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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모욕의 시대

 

 

모욕의 시대

 

모욕의 시대다. 타인을 모욕하는 언어와 행동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국회의원(강용석)이 성희롱 발언으로 여대생과 동료, 아나운서는 물론 대통령까지 모욕했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해야 할 또 다른 국회의원(차명진)은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란 말로 최저생계비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욕했다.

지위고하 없이 내뱉는 막말들

법정에서는 어떤가. 40대 판사가 50대 여성에게 "이혼했는데 무슨 말을 해. 가만히 있어"라는 반말로 인신공격을 해 당사자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딸에게까지 모욕감을 주었다. 다른 30대 판사는 아버지뻘인 60대 소송당사자에게 "어디서 버릇없이 튀어나오느냐"고 소리쳤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고교생에게 기합을 준 소년법원 판사도 있다.

어떤 장관은 "그렇게 좋으면 김정일 밑에서 어버이 수령하고 살아야지"란 말로 야당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모욕했고, 불법으로 북한에 간 목사는 대통령을"천안함 희생 생명들의 살인원흉"이라고 비난했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 가릴 것 없이 성추행과 막말을 한 교장이 한 둘이 아니다. 종교인은 타 종교인을 모욕하고, 경찰과 민원공무원은 시민에게 욕설과 행패로 모욕을 준다. 어디 이 뿐인가. 인기 인터넷 수능강사들은 거리낌 없는 욕설로 군과 전직 대통령을 모독하고, TV 오락프로그램 진행자는 막말로 출연자를 모욕하기 일쑤다.

모욕을 권위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당한 권위는 겸손하고 이성적이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오만하고, 반이성적이다. 권력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억누르고 지배하려 한다. 상대에게 모욕을 줌으로써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한다. 품격과 정의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권위주의만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욕의 언행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권위주의를 타파한다고 나선 지난 정부에서도 대통령부터 막말을 했고, 반대자들에게 모욕 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소설가 김별아씨 말대로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모욕을 당했을 때 대처할 매뉴얼이라도 준비해 놓아야 할 판이다.

막말이나 인격모욕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방송이 몰매를 맞는다. 방송의 영향력과 갈수록 심각한 출연자들의 인격모독적인 언행을 보면 원흉으로 지목될 만하다. 국립국어원의 조사에 따르면 6월 한 달 동안에만 지상파 TV 3사에서'이 노비 같은 X''풀 뜯어먹게 생겨 가지고'등 천박한 표현들이 844건이나 나올 정도로 심각하다. 인터넷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다. 익명성에 숨어 거친 언어와 감정적 가치기준으로 타인에 대해 말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의 악플에 모욕을 당해 자살까지 한 사람들이 있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내 잘못이 아니고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식으로 원인을 그 쪽에만 돌리는 것은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스스로 지성을 자부하는 사회지도층 인사가, 그것도 10, 20대 청소년이 아닌 인격 형성이 끝난 기성세대가 쓰레기 같은 TV 프로그램과 네티즌들의 언행에 영향을 받았다면 더욱 한심한 일이다.'버릇 없다'란 말을 누구에게 써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인터넷이나 방송 때문은 아니다.

품격있는 사회 위해 처벌 필요

성품 문제다. 성품은 타고나는 것이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모욕적인 언행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성품에서 나온다.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 습관과 제도이다. 아무리 상대를 존중하고, 품위를 갖춘 언어를 쓰라고 교육하고, 의지를 다져도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 없다. 그래도 혹시 어긋나지 않았을까 퇴계 선생은 매일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욕하는 사회는 품위를 잃은 사회다. 적개심이 가득하고, 타인에 대한 관용이 없는 사회일수록 모욕도 많다. 어떤 사람도, 지위도, 제도도 타인을 함부로 모욕할 권리는 없다. 모욕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이다. 유럽의 기사들은 모욕을 당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결투를 감행했고, 법이 동의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타인을 모욕한 자, 어떤 벌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 또한 품위 있는 사회의 조건이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