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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7

두바퀴인생 2010. 9. 1. 11:19

 

 

 

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7

 

이민족을 포용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이야기...  

 

 

                    

                                                                  고대 카르타고 수도 모습

 

 

 

* 카르타고 멸망: 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기원전 146년)


 로마 원로원의 '대카토'는 '스키피오'를 실각시킨뒤 능숙한 웅변술과 연설로 청중을 압도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원로원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집요한 반대운동으로 카르타고의 궤멸을 꿈꾸어온 사람이다. 즉 그는 온건노선을 반대해온 사람으로 패전국에 대하여 강력한 조치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와 체결한 강화조약 내용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카르타고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카르타고는 인접의 누미디아 왕국의 침략을 예상하고 로마의 승인도 없이 용병 6만명을 모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마 원로원이 현지를 내려와서 양국간에 중재를 했으나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수도 근방 90키로미터 까지 용병부대를 진군시키는 사태가 발생되자 로마 원로원이 격분했다. 카르타고는 강화조약을 위반하게 되었고 누미디아를 침략한 용병부대도 누미디아군에게 패배해 버렸다. 로마 원로원의 조사단과 감독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용병을 해체하고 해당 지휘관을 처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지지부진 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반란사건으로 신경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물론 '대카도'의 영향이 절대적인 원로원이 사건 수습을 위하여 �아온 30명의 카르타고 대표 사절에게 지금의 해안가 수도를 파괴하고 내륙으로 15키로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주민 전원이 이주하여 수도를 옮기도록 요구했다. 그당시 내륙 15키로미터는 비옥한 토지가 펼쳐진 지역으로 로마나 다른 도시들도 내륙에 위치한 도시들이 많았기에 로마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요구했으나 '대카토'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카토'의 심중에는 카르타고의 반대를 예상하였는지도 모른다. 일국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엄청난 재원의 낭비이며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도 쉽지 않다. 카르타고 사절로 로마를 방문하고 있던 카르타고 대표 30명은 로마 요구에 대하여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원로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대표들은 귀국 도중 일부는 도망고 나머지는 카르타고에 도착했다.이 소식을 알게 된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다.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과 로마에 대한 저항으로 번지면서 대표들이 살해되고 일부는 도망을 갔다. 수도 카르타고 전주민은 로마에 대한 항전을 준비했다. 흩어졌던 용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5만명 이상의 수도 주민이 로마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원 항전태세에 들어갔다.

 

 

*  수도 카르타고 함락과 멸망

 

튀니스만의 서쪽에 불쑥 튀어나온 곶의 끝을 차지하고 있는 수도 카르타고 시가지는 천연의 요충지로 삼면이 바다이며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동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육지와 연결된 서쪽은 높이 14미터 폭이 10미터나 되는 성벽이 3겹으로 세워져 있어 공격이 거의 불가한 요새지형이었다. 오로지 남쪽 항구로 접안이 가능하여 공격로는 남쪽 항구 방향 뿐이었다.

 

카르타고 전경

                                                                * 오늘날 튀니지아 도시모습(출처:튀니지 관광청)

 

 

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카르타고 유적
 

* 카르타고 유적(출처:세계 도시 유적지 시이트)

 

로마군 총사령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의 양손자이기도 한 38세의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 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가 세상을 떠난지 46년후인 기원전 146년. 로마 원로원의 지침을 받은 사령관은 농성 3년째 카르타고 수도를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저항도 강하였지만 지형적으로 공격하기에 어려운 요새도시라 로마군도 섣불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로마군 포로를 성벽위에 올려 놓고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며 전원 옥쇄를 다짐하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그리스 동맹도시 중 반란을 획책한 '크란트'를 점령한 후에 도시 전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은 전원 노예로  전락시키고 전 도시의 건물은 모두 파괴하였으며 땅은 가래로 갈아 소금을 뿌리는 방법으로 초토화시킨 적이 있었다. 전 그리스 동맹도시들에 대한 경고였다. 지금까지 로마가 이렇게 한 적은 없었으나 배신행위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강조한 로마 원로원의 제1인자인 '대카토'의 방침에 따른 행동이었다. 수도 카르타고에 대한 조치도 그리스 동맹도시 '크란트'와 똑 같은 방법으로 조치하도록 총사령관은 지시를 받고 있었다.

 

공격은 해안쪽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군선이 항구앞 해안을 봉쇄하고 병사들이 방파제를 쌓아 출입을 완전 봉쇄한 다음, 로마군이 상륙하여 공격했다. 건물들이 불타고 카르타고 주민들이 결사항쟁하였으나 도시건물이 하나하나 로마군 수중에 떨어지면서 도시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로마군 사령관은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카르타고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카르타고가 이렇게 멸망하듯이 언젠가는 로마도 이렇게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도시함락 작전은 일주일간이나 시가전이 계속된 뒤에 완전 함락되었다. 도시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주민들은 대부분 살륙되었고 그중에도 살아남은 사람은 전원 노예로 전락했다. 땅을 갈고 소금을 뿌려 다시는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후 '율리어스 시이저'가 수도 카르타고시를 다시 복원할때까지 그땅은 죽음의 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5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지중해의 재해권을 휘어잡고 해상왕국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카르타고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카르타고 [Carthago]
요약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
본문
한니발석상 /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 타니트와 남신()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실제인원은 104명), 시민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 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제1차(BC 264∼BC 241)는 시칠리아에 있는 영토와 제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시칠리아를 주전장()으로 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제2차(BC 218∼BC 201)는 에스파냐에서 멀리 이탈리아로 진격, 한니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자마전투에서 로마의 대()스키피오에게 패배하여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제3차(BC 149∼BC 146)에서는 로마의 장군 소()스키피오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카르타고도 멸망하였다. 그 후 카르타고의 영역은 전부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로 전락하였으나, 카르타고의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수사학()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카르타고 연혁(출처: 네이브 백과사전)

 

 

*포에니 전쟁, 한니발, 그리고 스키피오

 

한니발 전쟁은 기존 지중해의 최대 강대국이던 카르타고와 당시 융성하던 로마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한 패권싸움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남부에 위치한 당시 최강의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시라쿠사'가 시칠리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메시나' 도시국가를 위협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반도를 바로 코 앞에 둔 메시나를 로마가 지원하지 않을 시 시라쿠사나 카르타고에게 넘겨주는 것은 로마로써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였기에 메시나 지원을 민회와 원로원이 결정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 대적하는 시칠리아 전투를 시작으로 제1차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23년 동안 계속된다.

 

수 차례의 육지전과 해전을 통하여 당대 최강의 카르타고 해군이 3단층 겔러리선 한 척 제대로 없었던 급조된 로마해군에게 연전연패 하게 된다. 로마는 동맹도시들의 신속한 지원과 창의적인 노력으로 수 차에 걸쳐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하게 된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로마군에게 군선 수백 척과 병력 수만 명이 수장되는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은 오로지 태풍이었지만, 로마는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이는 로마라는 한 국가의 재생능력이 아닌 그들을 점령하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대접해 준 동맹도시들의 자발적인 지원에 의한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제1차 전쟁의 결과는 로마의 승리로 강화가 성립되면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로마령으로 귀속된다. 전쟁 후기에 나타난 카르타고의 유력자이며 장수인 '하밀카르(한니발의 아버지)'가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에게 당한 카르타고의 치욕을 9살배기 자신의 자식에게 강하게 심어준 결과  그후 25년후인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하밀카르는 자식 교육 하나는 잘 시켰던 것 같다. 장남 한니발을 포함한 그의 아들 3형제가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차남 '하스두루발'과 3남 '마고네'가 각각 이탈리아 북부전선과 제노바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중상으로 사망하였다. 한니발은 마지막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에게 패한  이후 로마의 배려로 면죄부를 받아 카르타고 재건에 힘쓰지만 반대파의 고발로 결국 조국을 떠나 망명하게 되는 데, 3형제는 결국 아버지의 유업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두 동생은 목숨을 잃고 형인 한니발은 조국을 떠나 시리아로 망명하는 비운의 장군이 된다. 이 얼마나 자식 교육이 잘 이루어진 것인가! 한 가문의 온 가족이 오로지 로마타도에 일생을 바치고 목숨을 잃었지만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있다.

 

한니발은 에스파냐 총독으로 이주한 아버지 '하밀카르' 따라 식민지 수도인 '카르타헤나'에서 자라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 대왕의 업적에 심취하여 그의 전략.전술에 매료된다. 아버지 하밀카르 총독이 에스파냐 식민지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원주민과 전투 중에 갑자기 죽게되자, 사위인 하스두루발이 뒤를 이어 에스파냐 총독에 임명되어 통치하다 수년 후 집안 노예에게 암살되었다. 그래서 당시 26세인 한니발이 카르타고 정부의 만장일치로 후임 총독에 임명되어 '에브로' 강 이남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한니발은 이탈리아 침공을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하게 된다. 그 방법으로 한니발은 로마 동맹도시인 '사군토'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에 로마는 수 차례 회담이 실패되자 카르타고와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는 한니발의 계산된 수순이었다는 점이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다.

 

2천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사전문가들이 '스키피오'는 잘 몰라도 '한니발'은 잘 안다. 왜 그럴까?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알프스를 넘었고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소수의 군대로 상대적으로 많은 로마군을 다양한 진형을 구사한 포위섬멸작전으로 연전연승하면서, 10만명이상의 로마군 병력을 섬멸시켰고 로마 집정관 10명 이상을 전사시켜 전 이탈리아 반도를 공포에 떨게 하였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이 어쩌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짖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나, 당시 그는 전략적으로 그 길 밖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로마군이 상상하지 못하던 전략.전술로 포위섬멸전술의 신기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니발은 전술면에서는 완벽한 승리였으나 전략면에서는 실패하였다. 그는 로마연합의 해체를 꿈꾸었으나 로마연합의 도시국가들은 한니발의 기대를 져버렸던 것이었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에 대한 침공으로 카르타고가 위기에 처하자, 한니발은 본국의 귀국 명령에 따라 16년만에 이탈리아에서 배를타고 철수하면서 수평선 아득히 '헤라 신전'이 사라질때까지 말 없이 응시하던 한니발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한니발은 진정 누구를 위한 전쟁을 하였던 것일까? 아버지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 가문의 복수이었던가? 아니면 카르타고의 지중해 세계의 제패를 꿈꾸었던가? 그는 본국의 지원 없이 16년 동안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과 전쟁을 치렀다. 수만 명의 병사들 군량미와 용병의 급여는 어떻게 조달하였을까? 충분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제때에 지급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느 한 병사도 한니발을 버리고 떠난 병사가 없었다고 한다. 항상 엄숙하고 말이 없으며 밤낮없이 일을 처리하고 식사도 병사와 똑 같이 하며, 잠도 나무 밑에서 병사의 망토를 덮고 잠을 자던 장군! 병사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한니발 장군에게 바치고 싶어하며 그를 따랐다는 데 그는 과연 어찌하였기에 병사들이 그토록 그를 따랐을까? 오늘날 군인이라면 한번 쯤 생각해 볼 가치가 있으며 난 지금도 그 장군의 부하관리와 용병술에 대하여 의문을 떨칠 수가 없음은 사실이다.

 

자마전투는 한니발의 운명을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로마의 젊은 장수인 스키피오에게 일생에 단 한번의 패배를 하게 된다. 자마전투 하루 전 회담시 한니발은 그의 말속에 이미 전투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마전투가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의 운명도 결정 짖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승리하면  4만명의 로마군 목숨과 전리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래도 로마는 또 군대를 보내 카르타고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패배하면 5만명의 카르타고 병사와 자신의 목숨은 물론 카르타고는 멸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그의 장기인 기병전력이 부족했지만 80마리의 코끼리와 1만5천의 정예병력으로 대비는 하였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융통성과 창의적인 전술은 스키피오를 단순히 로마인으로 생각한 한니발에게 패전의 쓰라린 결과를 초래한다.

 

상호 강화가 성립되어  카르타고는 로마 동맹국으로 존속하게 되고 한니발이 국정을 맡아 경재재건에 힘쓰나 엄격한 그의 언행에 6년동안 참아온 카르타고인들이 그를 고발하게 된다. 그 고발내용은 시리아와 한니발이 연계하여 로마타도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그 고발은 어쩌면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시리아로 망명했으며 시리아 왕과 로마타도의 원대한 작전까지 구상하였으니까! 희대의 영웅을 배출한 카르타고인은 그들의 영웅이던 한니발을 버렸다. 스키피오도 똑 같이 로마 원로원의 탄핵을 받는다. 스키피오는 어쩌면 한니발 장군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카르타고와 강화조약 내용도 그렇고 강화후에도 한니발의 신상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 로마인은 과연 대단한 민족이었던 것 같다. 원로원도 한니발의 신상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나로써도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10만의 로마군을 섬멸시켰고 로마군 사령관을 10명이상이나 전사시킨 적장이며 전 로마인을 16년간이나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패전국의 적장을 그냥 놓아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스키피오는 시리아와 회담시 당시 시리아에 있던 한니발과 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 외에 시리아 전투에서 승리 후 강화조약시 한니발은 크레타 섬으로 도망을 갔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위치를 알고도 추격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이것은 바로 로마인의 포용력과 상대를 인정하며 스스로 동화되기를 기다리는 '팍스 로마나'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스키피오는 자신이 한니발로 인해 로마의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전략.전술의 대가인 한니발에 대해서는 군인으로써 또다른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스키피오도 탄핵을 받은 후 나폴리 근방 그의 별장에서 조용히 살다가 지병으로 4년후 기원전 183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같은 해 한니발도 '비타비아' 왕국에서 명예욕에 사로잡힌 어느 로마군 장교가 비타비아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인도 요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니발은 더이상 도피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치욕스런 죽음보다 명에로운 죽음을 선택하였는데, 스스로 지니고 있던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끓었던 것이다. 향년 64세였다. 두 장수는 저승길에서 만나 자신들을 버린 조국에 대해서 서로 욕하면서 진정어린 형님.아우가 되어 가던 길에 어느 주막에서 만취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시대의 영웅들이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 또 다른 영웅이 탄생했다. 시대와 운이 맞아 떨어진 사람들 이랄까? 시이저가 그랬고,옥타바아누스,안토니우스,징기스 칸,나폴레옹,웰링톤,히틀러,구데리안,이이젠하우어,패턴,롬멜,맥아더 등등이 그랬다.

 

그로부터 약 50년후 제3차 전쟁이 발발하는데, 누미디아 왕이 야금 야금 카르타고 영역을 침범하였던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 협약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누미디아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고 이웃나라 누미디아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로마 원로원이 현지에 나와서 조사를 벌이고 약속을 어긴 것으로 판명되자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에게 수도를 내륙으로 15킬로미터 이전하도록 요구하였다. 수도를 이전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으로 카르타고 조정은 로마 원로원의 수도 이전 요구에 반기를 들고 로마와 항쟁하다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로마군이 3년 이상의 포위공격으로 결국 수도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점령되어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주민은 살륙되고 그중 살아 남은 주민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 도시는 가래로 갈아 소금을 뿌리고 황무지로 변하게 하였다. 그래서 제3차 포에니 전쟁도 막을 내린다. 그후 율리어스 시이저가 카르타고 도시를 재건 복구할때까지 카르타고는 소금이 뿌려진 황무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로마정신이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로마가 천년 이상 강대국으로 자리메김 한 데는 로마정신이 존재하였다.

주변을 포용하고 인정해주는 관용이다. 그리고 정의와 평등, 신뢰와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신뢰와 약속이 생명이며 약속을 져버린 나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응징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로마에 반기를 든 그리스의  도시 '크란트', 한니발에게 빌붙었던 도시 '카푸아', 약속을 져버린 카르타고 수도에 대해서 로마는 재점령 후 모든 건물은 파괴하고 지도층은 참수하는 한편 주민들은 전원 노예로 만들었으며 땅을 쟁기로 갈아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었다. 전투에 패전한 장수를 다시 기용하는 관용과 여유는 물론 로마 시민이라면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점령지에 대한 문화와 풍속,종교를 인정하고 자치제를 허용하였으며 일체의 착취를 금하고 생산물의 10%만 세금으로 징수하였으며 유사시에는 병력 동원의 책임만 부여하였다. 가진자와 지도층은 유사시 스스로 가산을 털어 군비에 보탰고 지도층인 원로원 의원들이 전쟁터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직접 참가하여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집정관들이 스스로 전투에서 앞장서서 임하는 자세와 원로원을 포함한 가진자들이 스스로 중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칸나전투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 80명이 중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것은 로마가 천년 이상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우뚝서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과거 중동전 발발시 조국의 위기에 학업을 전폐하고 조국 이스라엘로 달려 간 이스라엘 젊은이들과 소집을 피해 도망가는 아랍 젊은이들 이야기를 우리들은 웃으면서 들었고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이 아랍의 젊은이들을 보고 웃었지만 오늘날 우리들 젊은이들도 유사시에는 누구를 닮은 행동을 할 지 의문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시 영국의 왕족을 포함한 귀족들이 앞장서서 전장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나, 독일 귀족들이 전장터에서 앞장서서 진두지휘하였던 사실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가진자나 귀족 권력층이 평시에 누리던 혜택은 국가가 제공해 준 것으로 생각했고 유사시에는 앞장서서 전장터로 달려 갔다는 점이다. 권력과 부를 가진자들이 국가 위기시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지 못하는 민족은 결코 역사속에 오래 남을 수 없다. 권력층과 가진자들이 자신은 물론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모들이 존재하는 한 그 나라는 오로지 용병으로 로마와 전쟁을 치루다 멸망한 카르타고와 무엇이 다르리오!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우리는 배는 부르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조선이 일제에 멸망하고 36년간 일제치하에서 노예같은 생활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정치체제가 다른 두 강대국에 의해 반토막 나 버렸다. 북한 공산집단의 적화통일을 위한 침공으로 대리전인 한국 전쟁을 치루었고 초토화된 이 땅에서 미국의 원조로 배고픔을 달래며 혁명과 민주화를 거치면서 이억만리 바다 건너 동맹국인 미국의 핵우산 아래 오늘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반도의 반쪽 외딴 섬같은 땅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반백년을 맞이했다. 굶주림에 아우성치던 시절이 엇그제 같은데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배부름에 비만을 고민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갑자기 출세한 졸부같은 정신이 팽배해진 상태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면에서 갈등과 편가르기로 일관하고 있고 곳곳마다 부패와 비리가 난무하고 있다. 시대정신은 전무하고 역사는 망각한 채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추구하는 교육실태와 권력.출세지향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정치는 여.야,  좌파.우파로 나누어져 국론이 분열되고 뒷걸음치고 있으며 경제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는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문화는 역사를 잊고 영혼도 없는 막장 예술이 판을 치고 있다. 안보는 이미 실종되었고 군을 무시하는 정서가 팽배해진 나라다.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이 군대가기를 거부하고 갖가지 면책사유로 국방의 의무마져 버린 사람들이 판을 치는 나라, 가진자와 지도층은 해외에 별장을 포함한 부동산을 은밀히 구입하여 즐기면서 유사시에는 도피처로 이용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나라다. 

 

경제는 일류이나 정치는 하급이요, 정신은 썩었고 애민은 뒷전이요, 불법과 탈법, 사치와 방종,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백성은 노예와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며 가진자들의 천국이 되어 버렸다. 군복을 저주하고 군부대가 갈 곳을 찿지 못하여 깊은 산속으로 외딴 섬으로 쫒겨나고 있다. 아무리 경제적인 부를 향유하고 소득이 늘어나도 문제는 영혼이 없는 사회, 정신이 없는 민족이 망하지 않고 오래 간 나라는 없다는 점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약소국일 수 밖에 없는 지정학적 불리점을 갖고 있으며 자원과 인력이 반도에 국한되다 보니 주변 강대국에 항상 휘둘리면서 망국의 설움까지 겪었던 나라이다. 그것도 모자라 남북으로 두 동강 난 체 반 백년을 지내면서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 비극인 전쟁을 치루었고 휴전선을 두고 서로 악을 쓰며 국력을 낭비하여 왔다. 핵으로 무장한 북한은 김정일 세습체제를 위해 안감힘을 쓰고 100만이 넘는 인민군을 먹이기 위해 경제는 파국상태이며 탈북자가 줄을 잇고,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북한 여성들이 만주 땅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피멍이 들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붕괴 직전의 저주의 땅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잡다한 피가 섞인 잡종민족이다. 잡종이 나쁜가? 아니다, 유전학적으로 먼 피가 섞이면 섞일수록 지헤롭고 명석한 두뇌의 후세들이 태어나게 되어 있다. 유태인을 보라, 2천년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잡다한 피가 섞여 태어난 후세들이 그들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항상 배우고 나라 되찿기를 도모한 결과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건국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질문과 답변으로 학업을 익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전문분야에 정진하며 나라에서 사회에 첯발을 내딪는 젊은이들에거 수 억원씩 자립 자금을 지원해주는 나라, 기부를 생활화 하고 무상 노력 봉사로 노후에 다시 사회로부터 보호받는 나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진자들이 기꺼이 배려하는 나라, 그래서 유태인들이 세계 금융을 지배하며 월가를 짓주무르고 있으며 세계 노벨상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오랑케 출신이면 어떠한가, 여진족도 기꺼이 백성으로 받아들여 포용했던 세종 대왕의 애민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세종 대왕은 누구보다도 수많은 반대파를 설득하는 지혜는 모든 것이 애민정신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한글창제도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고 그토록 한글창제를 반대하던 신하 최만리를 세종은 설득으로 이해시켰다. 그리고 측우기도 출신을 가리지 않고 천민에서 발탁한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기득권층을 위한 모든 정책은 탐욕과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다민족을 무시하고 천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그들을 우리사회에 포용하라. 그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법을 정비하고 사회적 배려와 보호를 통해 그들의 백성화를 도모하라. 출산율이 최저인 이 나라에서 그들이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살기 힘드니 노숙자와 자살율이 늘어나고 성이 개방되니 미혼모와 낙태가 늘어나는 나라, 돈을 위해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몸을 파는 매춘이 판을 치는 나라, 순결과 고고함은 이미 사라지고 방탕과 유희만 넘쳐나는 나라... 일요일 새벽 강남대로 광란의 클럽에 가보라! 이 나라 젊은이들이 밤을 지새우며 술과 춤으로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도 얼마가지 않아 일본이나 미국의 섹스클럽처럼 클럽에서 남여가 처음 만나 무작위로 섹스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지금도 음성적으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섹스의 자유! 프리 섹스! 이것이 인간의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위가 썩으니 아래도 썩는 것이다.

 

능력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출신,학벌,동향,혈연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니 부패와 비리가 판을 치는 것이다. 법도 썩었지만 법관도 썩었다. 교육도 썩었지만 교육자도 썩었다. 공정하지 못하니 불법이 판을 치고 죄를 돈을 주고 면죄부를 받는 나라이다. 수십 억, 수백 억 해먹은 큰도둑은 살아 나가지만 좀도둑은 잡혀가는 나라, 나라돈은 쌈지돈이요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인 나라가 아닌가...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웃기지 마라! 더러워서 싫고, 힘들어서 싫고, 어려워서 싫고, 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싫고, 보수가 적어서 싫고, 중소기업이라 싫고, 남이 안 알아주는 직업이라 싫고, 멀어서 싫고... 외국인들이 모두 그러한 직업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돈을 벌고 있다. 이상과 꿈을 높게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허상이다. 자존심이 당신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속에 짧은 지식이 대단한 지식처럼 생각하는 대부분의 똑똑한 척 하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최고라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회는 바야흐로 막장드라마 대로 달리고 있다.  당신의 꿈은 연예인이고 성형 미인인가? 미인이나 인기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통상 미인일수록 머리가 빈 경우가 많다. 지혜롭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에만 전념하기 쉽다. 수 많은 남자들의 유혹에 공부할 틈이 없는게 사실이니까! 대궐처럼 넓고 좋은 집에 절세미인을 대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봐야 찰라의 쾌락이며 말초신경의 유희에 불과하다. 나라가 망하면 아무것도 남을 게 없다. 모두 남가일몽이요 일장춘몽이다.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고 신뢰와 믿음이 없는 나라, 비방과 편가르기에 열중하여 명예와 관용이 없는 나라,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영혼과 정신이 없는 나라, 비젼과 꿈이 없고 변화를 두려워 하고 현실에 급급한 나라, 나만 알고 남을 위할 줄 모르는 몰염치한 나라,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가진자만 대접받고 가난한자는 천시받는 나라, 뇌물과 청탁이 판을 치고 눈먼 국가예산 빼먹기 여념이 없는 나라, 정의와 공정함이 사라지고 불의와 불평등이 판을 치는 나라...이런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고 망할 것이며 나라가 망하면 이 땅의 모든 공든 탑은 물거품이 된다. 공리공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무능하던 조선이 망하자 우리민족은 일제치하에서 36년간 국토의 수탈은 물론 몸과 마음까지 다 빼앗기고 노예처럼 살았다. 당신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다시 망국의 길을 가서 영원히 노예처럼 살기를 바라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