하고 있다. 실제로 A.D.106년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 지방을 정복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식이 있었던 107년 연초에는 무려 5,000쌍의 검투사들이 대결벌이기도 했으나 세계 최대의 단일종목 스포츠 이벤트라는 월드컵의 규모조차 이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팍스 로마나를 구축한 5현제 중 첫 번째 황제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시라. 로마제국의 변경 도시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도시엔 당연히 공중목욕탕과 원형경기장이 있었고, 여기에서는 여러 경기들이 열렸다. 검투사들은 제각기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기를 들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돈 뒤에 본격적인 경기를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군단 정규군의 표준 무장이었던 글라디우스(두툼하고 짧은 길이 55cm정도의 검), 필룸(pilum, 끝이 가늘고 긴 창, 길이 1.7m 가량)을 사용하지 않고, 에르투리아식 무장이나 여러 이민족의 무장을 사용했는데, 표준 무장은 검과 방패를 중심으로 그물과 삼지창 혹은 올가미 등으로 무장했다.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서 패한 검투사의 목숨은 관객들의 손에 좌우되었는데,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이 죽이라는 신호는 엄지를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검투사들은 대개 노예나 죄수들 가운데 차출되었으나 자유인 중에서도 경제적 파산자가 자원하여 검투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들은 대개 노예였으므로 특별히 승리에 대한 상금이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간혹 상금이 주어지거나 사교계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 검투사의 인기는 오늘날 프로스포츠의 마이클 조던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예였던 검투사들에게 가장 보상은 일정한 승수를 쌓은 검투사에게 주어지는 혜택 즉, 검투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검투사들의 노예해방전쟁 -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기원전 73년 그리스 트라키아(현재 '불가리아') 지방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학교에서 검투사로 훈련받고 있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으나 스파르타쿠스가 전쟁포로 출신의 노예였다는 설과 로마군 병사였다가 탈영한 죄로 붙잡혀 검투사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이제부터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광산 노예로 일하던 스파르타쿠스(Kirk Douglas)는 아픈 동료를 돕다 경비병과의 싸움에 휘말린다. 그 죄로 바위에 묶인 채 죽음을 기다리는 데, 때마침 검투사 감을 찾으러 온 상인에 의해 카푸아의 검투사 학교에 팔려가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도 동료들에게는 의리 있고 교관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때 검투사 학교를 방문한 로마의 부유한 귀족인 크라수스(Laurence Olivier)와 그의 부인은 검투사들의 실제 검투 장면을 바로 코앞에서 보고 싶어 한다. 단, 승리한 검투사는 패한 검투사를 죽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검투 학교에서 각별히 친밀한 관계였던 이디오피아 출신의 검투사 드라바(Woody Strode)와 상대하게 된 스파르타쿠스. 두 사람은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이나 검투 실력에서는 드라바가 한 수 위였고, 스파르타쿠스는 패하고 만다. 그러나 드라바는 스파르타쿠스를 죽이는 대신 이들의 검투를 높다란 베란다에서 구경하던 크라수스 일행에게 삼지창을 던진 뒤 이들에게 달려든다. 베란다에 매달려 이들을 향해 기어오르는 드라바의 등에 창이 꽂히고, 크라수스는 드라바의 목 줄기를 단검으로 베어 버린다. 드라바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스파르타쿠스는 다음 날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던 바리니아(Jean Simmons)가 크라수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같은 검투사 출신 교관인 마셀러스가 스파르타쿠스를 조롱하면서 시비가 붙어 격투를 벌이게 되고,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마셀러스를 죽이고 만다. 흥분한 검투사들에 의해 경비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는 노예들에 의해 장악된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70여 명 정도의 검투사들이 로마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도망치며 살다가 죽느니 다른 노예들까지 규합하여 로마를 힘으로 탈출할 계획을 짠다. 스파르타쿠스를 연기한 커크 더글라스 -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는 영화 <영광의 길>로 처음 만나게 된다. 이들의 반란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커져 인근 도시로까지 번진다. 로마는 아직 이들의 세력을 얕보고 보병대를 보내 이들을 진압하려고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군은 도리어 이들을 야습하여 전멸시킨다. 한편 이들을 제압하여 그라쿠스의 민중 세력을 거세하고, 자신이 로마의 독재관이 되고자 하는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군을 로마로 유도하는 전략을 짠다. 한편 크라수스에게 팔린 바리니아는 바티아투스(Peter Ustinov)로부터 도망쳐 스파르타쿠스와 재회하게 되고, 크라수스의 노예였던 안토니누스(Tony Curtis)조차 탈출하여 스파르타쿠스와 합류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민중 세력인 그라쿠스(Charles Laughton)의 도움으로 노예들을 이끌고 로마에 적대하는 해적들을 이용해 시칠리아에 그들의 근거지를 마련할 계획을 짠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크라수스는 해적들을 매수하여 이들이 시칠리아로 탈출할 수 없도록 미리 손을 쓴다. 크라수스의 정예 로마군단에게 포위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군은 자유를 위해 이들과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나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결국 궤멸당하고 만다. 6,000여명의 노예들이 포로로 생포되었다. 크라수스는 붙잡힌 노예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이들 중에 숨어있는 스파르타쿠스를 밀고 하라고 제의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다른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때 그의 옆에 있던 안토니누스가 일어나며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며 외친다. 그만이 아니라 계곡에 있던 노예들 전부가 일어나며 여기저기에서 "내가 스파르타쿠스"라며 외친다. 이들을 쳐다보며 분노한 크라수스는 이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그때 로마군 병사들이 스파르타쿠스의 아이를 안고 있는 바리니아를 끌고 온다. 크라수스는 자신이 사랑한 노예였던 안토니누스와 스파르타쿠스에게 검투 대결을 벌이도록 한다. 안토니누스와 스파르타쿠스는 상대에게 십자가형의 고통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격렬하게 대결한다. 그러나 안토니누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상대가 아니었고, 결국 그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스파르타쿠스의 품에서 생명을 잃어가는 안토니누스는 그에게 "당신을 아버지 같이 사랑했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민중파 세력의 거두인 그라쿠스는 바티아투스에게서 바리니아와 아기를 빼내 그들에게 자유를 준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유를 얻은 바리니아가 성문을 빠져나가 길을 걷던 중 아피아 가도 양편으로 줄줄이 늘어선 십자가에 매달린 노예들 중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발견하다. 그녀는 스파르타쿠스 앞을 걸어가며 자신과 아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알린다. 로마군을 추격을 두려워 한 바티아투스가 그녀를 재촉하며 길을 떠난다. 역사적 허구와 진실, 영화 <스파르타쿠스> 사극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역사를 재현해내는 것과 그것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포장하는 일 사이의 긴장이란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로마 역사 실존 인물들이 제법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실존했다는 것이 진실이라도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대목은 허구이거나 허구에 가깝다. 가령, 스파르타쿠스는 실존했던 인물이고, 바티아투스의 실존 유무는 따질 수 없겠으나 카푸아의 검투 학교 같은 경우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 의하면 반란 진압에 성공한 크라수스가 마치 로마 공화정 말기의 독재관(즉, 황제적 지위)에 오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역사에 의하면 크라수스(Marcus Crassus)는 로마 최고의 부유한 귀족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사실이나 독재관의 지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그는 훗날 케이사르(Julius Ceaser), 폼페이우스(Pompeius)와 더불어 로마 제1차 삼두 정치의 인물 중 하나였을 뿐이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평민 세력의 거두였던 그라쿠스(Gracchus) 형제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있었던 시점에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지 오래였다. 형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는 BC 133년 토지문제로 평민의 이해를 대변하여 원로원 보수파와 맞서다 살해당했고, 동생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는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로마의 호민관으로 활동하다가 BC 121년 원로원 세력의 모략에 걸려 그의 동지 3,000여명 과 함께 살해당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BC 73년에 일어난 일이니 이들 형제는 백골진토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케이사르는 이 무렵 아직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점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이 무렵 그는 로마군단의 대대장 중 하나로 부유했던 크라수스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으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부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 허구에도 불구하고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매우 감동적이다. BC 73년 불과 70여명의 검투사들을 규합하여 노예 반란을 주도한 스파르타쿠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하여 역사상 더욱 명성을 떨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검노 양성소를 탈출하여 한때는 12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을 이끌고 2개 로마군단을 격파하며 남부 이탈리아를 석권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 최전성기에 이르는 시기로 그라쿠스 형제를 중심으로 한 민중 세력이 원로원 중심의 대규모 토지 농장주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 좌절된 뒤였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이후에도 로마의 공화정 체제 내에서 끊임없이 정치권력을 사이에 두고 격돌을 거듭하였고, 실질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있기 직전에 평민출신 장군인 민중파인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6~BC 86)와 하급귀족 출신으로 원로원파였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BC 78)의 세력 사이에서 많은 유혈 충돌이 있었고, 반대파를 숙청하기도 했다.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와 공화정제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최전성기에 일어난 반란은 단순히 노예들만의 반란이 아니라 이런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대립, 노예제 대규모 농장제로 인해 몰락한 로마의 자유 무산계급이 합세한 결과였다. 로마의 노예 정책은 때로 매우 잔인했고, 때로는 주종간에 특별한 애정관계가 형성될 만큼 친밀해서 주인에 의한 노예 해방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로마에서 노예는 의복과 같이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고, 로마의 자유 시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노예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받았고, 시중을 받으며 죽었으니 인간적인 친밀감이 부모형제보다 더 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집에서 일하는 가내 노예들에 한정된 것이고,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제국으로 팽창해가는 로마는 수없이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했고, 이들을 양산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BC 43년경에 이르면 전체 인구 750만 중 노예의 수가 200만에서 400만으로 추산될 정도였다고 한다. 노예무역 시장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지중해 동부 연안과 델로스 섬이 유명하여 이곳에서는 하루 10,000명의 노예가 매매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노예들이 때로 특별한 주종관계 속에 놓인 것은 사실이나 근본적으로 고대의 노예제는 우리가 근대 산업 혁명의 연료로 소모한 석탄과 같은 존재였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석탄 대신에 노예라는 인간을 불태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자유를 위해 봉기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결국 로마의 정예군단들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이런 시기에 노예반란을 주도한 스파르타쿠스는 비록 검투사들이라고 하나 오합지졸에 가까운 다양한 민족이 분포한 세력을 이끌며 초기 몇몇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퇴시키는 뛰어난 전술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스파르타쿠스는 매우 정의롭고, 자비로운 존재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포로로 잡힌 로마군 병사 300명을 처형한 적도 있다고 한다(역사적 진위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로마측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잔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유포시킨 것일 수도 있으므로). 어쨌든 스파르타쿠스는 이들을 이끌고 처음엔 로마의 북방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로마의 정복이 아니라 노예의 해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풍요로운 로마를 약탈하고 싶어 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초에 북방을 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무장과 훈련으로 근거지도 없는 로마에 침입하여 전성기에 있는 로마군단과 대적하는 것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그런 까닭에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와 적대하는 해적 세력을 이용해 로마군의 공격을 방비하기 적합한 시칠리아에 그들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결국 그의 반란군은 BC 71년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 군단과 맞서 싸우다 패하고, 나머지 잔당은 다시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종결된다. 그리고 얼마 후 케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를 거쳐 사실상 로마의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제정 로마 시대에 이르게 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자신의 필모그라피에서 삭제하고 싶어할 만큼 자신의 연출능력을 제약하는 상황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스탠리 큐브릭 감독 - 사진은 스파르타쿠스 연출 당시의 사진이다. 스탠리 큐브릭이 두고두고 자신이 연출한 이 영화에 대해 투덜거렸다는 일화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1957년 커크 더글라스를 주연으로 기용해 만든 <영광의 길>은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는 했으나 불운하게도 그의 여러 계획들은 계속 무산되어 2년간을 쉬고 있던 무렵에 제작된 이 영화는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영화 <엘 시드>를 비롯해 고전 사극 영화의 명감독으로 손꼽혔던 마이클 만 감독이 물망에 올랐으나 커크 더글라스가 스탠리 큐브릭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영화를 제작하는 내내 티격태격했다. 그러나 천재의 졸작은 범인의 명작보다 뛰어나다는 말처럼 스탠리 큐브릭의 연출 솜씨는 자칫 그저 그런 역사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뻔한 <스파르타쿠스>를 생생하게 되살려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는 특유의 꼼꼼하고 세밀한 연출력을 발휘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액션 장면 등에 있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스펙타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일설에는 멜 깁슨이 감독을 맡았던 <브레이브 하트>의 집단 전투 장면은 <스파르타쿠스>를 참고하여 연출된 것이라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단지 정형화된 할리우드식 연출 관습(제작자와의 마찰, 주연 배우와의 마찰 등)의 제약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크라수스와 안토니누스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암시하는 장면들은 제작자의 가위질에 걸려 잘려나가는 사태가 일어날 만큼 미국은 보수적이었다.(미국에서 개봉 당시 이 영화의 상영 시간은 184분이었는데 훗날 스탠리 큐브릭의 감독판 버전에는 196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필름의 사운드 부분에 심각한 손상이 있어 당시 크라수스를 연기한 로렌스 올리비에가 사망한 뒤라 그의 목소리는 앤서니 흡킨스가 대신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60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로 영화화될 수 없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자인 하워드 패스트와 각본을 집필한 댈튼 트롬보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만든 비미활동(非美活動)위원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매카시 선풍은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거짓 연설로 촉발되어 1954년 상원의 결의에 의하여 실각할 때까지 기간 상으로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매카시즘의 광풍은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의 거짓말’처럼 ‘빨갱이로 몰려 축출(Red Purge)’ 당하지 않기 위해 동료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짓말의 피라미드를 쌓게 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이때의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미국의 지성사에 커다란 멍에로 자리하고 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제작과정에 얽힌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는 영화에 등장하는 로마식 별장은 세트가 아니라 미국의 유명한 재벌이자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별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26개의 신문사, 13개의 잡지사, 8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거느린 매스미디어 대재벌이 되면서 영화쪽에도 진출하여 100여 편의 영화를 직접 투자하여 제작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한다. 오손 웰즈가 그를 모델로 하여 영화 <시민 케인>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유명한 사실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넵툰(Naptune) 수영장을 배경으로 촬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은 오늘날엔 관광지로 변모하여 버스를 타고 돌아보는데도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재벌의 별장에서 촬영된 노예반란 영화가 <스파르타쿠스>였다. 로마에게 바라는 건 자유밖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스파르타쿠스의 사후에도 크고 작은 노예반란은 일어났지만 영리한 로마인들은 이전의 노예제에서 한 발 물러나 여러 혜택들을 주는 등 많은 부분에서 양보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노예반란은 초기에 진압되어 대규모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노예반란에 비해 이런 작은 양보가 자신들에게 보다 이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검투사 경기는 기독교화 된 로마의 황제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양심적인 기독교도들도 별다른 고민 없이 노예제를 수용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난 뒤로도 2000여 년간 인류 역사에서 노예제도는 지속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2000여 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 체 게바라가 시시때때로 부활하듯 압제에 저항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부활하곤 한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원했다면 무력(스파르타쿠스단)을 동원해 독일의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독일 극우집단의 테러에 두개골이 짓이겨져 죽었다. 그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입니다." 양심의 기억은 동시에 패배의 기억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으로부터 2,000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노예제가 인류의 역사에서 소멸된 것처럼 우리들의 양심이 늘 욕망에 굴복했었음을 역사는 상기시켜 준다. 그건 어제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불행히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에게 바라는 건 자유밖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라고 외쳤고,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목숨을 걸었다. 그들은 가고 없지만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이 자유가 그들이 흘린 피와 무관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출연 : 커크 더글라스(스파르타쿠스), 로렌스 올리비에(크라수스), 토니 커티스(안토니우스), 진 시몬즈(바리니아), 찰스 로튼(그라쿠스), 피터 유스니노프(바티아투스), 존 개빈(케이사르) 등
신문왕의 별장에서 촬영된 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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