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4 본문
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4
이민족을 포용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이야기...
로마군 모습
* 포에니 전쟁 말기: 기원전205년-201년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열렬한 요구와 민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30세 나이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스키피오'는 그의 임지를 북아프리카로 요구하였으나 원로원과 수장 '파비우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원로원은 우선 급선무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웅크리고 있는 한니발이었다. 북아프리카에는 동맹국도 없으며 비참한 최후를 장식한 전집정관 '레굴루스'의 전철을 밟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와 북아프리카 전선을 구축한다고 한니발이 이탈리아 전선을 떠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구전'의 대가이며 '이탈리아 방패'로 까지 추앙받는 원로원의 제1인자인 70세의 '파비우스'의 반대 연설로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임지는 부결될 듯 보였으나 이어서 스키피오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 지금 한니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으며 무언가 새로운 둘파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북아프리카 전선 형성으로 적국 카르타고를 공격한다면 한니발은 반드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날 것이다. 지금 당면 문제는 지금까지의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다. 한니발과 접전을 못하면서 지구전으로 버티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자신은 에스파냐에서 위업을 이루고 5살이나 더 먹은 현재 북아프리카로 가서 한니발을 반드시 끌어내어 승리할 것이다. 그것은 카르타고 자체를 의미한다"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단호한 '스키피오'의 연설은 젊은 원로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원로원은 분위기가 반반이 되었고, 격론 끝에 원로원의 결론은 '스키피오'의 임지를 시칠리아로 결정되었다. 다음해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아프리카로 갈 권리도 인정받았다. '스키피오'에게는 수도에서 군단을 편성하는 권한이 아닌 시칠리아에 가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단을 자력으로 편성하도록 권한이 주어졌다. 즉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원정해도 국가공인 군사행동이 아닌 개인적인 행동으로 모든 승패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에서 주변 동맹국들과 귀환병,시민들의 도움으로 병력과 장비를 편성하여 나갔다. 시칠리아의 2개 군단은 '칸나전투' 패전후 10년 동안 시칠리아에서 지내고 있었다. 속주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로 속주민들로 부터 물자와 병력을 제공받아 2만 5천의 병력과 1만 2천명의 선원이 편성되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자신의 군대 보급기지로 만들고 군사들의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에서 하던 방식으로 혼합편성된 병사들이 조직적인 훈련으로 '스키피오'의 눈빛만 보고도 의사를 전달 받을 수 있도록 강도높은 훈련이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들과 밤을 새며 이야기 하였다. 동료이며 친구인 '아일라이스'에게 직접 정찰선단을 대리고 아프리카 근해로 접근하여 정보수집 임무도 주었고 누미디아 '시팍스' 왕과도 동맹협력 관계를 조율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단의 지휘권을 인정받아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 남쪽 끝에 있는 마르살라 항구를 떠났다. 군선 40척의 호위를 받으며 400척의 수송선단에 2만 6천명의 병력과 군량,물을 싣고 카르타고 수도 서쪽을 향했으나 바람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우티카' 근방에 상륙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시팍스' 왕에게 '마시니사'의 약혼자이며 절세 미인인 여인을 왕비로 주면서 '시팍스'왕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여들이자 '스키피오'와의 동맹은 좌절되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를 회유하여 회담한 결과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고 형제의를 맺었다. 나이도 비슷한 '마시니사'는 약혼자를 '시팍스' 왕에게 빼았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대결하기 위하여 3만 3천 명의 카르타고 용병과 6만 명의 누미디아군이 카르타고 방위군으로 편성되었다. 작년에는 '마고네'가 1만 4천 명의 병력을 이탈리아반도 동북쪽 '제노바'에 상륙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려 하였으나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제노바'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한니발도 남부 지역에서 꿈쩍 않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깬 것이 아프리카 전선이었다.
이때까지 로마군은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권모술수나 간교한 술책을 쓰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스키피오'대에 와서는 이러한 사고를 버리고 한니발 처럼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여러 책략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싸움에서 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크리넬리우스 진지'에서 월동에 들어갔다. 10키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카르타고군의 숙영지가 편성되어 있고 그기서 약 2키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에 '누미디아'군의 겨울 숙영지가 편성되었다.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왕 '시팍스'에게 밀사를 보냈다. 카르타고와의 강화 중계 요청이었다. '시팍스' 왕은 타고난 허영심에 중계를 맡아 카르타고 진영의 '시스코네' 장군에게 전달하자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시스코네'도 별로 싸울 마음이 없었다.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스키피오'는 사절들이 오가는 편에 마부들이나 하인들을 백인대장이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교들로 변장시켜 보내면서 카르타고 진영을 상세히 살피도록 하였다. '스키피오'는 강화교섭의 시간을 계속 끌었다. '스키피오'는 적정을 살핀 후 야간 기습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3분지 1 병력만 진영수비로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제1군으로 카르타고 진영을, '마시니사' 왕자와 절친한 친구 '라일리우스' 장군에게는 제2군을 주어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야간기습은 제2군이 먼저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누미디아' 진영은 갈대로 만들어져 있어 쉽게 불에 타는 재료였다. 제2군이 '누미디아' 진영을 공격하여 화염이 오르면 동시에 '스키피오'의 1군이 카르타고 진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저녁 9시쯤 이동한 로마군은 은밀히 적진 가까이 접근하여 신호를 기다렸다. 자정쯤 되자 '누미디아' 진영에서 화염이 올랐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방심한 사이 기습을 감행하였다. 로마군의 야간기습으로 카르타고군은 3만 명을 잃고 패주하였고 누미디아의 '시팍스' 왕도 도망하였다. '마시니사'와 '라일리우스'는 '시팍스'를 추격하여 결국 포로로 잡았다. 누미디아 왕궁에 도착하여 자신의 약혼녀 였던 '시팍스' 왕의 왕비가 된 '스포비스바'를 만났다. 기구한 운명의 두사람은 즉석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의 새로운 누미디아 왕의 취임을 축하하였으나 적장인 '시팍스' 왕과 왕비를 로마군 규정에 의거 포로로 로마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끝에 하인을 불러 편지와 독이든 봉투를 왕비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왕비는 '마시니사'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남편이자 옛 약혼자인 '마시니사'의 선물인 독배를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팍스'는 로마에 잡혀와서 소도시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수년 후 눈을 감았다.
한 편의 애절한 스토리 같은 이야기다. 사랑했던 약혼자를 왕에게 빼앗긴 마시니사 왕자의 피눈물을 스키피오나 로마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배신한 적국의 왕과 왕비는 로마로 끌려가도록 규정되어 있어 원로원의 독촉에 스키피오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가 살아 있던 동안 이러한 비극적인 슬픔을 겪게 된 마시니사 왕자를 누미디아 왕으로 옹립해주고 보호해주었다. 약혼자인 '스포비스바'는 절세 미인이었고 그로인해 카르타고의 계략으로 '시팍스' 왕에게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미인 박명이라 했던가? 미인을 탐하는 탐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처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활도 하면서 역사를 바꾸는 역활도 하였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속에서 수 없이 볼 수 있는 한 편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의 승리 소식에 카르타고 수도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카르타고 조정에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마고네'의 병력을 철수하도록 정부의 공식문서를 가진 전령이 현지로 급파되었다. '스키피오'에게도 강화사절이 도착하여 강화를 제의하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측과 강화회담을 벌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주와 독립을 인정한다.
2)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남의 카르타고군을 완전 철수한다.
3) 에스파냐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한다.
4) 마시니사 왕국을 승인한다.
5) 20척의 군선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군선은 로마에 양도한다.
6) 강화기간 동안 로마군 군량을 조달한다.
7) 배상금 5천 탈렌트를 지불한다는 조건이 였다. 카르타고는 이 조건을 모두 받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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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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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동생 '마고네'는 본국의 철수 지시를 받고 '제노바'에서 해상으로 철수 도중 선상에서 전투 중 입은 상처로 인한 중독으로 눈을 감았다. 한니발은 본국의 귀환 명령에 자신의 정예 8천 명을 포함하여 1만 5천의 병력만 대동하고 나머지 3만 5천 명의 병력은 아틸리아 반도에 방치한 체 출발하기로 하였다. 배가 출발하자 로마군의 보복이 두려운 남아있던 동맹도시 출신들의 병사들이 자신들도 대려가 달라면서 배에 달라붙자 한니발은 화살을 쏘게하면서 항구를 벗어났다. 남겨진 동맹도시 병사들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수장되기도 하였으며 살아 남은 병사들도 결국 진주한 로마군에게 잡혀 모두 처형되었다.
한니발은 고대 전쟁사에서 알렉산드 대왕과 더불어 대표적인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구사하였던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자신의 장기로 사용하면서 로마군을 가는 곳마다 지리멸렬시켰다. 조국 카르타고의 지원도 없이 적국의 영토안에서 16년 동안 종횡무진하며 누볐고 대부분의 병력은 용병들로 비용을 지급하면서 벌인 전쟁이었다. 자신의 병력 5만 명을 먹이고 재우며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조련하였고 한 사람의 장병들도 이탈자가 없이 그를 따랐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기도 하였고 비간 내리고 눈이 내려도 바람막이 하나 없는 노천에서 대부분 생활하였다. 이러한 혹독한 환경에서도 그는 장병들로부터 무한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면 희대의 영웅 한니발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에 관한 기록은 그를 수행하며 기록을 남겼던 그리스 학자인 '셀레누스'의 기록이 유일하다. 그의 기록을 빌리면 한니발은 아래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 추위도 더위도 그는 묵묵히 견디어 냈다.병사들과 똑같은 식사를 먹고 먹고 싶을 때 언제던지 먹고 잠도 아무 때나 잤다. 항상 문제 처리를 우선했고 밤낮의 구별도 없었다. 병사용 망투를 두르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여자는 에스파냐에서 원주민 여자를 만났다는 것 외에는 전쟁기간 중 일체 가까이 하지 않았다. 16년 돈안 본국의 지원은 단 두 번뿐. 3만명의 군량을 어떻게 조달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4천명의 병사가 로마군에 투항한 적은 있으나 한니발을 배신하고 떠난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용병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떠나지 않았으며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하는 상대는 없었고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병사들 틈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며 항상 고고한 태도를 고집하는 그를 병사들이 항상 따랐다. 그의 엄격한 태도에 대한 경외심과 어려움을 극복 못하는 남자로써 호감. 뛰어난 재능보다 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상호관계이며 일방적인 관계는 지속될 수가 없다" 는 내용이다.
좀 애매모호한 표현이지만 한니발은 인간적인 소탈감은 있었든 것 같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에 항상 열중하고 그러면서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면에서 고고하며 엄격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 그리고 병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고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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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의 한니발은 '크로토네' 항구 남쪽 끝단 곶 위 '헤라신전'에 동판으로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로 자신의 29세부터 44세까지의 전과를 모두 기록하여 박도록 하였다. 50년 뒤 이곳에서 동판을 발견한 역사가 '포리비우스' 덕분이다. 한니발도 그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정예 1만 5천 명의 병력을 태운 카르타고 함선이 항구를 출발하면서 한니발은 뱃전에서 자신이 16년 동안 치열하게 누비던 이탈리아 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항구 곶 언덕위에 우뚝선 백색의 '헤라신전'은 수평선 멀리서도 햇빛에 반사되어 잘 보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으로 수 차례 로마군을 섬멸시키고 전 로마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한니발! 그는 결국 로마제국의 멸망도 보지 못한 채 조국 카르타고가 로마군에게 위기에 처했다는 급보를 받고 지금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하밀카르가 이루지 못한 로마 타도를 위해 일생을 바쳤건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 백색의 '헤라신전'이 수평선 너머에 사라질때 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며 떠나던 한니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라 신전에서 바라 본 지중해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한니발군이 떠났다는 소식에 로마는 승리의 환호성이 넘치고 수도 로마는 광란의 도시로 축제 분위기 였다. 원로원의 제1인자인 '파비우스' 집에는 축하 인사를 하려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로마의 위기에서 지구전법으로 로마를 구한 노장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철수한지 한 달만에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그는 아마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를 떠났다는 소식에 16년 동안 점철된 로마를 구한다는 긴장의 불꽃이 다한 모양이었다. 향년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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