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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9 : 고구려 역사 32 (제26대 영양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49 : 고구려 역사 32 (제26대 영양왕 2)
제26대 영양왕 실록
(?~618, 재위: 서기 590년 10월~618년 9월, 27년 11개월)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영정을 모신 봉산사
영양왕의 강병책과 수나라 침공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이자 평원왕의 첫째 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원'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90년 10월에 평원왕이 죽자 고구려 제26대 왕에 올랐다.
영양왕이 즉위했을 때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은 북주의 왕실을 폐하고 581년에 수나라를 건국했으며, 그 후로 꾸준히 세력을 팽창하여 8년 뒤인 589년에 강남 동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주변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지속함에 따라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는 네 번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고,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 전면전을 펼친다.
수나라 왕 양견은 수차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고 영양왕도 수의 장안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마침내 양견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비밀리에 수륙군 30만을 동원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를 선제공격하게 된다.
고구려-수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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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고구려 | 수나라 | ||
지휘관 | |||
영양왕 고건무 을지문덕 강이식 |
수 문제 수 양제 양량 왕세적 우중문 우문술 주라후 내호아 | ||
병력 | |||
대략 30만명 | 정규군 113만 3800명 (612년) | ||
피해 상황 | |||
알 수 없음 | 302,300명 이상 (612년) |
배경
598년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나라는 진을 멸망시키고, 장성 이북의 동, 서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으며, 마침내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에 대비하여 방어 준비를 하였다.
수 문제는 이 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 이를 꾸짖었다.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臨瑜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의 북방 요충지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수 문제는 진노하여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수나라 침입과 고구려의 선전
제1차 침입: 강이식 장군의 대활약과 수나라 30만 대군의 전멸
임유관 대첩
임유관 대첩(臨渝關大捷)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임유관(산해관)을 중심으로 수륙에서 30만 수나라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제1차 고수전쟁을 말한다. 지금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내용을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밝힌 내용이다.
임유관 대첩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의 일부) | |||
![]() 임유관(지금의 산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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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고구려 | 수 | ||
지휘관 | |||
강이식 | 양량 주라후 | ||
병력 | |||
60,000명 | 300,000명 | ||
피해 상황 | |||
기록 없음 | 약 30만명 |
배경
581년, 수 문제 양견은 황제에 등극하고,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는 국력을 과시하고자 고구려에 신하의 예로써 분수를 지키라는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도발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
이에 대노한 영양왕은 신하들과 답서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장군 강이식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입니다."며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영양왕은 개전을 결심한다. 598년 강이식을 병마도원수를 삼아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을 선제공격하게 하고, 먼저 말갈 군사 1만으로 하여금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였고, 거란 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침으로써 고구려와 수나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나라의 대응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영주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가 패한 체 하며, 퇴각을 하자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모아 네째 아들 한왕 양량(楊諒)을 총사령관인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하였다. 주라후는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실제 수군의 목표는 육군의 보급이 목적이었다.
고구려군이 말갈군 1만 명으로 요서를 공격하자 수나라 영주 총관 위충이 수성전을 펼치며 양견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양견은 그해 6월에 한 왕 양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수륙군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30만 대군을 이끈 수나라 원수는 한 왕 양과 왕세적이었다. 이들 30만 대군은 좌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육로로 요수(난하)를 건너 고구려로 향하고, 우군은 산동의 동래(지금의 봉래) 항구에 집결하여 해로를 통해 고구려로 향했다.
하지만 한 왕 양과 왕세적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요하 근처에 도착하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바람에 군량미 수송이 뒤따르지 못하게 되자 진군속도가 늦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진을 포기해야 했다. 더구나 전염병이 돌아 매일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한편 우군은 주나후가 이끌고 대선단을 형성하여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에 진입한 후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 당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이미 수나라 수군이 이동할 강 주변에 매복하여 대기하다가 수나라 군대 배가 상류로 진입할 무렵 강이식 장군의 급습으로 군량선이 모두 수장되고 총력전을 펼친 끝에 수나라 수군 병력들도 대부분 수장되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과<대동운해>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때의 일을 사뭇 다르게 기록하고 잇다. <수서>를 인용한 <삼국사기>는 수나라 군대가 장마와 발해의 풍랑을 만나 수장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채호는 당시 병마원수를 맡고 있던 강이식 장군의 5만 병력에 수나라 군대가 격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이렇다.
"영양대왕이 (수 문제로 부터) 모욕적인 긇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놓고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강이식이 가로되, '이 같은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글이라' 하고 적을 칠 것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기꺼이 좇아 병마원수로 삼았다. 그로 하요금 정병 5만을 발하여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 병력 1만으로 요서를 침요하여 수나라 병력을 꾀어내고, 거란병 수천으로 바다를 건너 산동지역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구의 제1회 전쟁이 개시되니라."
이 때 강이식 장군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병력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길목을 지키다가 적군을 기습하여 격멸시킨다. 이 때문에 수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져 허기에 허덕였고, 설상가상으로 장마로 인해 기아와 질병이 겹쳐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된다. 강마다 설치한 목교도 홍수로 인해 파손되고 지원부대가 따르지도 못하자 후퇴로도 막혀 진퇴양란의 지경에 빠지면서 고구려군의 역공에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각하게 된다.
현재 강이식 장군은 진주 강씨의 시조이고, 그의 무덤이 옛 고구려 땅 심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전한다. 때문에 강이식은 가공의 인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신채효의 기록을 터무니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인용한 <서곽잡록>과 <대동운해>가 전하지 않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결과
이처럼 수나라 제1차 침입은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퇴각하게 된다.
결국 수나라는 보급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6월 장마철에 질병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고구려 군은 사기가 떨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히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개선하였다.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이 일로 수나라 군대는 급속하게 약화되고 고구려의 화친 제의로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 무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으며 한 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결국 수나라는 <수서> 기록에는 장마로 인해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퇴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는 수나라 30만 대군이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전술에 말려 병력 대부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30만 대군을 잃은 수나라 양견은 분노로 치를 떨며 출전 장수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는 등 다시금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신들의 긴곡한 만류로 일시 중단하게 된다.
영양왕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이에 양견은 분노를 감추고 고구려의 화친제의를 일단 받아 들인다. 그때 백제 사신이 도착하여 수나라에 자신들이 고구려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으니 향도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백제의 제의는 수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곧바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한동안 한반도에서 수세로만 일관하던 고구려가 공세로 나선점은 곧 백제와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면서 백제와 신라는 긴장하게 된다.
영양왕은 한반도 변경에 대한 군사력을 과시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후미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수나라에 대한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영양왕의 세력과시는 비단 병력면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역사를 정리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정신적 역량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600년 1월에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옛 역사서들을 요약하여 <신집>5권을 편찬토록 하였다. 고구려는 건국초기에 이미 <유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서를 정리하여 1백 권의 책으로 묶은 바 있는데, <신집>은 <유기>와 그 이후 편찬된 역사서들을 정리하고 수정한 것이었다.
영양왕은 603년에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진평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와 고구려군에 대항하였고,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 이후에도 고구려는 607년 5월에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항복을 얻어내지 못하였고, 다만 백성 3천을 포로로 잡아 고구려에 안치했다.
제2차 침입, 수나라 100만 대군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그무렵 수나라는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양견은 자신의 둘째 아들 양광과 정치적 마찰을 빚는 바람에 조정이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604년 7월 양광이 그의 부왕 양견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양광은 양견보다 더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는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낙양을 새로운 중심지로 건설하고 낙양과 탁군(북경)을 잇는 대수로를 건설했다. 또 607년 양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고구려의 사신이 돌궐에 와 있었다. 양광은 고구려 사신에게 다시금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양광의 요구를 묵살했다. 양광은 북쪽의 돌궐을 압박하여 돌궐 왕이 장안에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륙 안에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 뿐이었다.
양광은 누차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고, 고구려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대군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수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고구려는 608년 2월에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고구려 땅에 억류하였다. 그해 4월에는 우면산성을 빼앗아 신라의 북진을 차단했다. 그 후 고구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한강) 이북 영토 중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고구려가 한반도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양광은 고구려 침공준비를 완료하고 611년 4월에 군사를 난하(당시 요수) 건너편의 탁군에 집결시킨 뒤 612년 정월에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총 113만 3800명이었고 전군을 다시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었다. 좌군과 우군은 다시 각각 12군으로 편성되어, 총 24개군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고구려의 장안성이었으며,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평양성을 함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수서>는 수나라 군대의 출정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으며, 이는 다시 4단으로 분리되어 각 단마다 편장 1명을 두었다. 또한 단의 갑옷과 투구 끈과 깃발의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출정시키고,상호 거리가 40리 되게 하였고, 각 군영은 연속적으로 출발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종료되었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60리에 뻗쳤다. 왕의 진영에는 12위,3대,9시가 있었는데 내외, 전후,좌우 6군을 나누어 배속해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혔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출정한 수나라 군대는 좌우군이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고구려를 공략하였는데, 양광의 직할부대가 포함된 좌군이 요수를 건너 육로로 평양성으로 향하였고, 우군은 산동반도의 동래로 가서 배를 이용하여 요동반도의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양광의 본대는 요수를 건너기 위해 부교를 가설했다.그러나 부교의 길이가 짧아 건너편에 닿지 못하자 다시 부교를 더 구축하여 연결하려는 찰라,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기습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의 급습을 받은 수나라 군대의 피해는 컸다. 하지만 양광은 좀더 강폭이 좁은 곳을 선택하여 부교를 다시 가설토록 하였다. 부교를 가설하여 다시금 도하를 시도하여 요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부교가 완성되어 수나라 대군이 밀려오자 고구려군이 대적하였으나 1만 여명의 피해를 입고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요동성에 집결하여 수성전을 펼쳤다. 이후 요동성의 고구려군과 요동성을 포위한 수나라 대군간에 일진일퇴가 계속되고 있었다.
수 개월 동안 요동성은 무너지지 않고 선전하였는데, 이를 본 양광은 노발대발하여 수하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리고 요동성이 무너지지 않자 양광은 인근의 육합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육합성도 수나라 대군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이무렵 산동의 동래에 집결한 우군은 비로소 선단을 완성하여 발해로 배를 띄웠다. 수나라 우군의 조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선단을 지휘하여 발해를 건너 강을 타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어느듯 평양성 60리까지 진군하였고, 이를 발견한 고구려군이 공격하였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내호아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내륙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그것이 고구려군의 계략인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군대가 고구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시기였다. 잠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에 의해 도주로가 차단되고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내호아는 그의 부하 대부분을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수나라 수군 우익위 대장군 주법상의 군대가 해상에 정박하고 있는 바다로 달아났다.
발해에서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고 있는 사이 육지에서는 을지문덕이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별동대 30만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 30만 대군은 이미 요수를 건너 남방과 북방으로 우회하여 평양성을 공략하고자 했는데, 을지문덕은 그들의 전략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우중문과 우문술의 진영을 찿아갔다.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밀명을 받고 거짓으로 항복을 청했다. 이 때문에 수나라 선봉대 30만을 이끌고 있던 두 장수는 갑작스런 고구려군의 항복 소식에 어리둥절 했다. 그들은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은 보면 무조건 죽이라는 지시를 양광으로부터 받고 있었으나 항복을 하기 위해 찿아온 을지문덕을 선뜻 죽일 수가 없었다.
회담 후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붙잡으려 했으나 위무사로 나와 있던 수나라 상서 우승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놓아주곤 말았다. 그런데 막상 을지문덕이 자기 진영을 떠나자 우문중은 생각이 바뀌어 군사를 이끌고 을지문덕을 추격한다.
이 과정에서 우문술과 우문중은 서로 의견이 달라 마찰을 빚었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나 우문중은 추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중문은 어떻게던지 양광에게 승전보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양광이 우중문을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술은 우중문에게 밀려 을지문덕 추격전에 동참하게 된다.
수나라 뱔동대는 압록수(지금의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곱번이나 고구려군과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을지문덕의 계략이었다. 을지문덕은 자신을 놓아준 우문중이 반드시 후회하고 추격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곳곳에 고구려군을 매복하였다가 싸우다가 도망하는 척하여 내륙 깊숙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끌여들였다.
을지문덕의 계략을 알리 없는 우문중과 우문술은 어느듯 살수를 건넜다. 그리고 평양성을 30리 두고 진을 쳤다. 이 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사람을 보내 시를 한 편 전달했는데, 흔히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로 일려진 이 시의 문구는 아래와 같다.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다.
전장에 이겨 그 공이 높으니
족함을 알고 돌아가는 것이 어떠리"
이 시를 보낸 후에 을지문덕은 다시 우문술에게 부하를 시켜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고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왕을 모시고 예방하겠다.' 고 하였다. 그러자 우문술은 수하 병력이 피로에 지쳐 더 이상 진군할 수가 없으며, 군량도 바닥나고,설사 진군하여 평양성에 당도한다 해도 쉽게 평양성을 함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회군을 시작했다.
살수 대첩(薩水大捷)은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살수에서의 전투이다.
살수 대첩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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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고구려 | 수 | ||
지휘관 | |||
을지문덕 | 우중문 우문술 조효재 위문승 장근 형원항 설세웅 신세웅† | ||
병력 | |||
기록 없음 | 305,000명 | ||
피해 상황 | |||
기록 없음 | 302,300명(지휘관 중에 신세웅 사망 및 신세웅의 8군 절멸) |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가 전략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내통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알고 612년 1월 113만 3800명( 보급병 등의 기타 병력을 포함하면 총 200만명에서 400만명 정도이다. )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하루 1군(軍)씩 보내 40일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 리에 뻗쳤다 한다. 육군은 요동성(遼東城)으로,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平壤)성으로 향하였다.
그해 4월에는 요하를 건너 별대(別隊)는 양제의 지휘하에 고구려의 요새인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성군은 힘써 싸웠으므로 수군은 조급해져서 다시 별동대 30만 5천 명을 압록수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거짓 항복하여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허실을 보았는데, 적장 우중문(于仲文)은 을지문덕을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유사룡(劉士龍)의 말을 듣고 돌려보냈다. 돌아온 을지문덕은 청야 작전으로 대응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宇文述)은 후회하고 압록수를 건너 쳐들어올 때, 을지문덕은 하루에 적과 7전(戰)하였으나 계속 거짓으로 패하였다.
적장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속은 것을 모르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지점에까지 밀려왔다.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희롱하는 시를 써서 보내니, 수나라군이 비로소 꼬임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피로와 군량 부족으로 수나라군이 후퇴하자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이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우문술이 회군을 시작하자 그때부터 고구려군은 파상적인 작전을 펼치며 사방에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우문술은 부하들을 재촉하여 어느듯 살수에 이러렀다. 그들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갑자기 살수의 물이 불어나면서 급류로 변하였고 강을 건너던 수나라 병사들은 대부분 수장되고 있을 즈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미쳐 건너지 못한 수나라 군사를 공격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기에 바빴고 고구려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우문술의 30만 5천 대군은 대부분 전멸하고 2천 7백 명만 겨우 살아 도주하였다. 이로써 수나라 선봉부대는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수나라군이 살수에 다다랐을 때에는 물이 얕았다. 을지문덕이 둑을 쌓아 물의 흐름을 막았기 때문이다. 수나라군은 이를 알지 못하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하였다. 수나라군은 물에 휩쓸리고 뒤이어 공격해 온 고구려 기병에 당해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 등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남은 자들도 살아남기 위해 요동 반도까지 도망가야 했다. 30만 5천 중 생존자는 2700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특히 신세웅 장군이 이끄는 제 8군은 지휘관인 신세웅 장군을 비롯하여 단 한 명조차 생존자가 없이 모두 전멸되었다.
또한 살아남은 장병들은 우문술과 우중문을 비롯하여 설세웅을 제외한 모든 장병들의 작위가 박탈되었다. 단, 설세웅만은 갑옷을 고구려군에게 벗어 던지고 종횡무진 활약한 점을 감안하여 작위만은 유지했다.
우문술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발해에서 진을 치고 있던 내호아는 즉시 퇴각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우문술은 자신의 부장 신세웅(辛世雄)과 그가 이끄는 8군이 모두 전사하였으며 우문술의 전군 대부분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하며 요동으로 돌아간 적의 숫자는 2700명에 불과하여 수 양제는 이러한 전과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을지문덕을 놓아준 유사룡을 참수하고 수나라의 지휘관들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포함하여 대부분 패배의 책임을 물어 쇠사슬로 포박지어 압송되었지만, 유독 우문술의 부장 설세웅(薛世雄)만은 갑옷이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벗어던지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하여 면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남은 군사에 상관없이 수나라 군은 8개월 만에 퇴각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제3차 침입, 요동성과 신성의 싸움
수나라 제3차 침입은 613년 4월에 있었다.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끝난 지 4개월 후인 613년 3월, 수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침략함으로써 제3차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수나라 군의 무기는 부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또한 요동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때 양광은 우문술을 다시 대장군에 복직시켜 함께 우군에 편성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고, 좌군은 대장군 왕인공으로 하여금 부여를 경유하여 평양성 북쪽에 있는 신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그는 신성을 깨뜨리면 평양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요동성과 신성을 공격하였으나 좀처럼 두 성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양광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1백만 개의 흙포대를 동원하여 요동성 보다 더 높게 흙벽을 쌓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보다 높은, 바퀴가 여덟 개 달린 수레를 만들어 요동성 안으로 활을 쏘게 하였다.
양광의 이같은 방법은 성안의 고구려군을 위축시키기는 하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양광은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음을 알고 계속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수나라 장안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그때 수나라 내부에선 권신 양소(楊素)의 아들로 예부상서인 양현감(楊玄感)이 군량을 수송하다가 농민들의 반기가 확산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평소부터 양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터라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반란에는 이밀(李密), 내호아(來護兒), 배온, 주라후(周羅候)의 아들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반란군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 받던 병부상서 곡사정(斛斯政)은 자신의 행동이 발각될까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수나라군 내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병부상서 곡사정이 고구려로 가자 이 때문에 양광은 그날 밤 즉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뒤에 고구려군은 혹 적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섣불리 성문을 열지는 않았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이 철수했음을 알고 급히 군사를 동원하여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본대는 이미 사정권을 벗어났으나 후미 수천 명을 살상하는데 그쳤다.
제4차 침입, 비사성 싸움과 화친조약
수나라의 제4차 침입은 614년 7월에 시작되었다. 양광은 그해 2월 군사를 징집하여 전쟁 준비를 한 다음, 7월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수나라 선봉장은 내호아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전진 기지인 요동반도 끝단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비사성을 공략하였고, 고구려군은 유인전을 펼치며 그들을 저지하다가 오히려 패하고 만다. 내호아는 그 기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진군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때 영양왕은 양광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당시 수나라 군사는 전의를 상실한데다가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내정이 어지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양광은 기꺼이 화친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수나라의 제4차 침입은 비사성 싸움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수 양제는 양현감의 난은 진압했으나 국내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수나라는 도적이 들끓고, 지방에서는 통제력이 약해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늘어났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한 징병령에도 소집에 불응하는 자가 많았다. 수나라군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을 통해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유일한 통로인 서문(西門)을 봉쇄하여 항전하자 함락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공을 잘 막아 내었으나, 국력이 심하게 소진되어 수나라와의 화친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명목적인 항복 의사를 전하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던 수나라 병부상서 곡사정을 묶어 양제에게 보냈다. 양제는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받아들이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수 전쟁을 끝났다.
이 전쟁으로 수나라는 많은 국력을 소진하였고, 이것이 지방에서의 반란과 중앙 세력의 약화로 이어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양광은 몇 번에 걸쳐 또다시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영양왕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와서 자신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영양왕은 그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당시 수나라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수나라의 내막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양견과 양광이 무려 네 차례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는 바람에 수나라 경제는 피패해졌고, 곳곳에서 반란이 잇따랐던 것이다. 611년에 일어난 왕박의 농민반란, 613년에는 귀족 양현감이 1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농민군이 합세하자 수나라는 점점 깊은 혼란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농민군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617년에는 와강채(지금의 하남성 골현)을 점령했으며, 그해 태원의 귀족 이연이 세력을 형성하여 반란군에 합세했다. 결국 618년 봄에 양광은 강도에서 피살되었으며, 이로써 수 왕조는 몰락하고 당나라가 일어섰다.
고구려 또한 흐트러진 국내 사정을 바로잡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수나라 이후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에 호의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당나라 또한 피폐해진 국내를 바로 잡아야 했기에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고,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경관(京觀)을 허문일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화 제국하의 질서를 원했던 당 태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당 태종은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보내 첩보 활동을 명령하였다. 이처럼 당나라의 침략 의도가 분명해졌음에도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영류왕의 태도와 그의 지나친 친당 정책에 반발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연개소문은 대당강경책을 주장해 고구려와 당 사이의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고, 결국 고구려-수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 만에 다시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국력을 신장시키다가 618년 9월 생을 마감하였다.
영양왕은 한 명의 왕후에게서 한 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아들 '환치'에 대해서는 이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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