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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6

두바퀴인생 2010. 8. 31. 13:45

 

 

 

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6

 

이민족을 포용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이야기...  

 

                    

                                                              고대 카르타고 수도 모습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00년-기원전 187년)

 

* 한니발의 시리아 망명과 사라진 재기의 꿈

 

기원전 200년. 로마 민회와 원로원의 절대적 지지로 젊은 나이에 제1인자 자리에 오른 '스키피오'는 앞으로 15년 동안 로마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축하겸 로마를 방문하였다. 축하는 명분이었고 실제 그들이 의도는 로마의 지원요청이었는데, 그리스의 북쪽 마케도니아 왕국의 침략 행위를 중지시키도록 요청했던 것이었다. 도시국가로 발달한 그리스인들은 제한된 영토와 군사력으로 자신들의 이권투쟁에는 항상 대외세력을 끌여 들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스키피오는 이 문제를 우선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 먼저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와 협상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필립포스는 틈만 나면 주변국을 공략하는 등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자신은 그의 조상 알렉산드 대왕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는 실제 군사적인 능력과 식견도 갖고 있었고 용병술도 뛰어났다. 필립포스는 아테네 근처까지 침략하여 내려왔으나,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으로 하여 파견된 로마군과의 접전에서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로마는 필립포스와 강화를 맺게 된다. 이제 로마군은 스키피오의 융통성 있는 전략.전술이 전 로마 장교들이 숙지하여 실제 전투시에 적용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군은 경직된 장창의 팔랑스 방진형태로 오로지 전방으로 진격하는데는 우수한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측방과 배후 공격에는 취약하였다. 로마군은 지금까지 모든 전투에서 적의 장점을 발견하면 금방 자신들의 장점으로 흡수하는 속도도 빨랐다. 접근전에서 에스파냐의 양날검의 위력은 자마전투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었다.

 

필립포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환대를 받으며 올림피아 축전에도 참가하여 관람하는 등 그리스인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환호하였다. 플라미니우스는 20년전 칸나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한니발에 의하여 그리스로 노예로 팔려간 7천명의 로마군을 찿아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리스 전역에서 모두 1천 200명을 찿아냈다. 그들은 이미 50-60대가 되어 있었고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가족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몸값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분담하기로 하고 그들 노병들과 같이 플라미니우스는 로마로 개선하였다.

 

이무렵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은 패권국이 된 로마를 포함하여,카르타고,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였다. 스키피오가 생각한 '온건한 제국주의'는 로마패권하에 독립국인 이들 나라들과의 공존공영이었다. 즉 '팍스 로마나'(로마지배하의 평화) 사상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온건한 형태의 '팍스 로마나'였다. 이에 반대한 인물이 바로 로마 원로원이며 웅변과 연설의 달인 '대카토'였다. 그는 온건한 정책으로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 힘들다고 역설하면서 패배자에 대해서는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없애는 강력한 로마를 원했다. 그는 카르타고와 체결한 강화조약 내용 자체를 비난하면서 온건주의는 미래에 반드시 더 큰 재앙을 초래한다면서 카르타고 궤멸을 항상 주창한 스키피오의 정적이며 반대파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자인 카르타고는 전쟁 후 한니발을 수장으로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내경제 회복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니발은 세금을 늘려 재원을 마련한 게 아니라 경비 절약과 사용 재검토를 통하여 경제 재건책을 실시했다. 그의 정책은 효과는 있었지만 반감을 갖는 기존 권력들의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카르타고는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에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여 왔으며 한니발의 내핍경제 강조에 기존의 생활수준을 줄이기에는 참을 성이 부족한 민족이었다. 한니발은 정치적 경험이 없었다. 그의 방법은 옳았으나 융통과 협조보다는 독단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한니발의 엄격한 방식을 6년을 견디지 못한 체 반대파들이 그를 시리아와 내통하고 있다고 로마 원로원에 고발하였다. 실제로 한니발은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은 상태의 카르타고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와 재기를 위한 은밀한 거래를 탐색하고는 있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반대파의 고발에 따라 로마 원로원은 아프리카 현지 조사단을 편성하여 카르타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니발은 이제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조사단의 목적이 무었인지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미 스스로 알고서는 어느날 밤 단신 빈손으로 배를 타고 조국 카르타고를 탈출하게 된다. 당시 51세. 한밤중에 말을 달려 해안까지 간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배에 올라타고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를 찿아갔다.

 

 

                     * 중동지도(출처: 살아가는 이야기 사이트)

 

당시 시리아는 에게해 우측편에 있는'아이톨리아'의 개입요청을 받고 있었다.'아리톨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전쟁 후 마케도니아에 대한 로마의 조치였다. 그들은 병력을 로마에 제공하면서까지 로마를 지원하였으나, 강화 후 마케도니아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데 불만이었다. 그래서 시리아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려는 의도였다. '아이톨리아'인의 지원 요청으로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는 망명해 온 한니발과 세운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왕이 제공한 군선 100척과 1만명의 보병,기병1천명을 데리고 카르타고로 가서 카르타고 정부를 설득하여 이탈리아 남부로 쳐들어 간다.

2)'안티오코스' 왕은 나머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제압하고 로마 동쪽에 상륙하여 남쪽의 한니발과 같이 로마를 협공한다.

 

내용은 매우 웅장한 전략이지만 실현성이 희박했다. 실제로 한니발이 이렇게 진언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니발의 가슴 한 구석에는 로마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미련은 남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한니발이 시리아와 내통했다고 고발한 카르타고 반대파의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며, 한니발이 조국을 버리고 망명길을 시리아로 선택한 점도 시리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로마에 대한 재도전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이 나이가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비르사 언덕에서 바라본 카르타고 유적지

 

* 시리아의 패전과 한니발의 재망명

 

기원전 19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아프리카 지배자 칭호)'를 단장으로 하는 원로원 의원 3명이 시리아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소아시아 '아페수스'에서 '안티오코스' 왕과 만났다.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나고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자리에서 두 장수는 오랫만에 만나 서로 이야기 했다. 옛날의 한니발은 그대로 정정하였으나 스키피오는 이미 지병을 앓고 있었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두 장수간에는 서로 많은 회한이 있었으리라. 이 만남이 두 영웅들 사이에 두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후일 같은 해에 세상을 하직한 것을 보아 두 사람은 서로 과거와 현실을 비판하며 인생이 덧없슴을 이야기 하면서 후일 이성에서의 만남을 서로 약속하였는지도 모른다.

 

2년후인 기원전 191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가 군사를 움직여 6만 대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로마도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로 이동하였다. 로마군은 시리아군과의 접전에서 너무나 쉽게 시리아군을 패퇴시켰다. '안티오코스'는 기병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로마군은 계속 '안티오코스'를 추격하여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이듬해 기원전 190년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를 포함하여 친구이며 전장터 동료인 집정관 '라일리우스', 형인 집정관 '루키우스'가 3만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넘어갔다. 이동중에 옛날 '스키피오' 휘하에서 근무했던 많은 병사들이 따라 나섰고, 동맹도시들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티오코스'는 8만명의 대군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고, 한니발이 직접 8만 대군을 지휘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스키피오'는 주변국에 사전 외교전을 전개하여 병력 피해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케도니아와 흑해 연안의 '비타비아' 왕국에도 사절을 보내 중립을 요청했다. '스키피오'는 시리아와의 회담이 결렬되자, 실제 동원된 시리아의 6만 대군과 로마의 3만 대군이 '에페수스' 내륙 '마그네시아' 평원에서 대치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재대결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당시 '스키피오'는 진영에서 병상에 누워있어 직접적인 부대지휘는 '라일리우스'와 '루키우스'가 맡았으며, 한니발도 직접 참전하지 않았는데 '안티오코스' 왕이 한니발을 전선에서 멀리 떼어놓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안티오코스' 왕이 한니발을 다룰 수 있는 기량도 없었지만, 한니발도 남 밑에서 재능을 발휘할 인물은 아니었다.

 

시리아와 전투는 너무 쉽게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군 장군들의 기민한 전법과 융통성 있는 전술이 중무장의 마케도니아 방진대형을 주로 사용하는 시리아 대군을 가볍게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다. 로마군은 이미 '스키피오'의 전술에 숙달되어 있었으나 시리아는 로마군이 에스파냐,이탈리아,아프리카에서 심대한 손실을 초래하면서 전술을 개발하고 전투기량을 향상시킨 반면에 그들은 그동안 잠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전사자 3만 3천명, 로마군 324명으로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안티오코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내륙지방 '샤르데스'까지 도망쳤다. 결국 시리아는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동맹국이 되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인도되기 전에 '크레타' 섬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았지만 '스키피오'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추격대를 보내지 않았다. 그후 한니발은 안전을 고려 '크레타' 섬을 떠나 흑해 연안의 '비타비아' 왕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로마 포로 로마노 유적

 

*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의 재판과 실각

 

남보다 뛰어난 공적을 이룩하고 유력한 지위에 오른 사람 가운데, 남의 질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질투는 엄밀히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약점이 보이면 반대파는 그것을 물고 늘어진다. 명예를 마음껏 누리던 상대편은 사소한 일로 인하여 명예심에 손상을 입게되고 그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는게 순서였다. '스키피오'의 약점은 건강이었으며 또 가까운 주변 인물들의 약점이 바로 '스키피오'를 공격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반대파의 우두머리는 원로원의 선동가며 연설가인 '대카토'였으나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변 인물을 내세워 스키피오에 대한 약점을 캐면서 공격의 포문을 연 것이 스키피오가 시리아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였다. 일차적인 공격 대상자가 '스키피오'의 형인 '루키우스'였다

 

기원전 187년. 시리아를 굴복시키고 개선한 스키피오는 호민관 두 명으로 부터 고발을 받았다. 처음에는 '스키피오'의 형인 '루키우스'가 시리아왕 '안티오코스'로 부터 받은 배상금 500탈렌트에 대한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고발이었다. 처음에는 '스키피오'가 나서서 고발의 부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개인 착복이 아닌 부대를 위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에서 호민관의 심리가 '루키우스'에서 '스키피오'로 확대되었다. '스키피오'가 시칠리아 파견시 부터 세금징수에 대한 편법사용에 대하여 추궁하자, 그는 경리장부를 찢어버리고 울분을 토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폭발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원로원에서 질타하는 연설한 뒤에 수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는 중간에 바다가에 위치한 '리테르노'의 자신의 별장으로 낙향하여 그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후 재판으로 비화되어 '스키피오'는 재판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다. 궐석재판이 진행되던 중 원로원 의원 중 노예군단을 지휘하다 전사한 집정관 '크라쿠스' 손자인 '크라쿠스'가 연단에 올라 연설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 누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보답이 이렇다면 장차 로마를 위하여 누가 목숨을 걸고 전장터에서 로마를 위하여 싸우겠느냐! 이제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 낙항한 이상 더이상 그를 재판한다는 것은 로마인의 수치다. 그가 로마를 위하여 봉사하고 공헌한 위업을 생각할 때 사소한 문제로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는 바로 원로원 여러분들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이므로 재판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취지의연설을 하였다.

 

원로원은 그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변하여 '스키피오'에 대한 탄핵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 후 그 문제는 혐의가 풀렸으나 이미 모든 권력은 반대파인 '대카토'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스키피오'는 정적이 권력을 잡은 로마쪽으로 눈길도 주지않고 칩거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별장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스키피오는 지병이 악화되어 기원전 193년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해 한니발도 망명국 '비타비아' 왕국에서 지내던 중 공명심에 불탄 일부 로마군 장교가 '비타비아'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자, 이를 알게 된 한니발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64세를 일기로 희대의 전술가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