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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0 : 고구려 역사 33 (제27대 영류왕) 본문
한국의 역사 50 : 고구려 역사 33 (제27대 영류왕)
제27대 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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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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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영류왕(榮留王, ? ~ 642년)은 고구려의 제27대 왕(재위 : 618년 ~ 642년)이다. 휘는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 한다. 영류왕은 평원왕의 둘째 아들이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던 도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에게 시해되고 만다.
즉위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618년 음력 9월에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618년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 왕조를 일으킨 당 고조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내적으로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고구려에서는 일단 당나라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여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만들어갔다.
대외 관계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고구려와 당나라는 고수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서로 교류를 하였다.
626년 이세민이 황태자 이건성을 살해하고, 당 고조에게 압력을 가하여 선위 형식을 통해 제위를 찬탈해 태종으로 등극하였다.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곧 주변 나라들에 압박을 가하면서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다. 그래서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가 당나라에게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말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백제, 신라와 화친 관계를 맺을 것을 종용하였다. 영류왕은 당 태종의 요구를 받아들여 백제, 신라와 화친하였다.
신라와의 전쟁
당나라는 628년에 마지막 남은 군벌 세력 및 서돌궐을 제거하고 통일 작업을 완수하였다. 이렇듯 당나라의 성장을 당나라와 가까운 고구려는 염려하였고, 반대로 당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라는 당나라를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진평왕은 당나라가 내부 통일을 완수하면 필시 고구려를 칠 것이라 판단하고, 그 때문에 고구려는 한반도 쪽 변경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629년에 김유신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여 동쪽 경계 지역인 낭비성(娘臂城)을 탈취하였다. 고구려는 몇 번에 걸쳐 반격을 가했지만 당나라의 침입을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재위 14년인 631년부터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인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는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업을 지속하였다. 천리장성은 646년에 완성되었는데 완공까지 16년이 걸렸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장수 알천에게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당 관계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했고, 온건파는 왕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것을 주장했다.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에게 손을 들어주어 640년 왕태자 고환권(高桓權)을 장안에 보냈다. 그리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 문제로 강경파와 온건파는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요수로부터 평양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죽음
한편,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입지가 좁아질수록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하고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까지 중단하자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642년 음력 10월에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다.
그런 다음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의 아들인 보장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가족 관계
동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BC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8~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해우).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8~53) (53~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0~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3)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8~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현재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대포장한 것에서 부터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고구려 전성기
BC 2333년 고조선 건국
BC 108년 고조선 멸망.
BC 37년 부여의 왕족 주몽, 남하하여 졸본에서 고구려건국
BC 18년 주몽의 아들 온조(소서노와의 아들) 백제건국
003년 유리왕(주몽의 첫째부인 아들) 압록강 국내성으로 천도.
022년 고구려, 부여 공격 대소왕 전사.
242년 고구려, 요동의 서안평 공격
313년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91년 광개토왕 즉위, 백제공격
400년 광개토왕, 비려 후연 부여 말갈 정복. 내몽고까지 진출. 신라침범 왜구 격퇴.
414년 장수왕 즉위
427년 평양천도, 한강유역 정복
433년 백제-신라 동맹
475년 고구려, 백제공격 백제 웅진천도
554년 백제-신라 동맹 결렬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 아차성에서 전사
598년 수나라와 1차전쟁 승리, 고구려 강이식 요서선제공격, 수문제 30만 대군궤멸.
612년 수나라와 2차전쟁 승리, 수양제 요동성,평양성,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 패퇴
613년 수나라와 3차전쟁 승리
618년 수나라와 4차전쟁 승리, 수나라 멸망시킴
618년 이세민 당나라 건국, 고구려-당 우호관계맺음
630년 부여성-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고건무 죽이고 쿠데타, 대당 강경노선으로 급선회.
642년 연개소문, 신라 김춘추를 사로잡아 감금하고 신라공격.
645년 당나라와 1차전쟁 승리, 요동성전투 연개소문. 안시성전투 양만춘.
647년 당나라와 2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당나라와 3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신라-당나라 연합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 백제 멸망시킴
661년 당나라군 평양성 포위했으나 패퇴.
666년 연개소문 병사. 세아들 내분. 남생 당에 투항, 남건 설인귀에 대패.
668년 당나라군, 안시성 부여성 함락. 신라 문무왕 평양성 함락. 고구려 패망.
669년 압록강 이북 32개성 당나라와 계속 전쟁 - 검모잠등
676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말갈과 연합 고구려부흥운동 실패.
696년 거란 이진충 반란, 북경포위 측천무후와 전투끝에 패퇴.
696년 걸사비우,대걸중상,대조영 이해고의 당나라군과 격전, 요동에서 당축출. 걸사비우 전사.
698년 대조영, 진국이라 칭하고 건국. 송화강 연해주까지 정벌.
713년 당나라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칭하며 화친 제의, 대조영은 고려국왕 연호사용
719년 대조영 죽음.
732년 고려국(발해) 무왕 당나라 산동반도 공격.
733년 신라-당 연합군 고려국(발해)공격, 발해-돌궐-일본과 동맹. 나-당에 대항.
907년 당나라 멸망.
926년 고려국(발해) 멸망.
935년 신라 멸망.
제27대 영류왕 실록
(?~642, 재위: 서기618 9월~642년 10월,24년 1개월)
온건주의자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반정
영류왕은 평원왕과 그의 둘째 왕후 사이에 태어났으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이름은 '성'이다. 서기 618년 9월에 양양왕이 후사없이 죽자 고구려 27대 왕에 올랐다.
영류왕이 즉위하기 6개월 전인 618년 3월에 중국에서는 수 왕조가 몰락하고 당 왕조를 비롯한 할거정권이 성립됐다. 당 왕조를 일으킨 이연(고조)은 황하 동쪽의 태원 귀족이며, 수나라 말기에는 태원의 유수로 있던 인물이다. 그는 당을 건립한 이후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군벌들을 제거하고 통일작업을 지속한다.
이연은 이처럼 내적으로는 통일작업을 지속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이연이 당 왕조를 건립하자마자 고구려에 손을 내민 것은 후방을 안정시켜 통일작업을 지속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일단 이연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였지만, 한편에선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양류왕은 한반도 쪽 백제와 신라의 위협이 상존하는바, 중국 쪽과의 전쟁은 위험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일축했다.
영류왕은 온건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정쟁에서 발생한 포로들을 교환하기에 이른다. 622년에 이뤄진 이 포로교환협상의 결과로 양쪽에 잡혀 있던 포로 2만명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624년 2월에는 당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던 도교가 도입되고, 이듬해에는 불경과 노자의 교리가 전래되어 고구려와 당 사이에 문화적 교류도 이뤄진다.
그런데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내분이 발생하여 이연의 여러 아들 중 당의 건립에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은 차남인 이세민(태종)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장자인 이건성을 태자로 세웠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세민은 건성을 폐하고 자신을 태자로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연은 세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세민으로부터 태자 건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과 형 건성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마침내 626년에 이르러 무력충돌로 이어진다.
626년 6월. 이세민은 소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게 된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경우와 비슷한 경우이다. 자신의 심복들을 궁성 옆 호숫가에 잠입시켜 태자 건성과 동생을 살해하고, 이연에게 압력을 가하여 선위 형식을 통해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렇게 하여 당은 야심만만한 이세민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에 따라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게 된다.
이세민이 왕위에 오르자 곧 영토확장작업을 가속하는 한편 주변국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외교적 우위를 확보한다. 이 결과 고구려,백제,신라가 당과 화친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의 사신이 당나라에 '고구려가 길을 막고 귀국의 예방을 못하게 한다'고 말하자,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신라와 화친할 것을 종용한다. 영류왕은 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백제와 화친하겠다는 답서를 당나라 조정에 보낸다.
이처럼 동방의 세 나라에 대해 종주국 행세를 하던 당은 628년에 마지막 남은 군벌세력을 제거하고 통일작업을 완수한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양사도 무리는 돌궐(터키)에 의지하였는데, 이 해에 양사도는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서돌궐은 추장이 포로로 잡히자 당에 항복하였다.
이렇듯 당이 수나라에 이어 강력한 대국으로 떠오르자 고구려는 당의 침입을 염려하였고, 반대로 당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이용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신라의 팽창정책을 이끌고 있던 진평왕과 김유신은 당이 통일 작업을 완성한 후에 필시 고구려를 침공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가 한반도 변경에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629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낭비성을 함락시킨다. 이에 고구려는 몇 번이나 반격을 가하지만 당의 침입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공략에 나서지 못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군사를 요동에 집중시키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자 하였다. 이 장성 계획은 국상격인 대대로에 올라있던 서부대인 연태조가 주도하였고, 축성 작업은 631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는 지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대업을 이어받아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 무렵, 한반도 고구려군이 신라 변경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여 1개월간의 싸움 끝에 신라 장군 알찬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러는 사이 당은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태자를 입조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 조정은 강온파가 나누어져 설전을 벌였다. 강경파는 더 이상 당나라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며 태자의 당나라 입조를 반대한 반면, 온건파는 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류왕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640년 2월 태자 환권을 장안에 보냈다. 같이 편지를 보내 태자를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도 요청하였다.
영류왕이 온건파를 지지하자 강경파의 입지는 좁아졌다. 그런데 641년 당에서 직방 낭중 진대덕을 보내 태자의 예방에 답방하겠다는 서한이 도착하였다. 이에 강온파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된다.
강경파는 진대덕이 낭중의 벼슬에 있는 자로 병법에 능하며 지리에 밝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입국시킬 경우 반드시 후환이 생길 것으로 주장하였다. 당이 진대덕을 보내는 이유는 고구려 지리를 파악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류왕은 강경파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영류왕은 친당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진대덕이 오는 도중 여러 성을 구경하게 해 달라는 요청도 허락했다. 이에 진대덕은 요수로부터 평양성에 이르는 길목을 샅샅이 살펴 고구려의 지리를 익히는 한편,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히 조사하였다. 귀국한 진대덕은 당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게 된다.
진대덕이 다녀간 뒤에 고구려 조정에서는 강경파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불거져나오기 시작하였다.적국에 태자를 입조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적국 장수에게 지리를 익히도록 길을 열어주었으니 강경파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류왕과 온건파는 급기야 축성작업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축성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연개소문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하여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642년 10월에 잔치를 마련하여 그들 신하들을 대거 초청하였다. 그리고 수하부대를 사열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집결시킨 뒤 이를 참관하던 대신들을 모두 참살하였다. 또한 거사에 성공하자 군사를 이끌고 장안성으로 가서 영류왕을 포박하여 죽였다. 당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애도의식을 거행하고 고구려에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였다.
영류왕은 한 명의 왕후에게서 태자 환권을 얻었다. 그런데 왕후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환권에 대해서는 당나라에 입조하여 국학에 입학하였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하지만 642년 10월 영류왕이 연개소문 반정에 살해 당할 시 그도 함께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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