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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3

두바퀴인생 2010. 8. 28. 02:44

 

 

 

 

한니발의 침공을 이겨낸 다문화 연합체 로마제국 3

 

이민족을 포용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이야기... 

 

 

                             

                                                         한니발과 스키피오

 

 

* 이탈리아 중남부지역 전쟁 : "한니발이 수도 로마 성문앞에

                                      나타나다!"

 

'나폴리' 북쪽 30키로 떨어진 '카푸아'에서 한적한 겨울을 나고 있던 한니발은 로마시민 포로 8천명을 데리고 있었다. 그들을 먹이는 문제도 해결하고 로마에 포로 몸 값을 요구하며 로마와 강화를 맺기위한 방안으로 포로 대표 10명을 차출하였다. 강화조건은 로마가 '시칠리아','샤르데냐' 및 '카푸아' 이남의 이탈리아 남부를 포기하는 강화조건을 제시한 뒤 측근 한 명을 붙혀 수도 로마로 보냈다. 한니발로서는 이 조건만 로마가 들어 준다면 자신의 이탈리아 침공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로마 원로원에 도착한 포로들은 한니발의 강화조건을 그대로 전했는데, 로마 원로원은 비통한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친척과 동료의원들이 포로로 잡혀있었으나 결렬한 논쟁후에 내린 최종 결론은 한니발의 강화조건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포로들은 대답을 가지고 한니발에게 돌아갔다. 로마인은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고 로마가 몸값도 지불할 능력도 있었으며, 8천명의 포로를 로마군단 재건에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한니발의 강화조건을 거절하였던 것이었다. 강화제의를 거절당한 한니발은 포로 8천명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로마는 후일 한니발이 그리스에 팔아버린 이 포로들을 구출하게 되는데 대부분 죽거나 노약자가 되어 있었지만 끝까지 포로 구출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을 조국은 끝까지 잊지 않고 있다는 것과 또 한편 로마 장병과 시민들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을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미국이 미군 포로 구출에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이 바로 로마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 정부는 한국전쟁, 월남전쟁의 국군포로에 대해 오랫동안 잊어버린 체 무관심으로 지나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니발은 부하들을 수도 로마성벽에서 4.5키로 떨어진 곳에 숙영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기병대만 이끌고 더욱 북상하여 로마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다. 성벽 근처에 이르자 그는 로마를 둘러싼 성벽을 따라 산책을 감행했다. '콜리나' 성문까지 갔으니까 전체 성벽의 3분지 1을 둘러 본 셈이었다. 그는 왜 이러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어떠한 자료도 없으나 아마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을 당황하게 만들어 끌어내거나 수도로마를 방위하는 로마군을 끌어 내려는 의도와 로마성벽을 직접 답사하면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공성 가능성을 가름해 본게 아닐까?

 

 

한니발의 이 대단한 시위에 로마인들도 심장이 멋으버릴 만큼 놀랐다. 성벽위로 몰려나온 시민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백마를 탄 36세의 젊은 카르타고 장군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거리에서 산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한니발의 시위에 놀란 집정관 '갈바'는 수도방위 2개 군단을 데리고 있었으나 '파비우스'로 부터 절대로 한니발과 직접적인 상대를 하지 말도록 충고받고 있었다. 병력을 성밖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포진을 끝낸 로마군의 의도도 시위뿐이었다. 한니발은 수도방위의 로마군을 쳐부수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 올 '카푸아'의 로마군을 쳐부술 계획의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로마군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로마군은 한니발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탈리아 속담에는 어린이가 울면 '한니발이 나타났다'고 하면 울음을 멈춘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울면 호랑이가 나타 잡아간다'면 어린이가 울을음을 멈추듯이 그만큼 한니발은 로마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211년. 한니발의 이러한 수도 로마행은 그토록 강렬하게 로마를 무찌르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 온 한니발이 수도 로마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아마 로마성벽을 바라보면서 한니발의 마음은 매우 착찹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아버지대 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이어온 그로써 에스파냐에서 론강을 건너 갈리아인들을 회유하면서 천혜의 고산지대인 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하면서 오로지 필승의 의지로 그토록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겪어왔고, 로마군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략.전술을 계승한 천재적인 전술로 '티치노' 전투,'트레비아' 전투,'트라메시노' 호반 전투, '칸나'회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아직도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보며 한숨지었을지 모른다. 그는 전술작전에서는 모두 승리하였으나 전략면에서 결국 실패를 한 셈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로마 시대 개선문 중 가장 상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개선문이며, 규모가 가장 크고, 후기 로마시대의 문화 예술의 걸작품이다. 콜롯세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으며, 오른편으로 포로 로마노가 위치하고 있다.
로마에서 가장 큰 이 개선문은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적 막센티우스와 치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AD 315년에 만들어졌다. 높이 21미터, 너비 25m의 세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문을 비롯하여,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등은 모두 파리의 개선문이 모방한 것인데, 파리 개선문의 원조가 된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그는 16년간 이탈리아 반도에서 종횡무진 로마군을 대적하면서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수만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장병을 16년간이나 용병비용을 들이며 먹이고 싸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로마군을 대적하여 포위섬멸 작전으로 격파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 누볐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전략이 아닌 한니발 개인의 원한과 적개심으로 일으킨 전쟁이었기에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천년제국의 로마가 이후에 더욱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점령지에 대한 동화와 평등의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한니발은 몰랐던게 아닐까? 살륙으로 점철된 그의 승리는 로마인에게는 적개심과 두려움의 존재였으며 누구에게도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인하여 그의 편에 진정으로 남기를 희망했던 로마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진정한 정복은 칼과 창을 사용하는 강력한 무력이 아니라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관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결국 이후에 벌어진 북아프리카의 '자마전투'에서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에게 일생일대에 한 번의 패배로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 '서아시아' 땅에서 로마군의 끈질긴 추격에 결국 더이상 도망갈 곳을 찿지못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 비운의 장군이었으며 한시대를 풍미한 외로운 영웅이었다.

 

수도 로마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체, 한니발은 남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카푸아'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 한테는 접근도 하지 않고 우회하여 곧장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하였는데 도중까지 와 있던 그의 본대도 한니발을 따라 장화 발부리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내려갔다. 한니발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는 '카푸아'는 그후 얼마동안 장렬한 공방전 끝에 함락되었으며, 전투 중 전직 집정관 '플크루스'가 전사했다. 점령된 '카푸아'는 배신행위로 인하여 자치권도 상실하고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으며 이는 로마에 대한 2번째의 배신이었다. '카푸아'의 지도급 인사 70명을 처형하고 시민들은 노예로 만들지 않았으나 그후 '카푸아'는 로마제국의 영원한 미움을 받아 도시발전을 꾀할수 없었다.

 

기원전 211년. 나쁜 소식이 로마에 전달되었다. 에스파냐에 가있던 '코르넬리우스'의 로마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로마 성벽

 

 


 

 

전쟁수행 의지를 천명한 로마는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국채도 발행되어 무산자 계급을 제외한 전 시민에게 각자의 경제력에 따라 국채가 할당되었다. 로마는 동맹국들로 부터 병력지원은 받았으나 기타 자금지원은 받지 않았으며 물자지원도 십일조 세금을 제외한 추가 물량은 돈을 주고 샀다. 로마는 공화국의 위기 앞에서도 맹주로써의 자존심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로마의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바, 최근 미국에서 벌어졌던 부자들의 기부정신이 바로 이러한 로마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기부가 메마른 우리나라의 지도층과 정치인, 가진자들이 기부는 커녕 재산 증식과 상속을 위해 갖가지 불법을 저지르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강대국의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약소국이 되는 길은 이러한 정신이 전무한 나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맹국인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지배자로 오랜세월 동안 로마와 동맹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히에론'이 죽자 쿠테타로 정권이 전복되어 한니발의 책략에 로마를 버리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시칠리아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다른 낭보는 '마케도니아'왕 '필립포스 5세'가 한니발에 동맹을 제의해 온 것이었다. 이제 전쟁은 점점 국제전으로 양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필립포스' 왕은 '아드리아해'해안에 위치한 '일리리아' 지역으로 해적들의 소굴이었던 바, 얼마전 로마군의 공격으로 모두 와해되었으며 그후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일리리아 '지방을 로마로 부터 되찿고 싶었고 도시 '아폴로니아'와 '두라초'의 로마군 기지를 공략하고 한니발과 같이 로마를 공격하여 '마케도니아' 제패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한니발이 '필립포스'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라는 지중해 세계의 2대 강국 사이에 동맹이 성립되었다.

 

로마는 이러한 사실을 빨리 알게 되었는데 귀국하던 마케도니아 사절이 로마해군에게 잡히는 바람에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니발이 '마케도니아' 패권 회복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문제와 '시라쿠사'에게 시칠리아 전체를 돌려주는 문제는 차후문제였다. 차후에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215년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내부의 한니발과 동서남북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동쪽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왕', 남쪽은 한니발에 붙은 배신 동맹도시 '시라쿠사', 서쪽은 비록 떨어져 있으나 '에스파냐'의 한니발 동생 '히스두루발', 북쪽은 '갈리아인',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안에는 가장 막강한 한니발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경우는 로마 해군이 '마케도니아' 사절을 잡아 한니발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여 그해가 끝날때 까지 '마케도니아'군은 어떠한 군사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로마는 우선 동쪽 '아드리아'해의 재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브랜디시' 항구를 중심으로 해군력을 보강하였다. 남부의 시칠리아섬은 '시라쿠사'의 배반으로 더 이상의 카르타고군의 세력 확장을 막고 재해권을 유지하여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칸나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력으로 구성된 로마군단이 시칠리아 전선에 파견되었다. 동부 에스파냐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에브로'강 이남지역을 순조롭게 평정하고 있었다.

 

갈리아인과 맞서는 북부전선의 경우, 2개 군단이 숲속에서 갈리아인들에게 전멸당한 이래 로마군은 반도 중북부에 위치한 '루비콘'강 이북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갈리아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하여 로마는 '리미니'와 '피노체'에 '칸나전투'의 패장 '바로'를 파견하여 그에게 현지 주민을 동원하여 1개 군단을 조직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칸나전투' 이후 로마가 취한 조치는 모든 방향에서 한니발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니발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지구전 전략으로 변경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에 따라 기원전 215년 집정관으로 재선출된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은 군단이 집결하여 한니발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집정관이 각각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로마군이 정면으로 대적하면 한니발을 상대할 수가 없으니 가급적 회전은 회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니발이 없는 카르타고군은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주변을 굳게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틈만나면 한니발의 꼬리 정도는 물고 늘어졌다. 로마는 곤경에 빠진 4년동안 병력은 교체했으나 가급적 사령관은 교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위기가 닥치면 국론이 분열되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한 뒤에도 이러한 로마인의 정신자세는 로마의 진정한 강점으로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가 대부분 한니발의 세력하에 들어가 버렸지만, '카푸아'가 로마 연합에서 이탈한 뒤에도 로마가 걱정한 '캄파나' 지방의 도시들이 도미노식 이반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의 다른 동맹국과 식민지도 로마연합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것도 역시 로마가 가지고 있던 강점이었다.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들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샤르데나'에서는 원주민이 로마군과 협력하여 카르타고군을 격퇴시켰고 시칠리아도 '시라쿠사'외에는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다. 밀이 부족하여 속주에서 들어오는 밀도 십일조 세금 외에는 돈을 주고 샀다. 로마가 이런방식을 취한 것은 속주나 동맹국의 이반을 막는 방책이었으며 자긍심이었다.

 

기원전 215년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고립되는 것을 우려하여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나 연락을 고려하여 정비된 항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은 '캄파나' 지방의 항구도시 획득에 집중되었다.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로마는 '캄파나 '지방에 세 명의 장군을 투입했다. '파비우스', '마르겔루스','크라쿠스'였다. 한니발은 깊은 만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나폴리'와 '포추올리' 라는 2개의 항구 도시를 노리고 있었다. 로마의 세 장군은 '카푸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한니발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2개군단을 이끌고 '카푸아'에서 북서쪽으로 20키로 떨어진 곳에 포진했다.'라티나' 가도를 감시할 수 있는 지점으로 수도 로마의 방어도 겸하고 있었다. '카푸아'에서 남동쪽으로 20키로 떨어진 곳에는 전직 법무관인' 마르겔루스'의 2개군단이 대기했다. 그리고 '아피아' 가도를 감시할 수 있는 남서쪽에는 집정관 '크라쿠스'가 노예들로 편성된 2개군단이 진을 쳤다.

 

한니발이 카푸아 남쪽에 있는 '나폴리'나 '포추올리'로 군대를 보내려면 당장 마르겔루스와 크라쿠스가 협공하는 구도이기도 하였다. 한니발에게 적이 없는 유일한 방향은 북동쪽이나 '아펜니노'산맥이 막혀 있었다.

 

'카푸아'에서 출동한 한니발은 삼면을 포위한 로마군에 대해 모두 싸움을 걸었지만 싸움에 응한 로마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절반의 병력을 남부지역 점령을 위하여 보낸 상태로 로마 6개 군단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절반의 병력만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결국 소규모 충돌전만 거듭되었을 뿐, 겨울로 접어들자 한니발도 이탈리아 남부로 회군해 버렸다

 

 

 

스키피오의 등장

 

한니발 전쟁이 일어난지 9년째. '칸나'전투에서 참패 당한지 6년째인 기원전 210년. 이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 사람 가운데 '마르겔루스'가 파견된 곳은 이탈리아 남부 '폴리아' 지방이고, '레비누스'가 파견된 지방은 시칠리아였다.

 

최전방에 파견된 '마르겔루스'는 한니발과 직접적인 접전은 회피하되 소규모 전투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적군의 병력감소를 꾀하고, '폴리아' 지방의 요충인 '타란토' 탈환을 준비하는 것이다. 4년동안 성공적인 군사.외교 전술로 '마케도니아' 봉쇄작전에 성공한 '리비우스'는 동부전선을  전 집정관 '갈바'에게 인계하고 시칠리아 전선으로 갔다. 시칠리아는 '시라쿠사'가 로마군에 함락되었으나 카르타고가 에스파냐에서 로마군을 괴멸시키면서 시칠리아로 눈을 돌릴 것으로 예상되어 시칠리아 방어는 물론,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원로인 해상을 완전봉쇄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타란토'를 사이에 두고 한니발과의 대결에 '마르겔루스' 2개군단과 '켄트마르스' 2개군단이 합동으로 투입되었다. 먼저 '켄투마르스'가 대결하였으나 병력의 5분지 4를 잃고 전직 집정관 '켄트마르스'도 전사했다. '마르겔루스'는 한니발을 추격하여 여러차례 접전을 벌이면서 꼬리를 놓지 않았다. 한니발은 코끼리떼도 동원해보고 여러 전술을 병행하였으나 '마르겔루스'는 호락호락 걸려 들지 않았다.

 

로마는 이듬해 새 집정관으로 나이든 '파비우스'를 재선출하였으며 '폴비우스 플라쿠스'를 선출했다. '마르겔루스'는 전직 집정관으로 계속 한니발과 대적토록 하였다. 150개 동맹국 중에서 12개 동맹국이 병력지원이 불가하다는 통보해 왔으나 로마는 작년과 같은 수준의 군단을 편성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보병 1만명, 기병1천명을 그해 여름이 끝날때에야 겨우 편성하여 로마 외항 '오스티아'를 떠나 에스파냐로 향했다. 감찰관 '셀레누스'를 딸려 보낸 것은 물론이었다. 에스파냐로 가던 25세의 '스키피오'는 화려한 언변술과 유쾌한 성격으로 감찰관 '셀레누스'를 회유하여 '에브로'강 이북의 본영 '타라고나'에 남아서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여 승락을 받았다. 자신에게는 '에브로'강 이남에서 카르타고군과의 전투는 자기에게 위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럽,지중해 지도(출처: 세계지도사이트)

 

'스키피오'가 에스파냐 '엠포리아이'에 배를 내려 육로로 '타라고나'의 로마군 진영에 도착하였을때 그를 맞이한 것은 8년 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에 맥이 풀린 전사한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남긴 병사들이었다.

 

25세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는 전 장병들에게 지금까지의 패배감을 일소시키고 오늘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한다면서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과 희망을 갖도록 연설하였다. '스키피오'는 사방의 적의 동태와 지형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병사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면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스키피오'는 자신이 대려온 1만1천명과  작년에 이미 와있던 1만명,그리고 패잔 7천명 도합 2만 8천명이었다. 적은 3개군으로 나누어 각각 2만 5천명 정도의 병력으로 도합 7만명이 훨씬 넘었다. '스키피오'는 적이 협격하면 숫적으로 불리하므로 각개격파 하기로 했다. 적의 제1군은 내륙에, 제2군은 남부 '지브롤터 해협' 근처, 제3군은 오늘날 '포르투칼' 영토인 '타구스' 강 어귀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적의 각군 사이의 거리는 열흘 거리였다.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는 로마군을 데리고 '에브르' 강을 건넜다. 그와 동시에 친구이며 부사령관인 '라인니우스'도 군선 30척에 병사들을 태우고 남하하고 있었다. '타라고나'에서 출발한 '스키피오'는 보통 20일 걸리는 행군거리를 강행군으로 7일만에 '카르타헤나' 성벽앞에 도착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카르타고군도 깜짝 놀랐다. '카르타헤나'는 한니발 아버지 '하밀카르'가 기원전 228년부터 세운 도시로 에스파냐 식민지의 수도이며 한니발이 자란 성채가 해안가 언덕위에 호화롭게 지어져 있는 고향이기도 한 곳이었다. 에스파냐의 모든 생산물이 이곳 '카르타헤나'를 통하여 본국 카르타고로 보내지고 있었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석호에 면해 있고 북쪽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천연적인 요새었다. '스키피오'는 성벽앞에 도착하자 마자 로마군의 관례대로 진영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북쪽 성벽 방향으로 길다란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이때 동료 '라일리우스'도 '카르타헤나' 항구 앞 바다에 도착하여 동쪽과 남쪽 해상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튼날 북쪽 진지에서 로마군이 성채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카타르헤나'의 4천명의 카르타고 수비대는 오로지 북쪽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주변 지형을 정찰한 결과 서쪽에 위치한 석호는 적들도 방심하고 있는 곳으로 수비대도 없는 지점이었다. 석호는 평소에는 건널 수 없으나 적당한 바람이 불면 걸어서도 건널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정예 장병 2천명을 뽑아 직접 서쪽 석호를 건너 성벽을 타고 기습적으로 성내로 밀려 들어갔다. 기습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로마군이 공격하자 수비대는 모두 항복하고 '스키피오'는 하루만에 '카타르헤나'를 점령하여 버렸다. '스키피오'는 부녀자와 노약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고 젊은이는 군선 노잡이로 징용하고 기술자 2천명은 로마군 공병으로 편입했다. 볼모로 와 있던 에스파냐 원주민 부족장 자녀 300명에게는 일일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했다. 성내에 약혼자가 있는 젊은 여자를 나이든 사람들이 '스키피오'에게 헌납하겠다며 데려왔으나 '스키피오'는 거절하고 약혼자에게 돌려 보냈다. 이러한 '스키피오'의 행동은 주민들로 부터 칭송으로 변해갔다. 도시내 모든 물자와 많은 양의 무기와 금고속 재화는 로마 소유로 하여 전쟁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하였고 카르타고 유력자들은 모두 포로로 로마에 압송시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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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군과 육체 훈련 ::

 보병이건 기병이건 입대한 병사라면 모두 4개월동안 기초 훈련을 받는데,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바로 행군이다. 베게티우스는 로마군에서 병사가 빨리 행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한다. 낙오자가 생기거나, 제각각 다른 속도로 병사들이 달리는 군대는 공격에도 약하다. 그러므로 병사들은 길을 따라 행군하고, 한 부대가 행군하면서도 한 덩어리가 되어 대오를 유지하도록 훈련받는다. 베게티우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름철에 로마군은 20로마마일(18.4마일= 29.6km)를 행군했으며, 이 거리를 5시간만에 가야 했다고 한다.

 

 로마 병사는 행군말고도 다른 육체 훈련을 받는다. 베게티우스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리거나, 멀리 또는 높게 뛰는 것을 언급한다. 여름철에는 수영도 군사 훈련 가운데 하나다. 군대 숙영지 가까운 곳에 바다나 강, 호수가 있으면, 모든 신병들은 수영을 하도록 훈련한다.

 

:: 무기 훈련  ::

 로마군 병사들은 날마다 전투 기술을 익히는데 힘썼다. 아래 사진에서는, 병사가 나무 검과 고리버들 세공의 나무 방패를 들고 훈련하고 있다. 진짜 무기 대신 나무를 쓴 까닭은, 훈련하다가 서로 다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진 설명) 훈련병 재현

 

 행군과 신체 훈련 다음으로, 로마군 병사는 무기 쓰는 법을 배운다. 처음에는 나무 검과 고리버들 세공 나무 방패를 쓴다. 그러나 이 가짜 무기는 진짜보다 두 배나 더 무거웠다. 로마인들은 두 배 무거운 무기로 병사를 훈련하면, 실전에서는 진짜 무기로는 그 두 배의 효과를 내리라 생각한 게 분명하다.

 

 우선 병사들은 이 가짜 무기를 들고, 단단한 1.8m(6피트)높이의 나무 막대에 대고 연습한다. 이 막대 앞에서 병사들은 검을 들고 치고, 반격하거나, 여러가지 동작을 배웠다. 여기서 충분히 연습한 병사들만, 둘씩 짝을 지어 싸움 연습을 하도록 허락받는다. 이런 1:1 싸움 훈련을 아르마투라armatura라고 불렀다. 이 말은 원래 검투사 학교에서 쓰던 말로, 검투사의 전투 기술을 뜻한다.  아르마투라 훈련에서 쓰는 무기는 역시 나무로 된 것이다. 다만 앞의 훈련과는 달리, 진짜 무기와 무게가 같거나 비슷했다.

 

 로마군에선 무기 훈련을 중요하게 여겼다. 일반적으로 무기 교관은 일반 병사의 두 배가 되는 식량을 배급받았다고 한다. 그에 견주어, 무기 훈련이 적절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병사들은, 상급 장교 앞에서 적정 수준의 무기 훈련 정도를 입증할 때까지 '열등한 식량 배급'을 받았다. (열등한 식량 배급: 베게티우스는 이것이 밀 식량을 보리로 대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검을 쓰는 훈련을 마치면, 신병들은 투창pilum을 쓰는 법을 배운다. 나무 막대는 이제 투창의 목표물이 된다. 훈련에 쓰는 투창 역시 다른 훈련 무기와 마찬가지로, 진짜 무기의 두 배 무게였다.

 

 이 밖에도 야전 축성술을 배운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는 겨울에도 훈련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붕 있는 승마장과 연병장을 지었다고 썼다.

 

 

:: 기병 훈련 ::

 기병 역시 보병과 똑같은 기초 훈련을 받는다. 기병 역시 보병 전투 훈련을 받는데, 실전에는 기병이 말에 내려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여, 기초 훈련을 4개월 받은 뒤에도, 보병 훈련을 더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보병과 마찬가지로 수영 역시 배워야 하는데, 말과 함께 헤엄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기초 훈련이 끝나면 이제 말타는 법을 배운다. 말을 타고 내리는 법부터 시작해서, 말 위에서 무기를 쓰는 법까지 배운다. 병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exercitator 또는 magister campi라고 부른다.

 

 로마 기병의 승마술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다리를 고정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달릴 때 다리가 꽤 불안정했다. 말을 다루는 법을 배운 뒤에는,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 넘는 법도 배운다. 등자가 없었던 만큼, 달릴 때 안장 위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말타기를 익힌 뒤에야, 말을 타고 무기 쓰는 법도 배운다. 보병과 마찬가지로, 버드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방패와 나무 칼을 들고 훈련한다. 역시 훈련용 무기는 실제 무기의 무게와 비슷하거나 더 무겁다. 기병도 보병처럼 나무 표적으로 훈련한 것 같다.

 기마 궁수를 훈련하는 일은 더 까다로운데, 일단 말 위에서 활을 쏠 정도로 기마에 능숙한 사람들 뽑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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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군 훈련(출처:군사무기/전쟁역사 카페)

 

 

'스키피오'는 점령지에서 육군과 해군을 훈련시키며 카르타고군의 동향파악과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해 겨울을 보냈다. 병사들에게는 훈련과 휴식이 반복되었으며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눈빛만 보아도 무었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하였다. 무기도 원주민의 칼을 모방하여 긴 칼에서 접근전에 유리한 양날검으로 개조했다. 이러한 검을 '에스파냐 검'으로 불렸으며 이후 로마군의 기본무기로 채택되었다. '카타르헤나'는 그해 겨울내 도시 전체가 대장간을 방불케 했다.

 

한편 '카타르헤나'의 점령소식은 로마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한니발은 금방 알지 못한체 로마의 3개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전경
*오늘날 튀니지아. 옛 카르타고 전경(출처: 튀니지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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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1군은 그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카푸아' 탈환의 영웅 '플라쿠스'로 '칼라브리아' 지방 즉 장화 발등에서 발부리에 이르는 지역을 견제하고, 제2군은 그해 집정관으로 재선출된 '파비우스'가 '타란토 '공격을, 제3군은 전직 집정관 '마르겔루스'가 맡아 한니발을 따라 다니며 '파비우스'가 타란토를 공격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한니발이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북상하자 '마르겔루스' 제3군이 막아셨다. 한니발은 처음 전투에서 로마군 2천 6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승리했다. 다음날은 로마군이 분전하여 한니발군 8천명이 전사하고 로마군이 3천명이 전사했다. 이러한 전투를 하는 동안 '파비우스'가 '타란토'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타란토' 함락으로 한니발은 '폴리아' 지방에서 발판을 잃게 되자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회군하여 버렸다. 이때 한니발은 '카타르헤나' 점령소식을 듣게 된다. 자기보다 12살이나 아래인 로마의 젊은 장수가 그것도 하루만에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한니발의 심정은 착찹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209년. 로마는 한니발을 장화 발등에서 발부리로 몰아 넣는 것이 그해에 새로운 집정관으로 '마르겔루스'와 '크리스피누스', 그리고 법무관인 '클라미네스'였다. 파견된 세 집정관이 6개 군단의 로마군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마르겔루스'는 이제는 한니발과 결전을 해야할 시기로 생각했다.'마르겔루스'는 '크리스피누스'와 합동으로 한니발과 결전을 생각하고 '크리스피누스'를 북상토록하여 로마군 4개 군단과 한니발군이 대치했다. 싸움에 응하지 않는 한니발군과 며칠째 노려보며 대치하던 중 로마군 지휘부가 중간지점의 언덕에 지형정찰을 나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한니발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마르겔루스'와 동맹국 지휘관 두명이 전사하고,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고 겨우 도망하여 로마군을 이끌고 '타란토'로 철수하였다. '크리스피누스'도 '타란토'에서 상처부위가 악화되어 타계하게 된다. 한니발은 로마 집정관 '마르겔루스'의 시신을 확인하자 그를 그토록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던 적장에 대하여 후히 장사를 치루도록 지시하고 '마르겔루스'의 반지로 동맹도시에 전령을 보내 성문을 열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로마군이 이미 전 동맹도시에 '마르겔루스'의 죽음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 바이쿨라 전투(이베리아 반도) : 제5회전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는 육지와 바다로 나누어 본거지인 '타라고나'를 출발하여 '카타르헤나'에 도착하자 노잡이로 징용한 젊은이들과 2천명의 기능공을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카타르헤나' 방어를 돕도록 조치하고, 부사령관 '라일리루스'로 하여금 군선에 병력을 태우고 이베리아 반도 남쪽을 돌아가 '카디스' 근처의 '마고네'군을 묶어두게 하였다. 자신은 한니발 동생인 '하스두루발'이 위치한 '바이쿨라'로 강행군을 했다. '바이쿨라' 평원의 북쪽을 돌아 '하스두루발' 진영과 강을 두고 마주했다. '하스두루발'은 로마군이 그토록 빨리 도착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동생 '마고네'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로마군이 도착하자 마자 먼저 경보병과 원주민 지원병력으로 강을 건너 '하스두루발' 전위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하스두루발'은 본대를 이끌고 나와 전투대형을 편성하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키피오'는 중무장 보병대 본대와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노도처럼 '하스두루발' 좌.우측면을 돌아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투대형도 편성하기 전에 세 방향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하스두루발'군은 당황하여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열이 흩어진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전사 8천, 포로1만 2천명을 남기고 '하스두루발'은 소수의 기병대만 대리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도망쳤다.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 카르타고 세 장수는 서로 만나  전황을 토의한 결과 '하스두루발'로 하여금 3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육로로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을 지원하고 남은 두 장수가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를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를 알게된 '스키피오'는 로마에 전령을 보냄과 동시에 자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하스두루발'을 따라 추격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에스파냐에서 계속 전투를 할 것인지 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탈리아로 간 '하스두루발'은 본국에 맡기기로 하고 자신은 이곳에서 계속 전투를 하기로 하였다. 스키피오의 이러한 결정에 로마 원로원은 찬반이 분분하였다.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하스두루발을 저지하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방치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찬반이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알프스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북쪽 방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07년봄. 이해의 집정관에는 '네로'는 법무관 '플비우스'와 함께 남부 지역의 한니발 전선을 담당하고 집정관 '리비우스'는 알프스를 넘어 침공하는 '하스두루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반도 중북부 '리미니'로 파견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남하 방향을 고려 '토스카니' 지방에도 2개군단을 배치했다.

 

 

* 메타로우 전투(이탈리아 반도) : 제6회전

 

'하스두루발'은  갈리아 부족의 협조적인 배려하에 갈리아 지역을 쉽게 통과하여 알프스의 산악민족도 한니발군의 의도를 아는지라 별다른 방해없이 코끼리와 3만의 카르타고군은 비교적 알프스를 쉽게 넘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는지는 사료가 없지만 이것은 한니발에게는 시간계산에서 착오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자신이 넘어올 때 걸린 기간을 고려하여 동생이 도착하면 로마군과 대결하기로 하고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나오는 시기를 늦추었다.

 

'하스두루발'은 갈리아 용병으로 증강된 5만의 병력으로 평원을 선택하여 아드리아해 쪽으로 해서 남으로 이동하기로 계획하였다. 포강을 지나 '리미니'로 가는 도중 그는 처음으로 형인 한니발에게 전령을 보냈다. 여섯명의 전령이 가지고 떠난 그 편지에는 그가 택한 길목과 합류지점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남쪽 지방에 도착하여 한니발군이 있는 곳을 찿고 있다가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붙잡혔다. 그 편지는 폴리아 지방에서 견고한 진영을 짖고 동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한니발 진영 근처에서 진영을 짖고 있던 집정관 '네로'에게 바로 전달되었고 번역을 통해 편지의 내용을 알게된 '네로'는 집정관에게 허용되지 않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지난번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던 네로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당시 '하스두루발'에게 당한 모욕때문이었는데 '네로'의 추격을 받던 '하스두루발'이 '네로'에게 강화제의를 하여 방심하고 있던 사이 '하스두루발'이 병력을 이끌고 사라져 버린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네로'는 로마로 소환되고 사령관직에서 파직되었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리미니'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은 3만에 불과하나, '하스두루발'의 군대는 5만이었다. '네로'는 '리미니'의 로마군으로는 대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병력을 대리고 북상하여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는 지역이탈로 허용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네로'는 설욕의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법무관 '폴비우스'에게 남은 군단을 맡기고 정예 경보병 6천과 기병 1천을 뽑아 식량은 휴대 않은 체 경무장으로 아군도 모르게 야간에 진영을 나와 '리미니'로 강행군 출발했다. 이동 중 식사는 동맹도시에 전령을 보내 준비토록 했으며 행군거리 800키로의 거리를 초인적인 강행군으로  '리미니'로 향했다.

 

집정관 '리비우스'가 '메타로우' 강 남쪽 연안의 평야지대에 진영을 편성하고 있는 곳에 '네로'는 1주일만에 도착했는데 아마 하루 100키로 거리를 도보로 이동은 어렵다고 판단되며 주로 말을 이용한 이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리비우스'는 '하스두루발'이 '아드리아해' 쪽이나 '플라미니아' 가도를 선택하더래도 감시가 가능한 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하스두루발'은 '아드리아해' 쪽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플라미니아' 가도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리비우스'군이 뒤를 바짝 추격하였던바, '하스두루발'은 로마군에게 추격당하면서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결전을 치루기로 했다. 행군대형을 돌려 '플라미니아' 가도 좌측 언덕 아래와 강 사이에 좁고 긴 평야지대에 진영을 편성했다. 여기에서 '하스두루발'은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는데 좌측은 가도 절벽이, 우측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좁은 공간에 5만의 병력이 밀집되어 기병이나 코끼리 운용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병력의 전술적 활동이 제한 받는 좁은 곳이었다.

 

강 상류를 바라보고 로마군 우익은 '네로'가, 중앙은 '리미니'의 주둔군 사령관 '호르티누스', 좌익은 집정관 '리비우스'가 맡았다. 병력은 모두 4만. 카르타고군은 코끼리를 전면에 내세운 진형으로 병력은 5만5천.

 

싸움의 시작은 4만명 로마군의 함성소리였다. 함성소리가 벼랑에 부딪쳐 두배나 큰 소리로  되돌아온 함성소리에 놀란 코끼리들이 적진으로 뛰어들지 않고 카르타고군 속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코끼리의 난동을 본 '하스두루발'이 코끼리 부대의 전선이탈을 지시하자 코끼리를 부리는 병사들이 코끼리 귀 뒤를 침으로 찔러 죽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로마군의 공격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로마군의 우익은 가도쪽 비탈진 언덕 때문에 적의 좌익을 공격하지 못하고 중앙과 좌익만이 적과 접전이 벌어졌다. '네로'는 우익병력을 본대 뒤를 돌아 좌익 옆으로 돌아가서 카르타고군 이익 배후를 공격하자 왼쪽 언덕과 뒤의 오르막길 가도로 막힌 카르타고군은 먼저 갈리아 용병이 무너지고 시간이 지나자 3만의 카르타고군도 '하스두루발'과 같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네로'는 뒷처리를 부탁하고 '하스두루발'의 목을 가지고 강행군으로 일주일 만에 다시 남쪽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출발한 날로 부터 14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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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파 전투(이베리아 반도) : 제7회전

 

이듬해 기원전 206년. 에스파냐 카르타고군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마고네'는 총 7만의 병력 중 보병은 총사령관 '시스코네'가 맡고 '마고네' 자신은 4천의 기병을 지휘하고 나머지 '누미디아' 기병대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에게 지휘를 맡기고 있었다. 총 7만 4천명의 병사와 코끼리로 이루어진 대군이었다. 이러한 병력으로 오늘날 '세비야' 근처 '일리아' 평원에 집결하여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4만 5천명의 보병과 기병 3천명으로 내륙으로 들어가 북쪽 '일리야' 평원을 지나 강의 상류로 나간다음 그 강줄기를 따라 남하하였다. 평야의 북쪽 언덕에는 카르타고군이, 남쪽 언덕에는 로마군이 진영을 편성하고 마주하고 있었다. 이튼날 카르타고군이 진영을 나와 전투대형을 편성하자 '스키피오'도 진영을 나가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서로 마주보며 해가 저물자 각자는 진영으로 퇴각하였다. 다음날도 마찮가지 하루종일 서로 노려보다가 해가 저물면 진영으로 퇴각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날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이 진영을 나오는 시각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적의 약점을 발견하고 병사들에게 아침 일찍 식사 후 전투준비를 갖추고 해가 뜨기전에 음밀히 카르타고 진영앞으로 이동하여 중앙은 에스파냐 원주민 지원병, 좌우측에는 중무장 보병과 기병을 배치한 상태로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깜짝놀란 카르타고 진영은 아침 식사는 커녕 코끼리 부대도 일부만 나온 상태로 허급지급 전투대형을 편성하고 있었다. 양군이 800미터 까지 접근하자 동시에 양군의 돌격이 실시되었다. 카르타고군은 중무장 보병이 로마군의 약체인 중앙의 에스파냐 원주민을 공격하고 로마의 중무장 보병은 사선으로 적의 측면에서 공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카르타고군의 본대가 측면과 배후가 공격받자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기병은 보병대 뒤쪽에서 제대로 전력을 발휘 못하는 형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르타고군이 피로한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스키피오는 2단계 공격병력을 투입하고 이어서 3단계 공격병력을 투입하여 적의 측후방을 계속적으로 공격하자 용병들의 특성상 형세가 기울면 도망가는 것이라 카르타고군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결판났다. 적장들은 대서양 연안까지 도망가고 6천여명이 산이나 강으로 도망갔으며 '마시니사'를 포함한 기병대는 포위망을 뚫고 '카디스'까지 도망 갔으나 나머지 카르타고군 6만여명이 로마군에게 섬멸되었다. 세장수를 놓친것을 제외하면 칸나전투에 버금가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스키피오'의 승전보를 형 '루키우스'를 로마로 보내 전하였고  소식을 접한 로마시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한편 '스키피오'는 '카디스'로 도망친 누미디아 기병대장인 '마시니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회담을 제의했다. 그는 기병력이 우수한 누미디아 기병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미디아 왕과 협상을 위해서 극비리에 북아프리카까지 잠행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일단 카드는 던진 상태로 선택은 누미디아 왕에게 달려 있었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6년 겨울. 2개군단을 남겨놓고 오랫동안 에스파냐에 와서 고생한 고참병들을 데리고 4년만에 로마로 개선하였으나 개선식은 원로원의 반대로 치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