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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이란제재와 미국몰입외교

 

 

이란제재와 미국몰입외교

 

이란은 어떤 나라인가?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이란의 국기 이란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독립, 자유, 이슬람 공화국
국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가
이란의 위치
수도 테헤란
35°40′N 44°26′E / 35.667°N 44.433°E / 35.667; 44.433
공용어 페르시아어
정부 형태 공화정
모하메드 알리 하메네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부수립
 • 선언
팔라비 왕조로부터
1979년 4월 1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1,648,195㎢ (
18위)
0.7%
인구
 • 2007년 어림
 •
인구 밀도
 
70,472,846명 (
17위)
42명/㎢ (
163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7년 어림값
$7,529억 (
18위)
$10,624 (
71위)
HDI
 • 2006년 조사

0.777 (84위)
통화 리알 (ISO 4217:IRR)
시간대
 • 여름 시간
IRST (UTC+3:30)
IRDT (UTC+4:30) 
ISO 3166-1  364
ISO 3166-1 alpha-2  IR
ISO 3166-1 alpha-3  IRN
인터넷 도메인 .ir
국제 전화 +98

이란(페르시아어: ایران)은 서남아시아 지방에 있는 이슬람 공화국이다. 공식 명칭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페르시아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یران 좀후리-예 에슬라미-예 이란)이다. 옛날부터 이란은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군주제는 시작된 지 약 1400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공화제 국가이다.

이란의 역사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아인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4000년~3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인이 되었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아리아족의 이주와 메디아 왕국

지금의 이란 땅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인들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9세기경이다. 흑해 북부지방인 러시아 남부지역으로부터 아리아족들이 부족별로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남하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민족이 파르사족과 메디아족이었다. 메디아족이 먼저 강대국으로서 국가를 형성하였고 파르사족은 메디아족의 지배를 당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초에 메디아족을 이어 파르사족이 중동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모계는 메대의 왕손이었고 파르사족의 피를 이어받은 키루스 2세기원전 533년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인들의 종교로 유입되었다. 키루스 2세는 구약 성경에 고레스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아케메네스조는 전제군주제로서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을 ‘왕 중의 왕’이라 부르며 높은 보좌에 군림하였다. 사방의 모든 민족들이 매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은 강성해졌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치러야 했고, 기원전 330년에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더의 침공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하에서 그리스 문물이 이란 지역에까지 흘러들어왔고 후세에 헬레니즘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지배 후에 이란은 뒤늦게 남하해온 한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들의 제국은 파르티아라고 불렸다.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250년 경에 세워진 파르티아 제국은 전통적인 페르시아 제국의 전제 왕정과는 다른 정치체제로 세워졌다. 유목생활을 하던 지배층 민족은 거대한 제국을 통솔할 만한 정치지도력이 없어서 기존의 지방세력들을 그대로 정치세력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파르티아 제국은 수많은 소공국들로 구성된 연방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 안에는 페르시아족을 비롯하여 쿠르드족, 아프간족 등이 나름대로 소공국을 형성하여 포함되어 있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서쪽의 로마제국과 대치하였으며 강력한 로마제국과 벌인 많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은 강대국으로 오랫동안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제국의 뒤를 이어 이란 땅에는 또 다시 전제군주체제의 전통적인 이란 국가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226년에 건국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은 국교로 조로아스터교를 선포하였고 강력한 군주체제를 부활시켰다.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때까지 이란인들의 생활 모습은 오늘날 이란인들의 생활 모습과는 다른 면이 많다.

 

그들은 1년 중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인 3월 21일을 가장 중요한 명절로 지켰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상징과도 같은 불을 숭상했다.

이슬람화

사산조는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아랍 이슬람 국가의 침공을 받아 서서히 조로아스터교 대신 이슬람교를 그들의 종교로 따르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공식적으로 1258년까지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물론 10세기에 페르시아 국가를 지향하는 사만조라는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진 적은 있지만) 1256년부터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몽골인이 지배하는 일 한국에 편입되었으며 또 다시 16세기 초까지 투르크계 출신인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파비 왕조

1501년 이란에서는 다시 모든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마일 1세에 의해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1749년까지 국가가 지속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시작된 사파비조는 압바스 1세의 통치기(1588-1629)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최대 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제정 러시아오스만 제국의 침략(1724년), 아프간 왕국의 침공(1739년) 등을 당하는 등 쇠퇴의 길을 걷다가 1794년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가 대를 잇게 된다.

카자르 왕조

사파비조 이후에 1794년카자르 왕조가 세워져 1925년까지 이어짐으로써 근대 이란의 모체가 되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이란은 러시아 제국영국 사이의 전쟁터였다.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는 신진 지식인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외세에 대항하였으며 이들 세력에 의해 이란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1906년 입헌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입헌 군주제가 이란의 새로운 정치제도가 되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이란은 1907년 러시아와 영국의 보호지대로 분할되었으며 1914-18년 사이에 발생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이란의 석유로 인해 양 세력들의 목표물이 되어 전쟁터로 변했다.

 

1919년 이란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팔라비 왕조

1921년 리자 칸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925년, 카자르 왕조팔라비 왕조로 바꿈에 따라 로 등극되어 팔라비 1세가 되었다.

 

리자 샤는 터키의 서구화를 모방하여 서구화를 추진하였다(이미 이란의 서구화는 카자르 왕조 때에도 이뤄지고 있었다). 1935년에 와서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지금의 이란으로 변경하였으며 1936년부터 궁정의 여성들부터 베일을 벗기 시작하여 서서히 이란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같은 해에 리자 샤가 죽고 황태자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팔레비 2세)가 샤에 올랐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연합의 창설 회원국이 되었으며 1951년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한편, 1962년에는 백색 혁명이 일어나 종교 재단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이 실시되었다.

 

이 개혁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기게 되었다(특히 호메이니의 경우이다). 팔라비 왕조는 1979년에 혁명으로 폐지되어 지금의 공화국으로 바뀌고 말았다.

호메이니의 반정부 운동

1963년 6월 호메이니(Khomeini)의 주도로 반백색혁명이 발생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망명하였으나 그의 정신적 지도력은 이란 내 학생들과 농민들 사이에 계속 영향을 미쳤으며 1970년대에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샤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샤는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불만세력들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이러한 강경대응은 더욱 반정부 운동을 강화시켰다.

현대

1977년 11월 테헤란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1978년 2월 타브리즈(Tabriz)에서 폭동이 발생하는 등 심화된 반 팔레비 운동은 1979년의 이슬람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9년 3월 30-31일 국민투표에서 98%가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지지하였으며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호메이니가 4월 1일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 이란은 국내외적으로 아주 복잡한 정치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980년 1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제1대 대통령으로 바니샤르가 당선되었으며 4월 7일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며(1979년까지는 친미 국가) 그 해 9월 22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니샤르 대통령은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1981년 6월 호메이니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해임되고 7월 24일 알리리자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8월 30일 일어난 폭발사건으로 사망하였다.

 

10월 2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현재 호메이니를 이어서 국가원수인 최고 종교지도자 직위에 있는 하메네이가 당선되었다. 하메네이는 1985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호메이니와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였고 결국 1989년 6월 3일 호메이니가 사망한 다음 날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로 피선되었다.

 

호메이니 사후 이란 정치는 하메네이와 대통령 라프산자니의 2인 구도로 확정되었다. 라프산자니는 1989년 7월 28일 제5대 대통령 선거와 1993년 6월 12일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었다.

외교

이란의 외교 정책은 두 가지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란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과 비동맹국들과의 외교적 접촉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란은 국제 연합의 거의 모든 회원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으나, 이스라엘, 미국(이란 혁명 이후로)과는 외교 관계가 없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10월 23일 수교하였다. 북한과는 1973년 수교하여 이란 - 이라크 전쟁 때 이란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던 적이 있었다.

경제

이란의 경제는 중앙통제의 국유 석유회사와 국유 대기업, 농촌지역의 농업 및 소규모의 상업, 벤처에 의한 서비스업 등의 민영 기업으로 이루어진 혼합경제이다. 석유개발 이전에는 농업이 주요산업이었으며, 공업은 페르시아융단을 생산하는 전통적 수공업이 있을 뿐이었으나, 정부는 이전부터 줄곧 시장화 개혁을 행하여, 석유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의 다각화를 도모하여, 수익을 자동차 산업, 우주항공 산업, 가전 제조업, 석유화학 공업, 핵 기술 등 타 부문에 분산 투자하고 있다. 차바하르 자유무역지역, 키슈 섬 자유무역지역의 설정 등을 통하여 투자환경의 정비에 노력하여 수억 달러 단위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 이란의 중산계층은 두텁고 견실하여 경제는 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나, 현편으로 고인플레, 고실업율이 문제이다. 인플레율은 2007년 평균 18.4%, 2008년 4월(이란력)에는 24.2%에 이르렀다. 재정적자는 만성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식품, 가솔린 등을 중심으로 년 총계 약 72억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정부보조금이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란은 OPEC 제2위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확인되고 있는 세계석유 매장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2의 석유 수출국이다. 1996년에 매우 견실했던 원유가격은 이란의 재정적자를 보충하고, 채무 원리금 미지급금의 상환에 충당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취업 인구의 약 55%가 종사하는 농목업이 이란의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가 많아 작부 면적은 매년 농경지면적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이란 고원에서의 농경지는 오아시스 주변의 좁은 지역에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링에 의한 지하수 개발과 트랙터의 보급 등 생산 기술의 개선도 약간은 이루어진 편이나, 농업 기술은 아직 낙후된 상태이며, 대토지 소유 제도가 근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낮아, 농업 생산액은 총샌산액의 20% 정도에 머물고 있다. 주요한 농작물은 밀·보리·야채·사탕무·면화·포도·멜론 등이며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벼·차·오렌지의 재배를 볼 수 있다.  농업에 있어서 국가투자, 생산자유화에 의한 활성화을 목적으로, 외국에 대한 판로 확장, 마케팅 등으로 수출시장을 개발하여,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 대추야자, 피스타치오, 화훼 등 수출용 농업 생산물의 확대, 대규모 관개 계획에 의한 1990년대의 이란 농업은 경제부문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이 있었던 분야이며 농업은 여전히 이란의 최대의 고용을 유지하고 있는 부문이다. 이란은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의약품 제조 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주요 무역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등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시리아, 인도, 쿠바,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개발도상국과의 경제 협력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역내의 터키와 파키스탄의 통상을 확대시키고 있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시장 통합의 비젼을 공유하고 있다.

교통

마크란 해안 고속도로

 

육상 교통은 산유국답게 잘 정비된 도로망에 주로 자동차가 이용되고 있다. 원거리 버스 노선도 잘 발달하여 북·서유럽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국제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테헤란에서 서쪽으로는 자동차전용고속도로가 이어져 있다. 도시교통도 전적으로 택시·버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의 마비상태는 대단하다. 철도는 테헤란을 중심으로 페르시아만연안·카스피해연안·아제르바이잔·호라산·케르만에 통하고 있으며 그 연장은 5,000㎞에 달한다.

인구 구성

이란의 인구는 전체 67,540,002명(1997년 7월 통계)이며 다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페르시아족이 51%, 아제르바이잔족이 24%, 길란-마잔다란족이 8%, 쿠르드족이 7%, 아랍족이 3%, 루르족이 2%, 발루치족이 2%, 투르크멘족이 2%, 기타 1%(유럽계, 러시아인, 인도인, 유대인, 집시, 한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란인

'고귀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온순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인 "인샬라"(모든 것은 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정신이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매사에 느긋하며 의사결정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된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 이를 잘 참지 못하는 면이 있다. 또한 과거 페르시아 상인이라는 말이 있듯 상술에 정통하다.

 

한편, 이란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방색이 강하다. 이란에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 이스파한 출신은 열성적이고 지혜로워서 명석한 사업가가 많다.
  • 야즈드 사람은 부지런한 농부가 많다.
  •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강건하여 군인과 상인이 많다.
  • 서부 자그로스 산지에 분포하는 쿠르드족은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독립성이 강하여 과격한 전사가 많다.
  • 시라즈 출신은 그 천성이 정열적이어서 시인이 많다.

페르시아족

이란의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페르시아족은 기원전 12세기로부터 기원전 9세기까지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던 아리아족의 대표적인 무리였으며 이들이 이란 중남부 지역의 파르스 지방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명으로부터 페르시아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페르시아족은 쿠르드족과 같이 인도유럽어족의 일원이며 본래 백색 피부에 곱슬머리카락을 가진 자들로서 유럽인들과 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이다. 페르시아족이 이란 역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흔히 ‘이란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페르시아인을 뜻한다.

아제리족

이란에서 두 번째로 많은 민족인 아제리족은 터키 민족과 같은 민족 튀르크족의 일파이다. 아제리족이 사용하는 아제리어는 아제르바이잔의 아제리족이 사용하는 언어와 같으며 원주민들은 터키 사람들과 통역 없이도 어느 정도 의사전달이 가능한 정도이다. 튀르크계 민족인 아제리족이 이란에 거주하게 된 것은 이란이 오랫동안 튀르크계 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을 반영해 준다.

길란족과 쿠르드족

그리고 이란의 북서부 카스피해 연안의 길란주와 머잔다런주에 거주하고 있는 길란-머잔다런인들이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며, 네 번째는 인구 3,000만 이상의 거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를 가지지 못한 쿠르드족이 서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이란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5~600만 명 정도에 달한다.

투르크멘족 및 기타 소수 민족

이러한 주요 민족집단 외에도 투르크메니스탄과 접경한 후라산 지역에는 투르크멘족이 살고 있으며 이란의 남부 지역에는 수많은 소수 민족이 아직도 유목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밖에도 북서부 지역에는 약간의 그루지야인, 러시아인도 거주한다.

언론

이란은 민영 방송이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국영 방송이란 이슬람 공화국 방송이 방송을 독점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5년 무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퇴임하기까지 개혁파 집권 기간에는 국영통신 IRNA, 이란학생통신(ISNA), 파르시타임스 같은 언론들이 파르시와 영어로 활발하게 안팎의 소식을 전했으며 오히려 국영, 관영 언론들이 개혁과 민주주의의 대변자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에선 역설적으로 언론이 자유로운 나라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법원이 제동을 걸어 2002년, 2003년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으며 2005년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로 통제가 강화됐다.

문화

이란은 인접한 이라크와 아라비아반도 등 서남아시아 이슬람지역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랍 문화권에 속하지 않으며, 민족도 아랍과 다른 이란 민족이다. 언어 또한 파르시(페르시아어)를 쓰고 있다. 다만 이슬람이 지배종교가 되고 칼리프제에 복속된 이후 아랍어와 파르시의 교류가 많아졌다. 파르시는 기원전 7세기~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쐐기문자를 빌려서 기록하였으나, 7세기 말에 이슬람 문화가 이란에 전파되면서, 아랍 문자와 비슷한 알파벳을 쓰는 표기로 바뀌었다.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이 흔히 쓰는 히잡(머리쓰개) 중에서 특히 이란 지역의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온몸을 덮는 두건을 차도르라고 부른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거리를 걷는 페르시아 여성들을 보면은 차도르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이 있지만, 반면에 차도르를 입지 않고 양의를 입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종교

이란의 국민은 대부분이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는다. 다른 종교로는 그리스도교(네스토리우스파 교회, 이란 성공회,장로교,오순절교회, 로마 가톨릭,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조로아스터교가 있다.

 

 

 

 

이란 제재와 미국몰입외교

 

미국의 이란제재

미국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수년 동안 이란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안보차원에서 이란에 제재를 가하면서도, 이란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을 오히려 지원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 연방정부 기록, 기업 보고서 등을 분석한 결과 대 이란 금수조치에도 미 연방정부가 이란에서 활동하는 외국 또는 다국적 미 기업에 지난 10년 동안 사업계약금, 보조금 등으로 1070억달러 이상을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6일 보도했다. 이 자금 가운데 3분의 2 이상은 이란 정부의 주요 자금원인 에너지 산업 분야에 참여한 기업들과의 거래에 들어갔으며, 자동차 제조 및 유통 업체에도 상당부분 지원됐다. 이란에 투자한 기업들은 미 연방기구인 수출입은행의 대출과 대출보증, 신기술 연구 보조금, 천연자원 개발권 등의 혜택도 얻었다.

 


신문은 미국·이란 정부와 동시에 거래를 하고 있는 기업 74곳을 확인했으며, 이 가운데 49곳은 철수계획 없이 현재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1990년대에 이란에 대한 제재를 시작한 후 미국 기업들이 이란과 거래하는 것을 대부분 막을 수 있었다고 자평해왔다. 하지만 외국 기업과 미국 기업의 외국 자회사들이 이란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것을 막는 데는 정치·외교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 정부의 가장 강력한 이란 제재 수단은 ‘이란 제재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해당연도에 이란의 석유와 가스 개발 분야에 2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한 외국 기업은 미 정부 계약 참여 금지, 미 수출입은행 지원 자격 박탈, 미 군기술 수입 금지 등의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법이 통과된 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 정부는 동맹국들의 반발을 우려, 이 법을 한 번도 적용하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도 미국이 자국법을 다른 국가들에 부적절하게 적용하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행정부는 국가안보 등의 목적으로 법 적용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조항을 들어 98년 이란 제재법 첫 위반자인 프랑스 에너지기업 토탈이 이끄는 컨소시엄을 처벌하지 않았다.

2007년 이란 정유시설을 개선하는 7억달러짜리 계약을 체결한 한국의 대림산업은 미 의회조사처(CRS)로부터 이란 제재법을 위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미군은 지난해 주한 미군기지 안 주택건설 계약을 대림산업과 체결하고 1억1100만달러를 지급했다.

클린턴·부시 행정부는 이란에서 직접 석유나 가스를 구입하는 것이 아닌 에너지 수송로 건설 같은 활동도 이란 제재법에서 금지하는 ‘투자’로 해석해 적용했다. 뉴욕타임스는 대림산업처럼 석유·가스 시설을 건설하는 계약도 이란 제재법이 정의하는 투자에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대림산업 측은 “직접적인 정유 사업이 아닌 정유 시설 건설은 이란 제재법에 해당되는 활동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미국에 기반을 둔 회사라 하더라도 외국인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자회사를 통하면 이란에 투자할 수 있다.

또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제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브라질 국영 에너지기업 페트로브라스는 자국 해안에 석유 저장고를 건설하면서 지난해 미 수출입은행으로부터 20억달러를 대출받았다. 앞서 페트로브라스는 미국의 만류에도 이란 석유 탐사 관련 사업에 1억달러를 투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 페트로브라스를 지원한 것은 이 사업을 통해 미국의 물자를 팔고 미국인의 고용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란제재 압력

우리나라 외교가 도처에서 장벽에 부닥치고 있다. 이란 문제와 관련해선 제재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강한 압박에 직면했다. 거절할 수도 따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리비아 외교관 추방 사건까지 겹쳐 이슬람권과의 외교 및 경제협력의 토대가 뿌리째 흔들릴 위험마저 있다. 천안함 사건 이후 계속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미-중, 한-중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444일간 인질로 잡힌 사건 이후 미국은 이란에 대한 제재를 중단한 적이 없다. 이에 따라 우리도 이란과 교류할 때 제재를 피하고 눈치 봐야 했다. 그러면서 경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지난해 우리 기업의 대 이란 수출은 4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정부와 기업은 다시 도전에 직면했다. 이란의 핵개발로 유엔이 이란 제재안을 결의한 데 이어 아인혼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은 미국 독자적 이란 제재에 한국이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현재 제3국 은행이 이란과 거래할 경우 그 은행은 미국 은행시스템에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제재를 취하고 있다. 지난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통과시킨 이란 제재 결의 1929호와는 다른 추가적인 내용이다. 미국은 유엔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핵심적 내용인 이란의 석유·가스 산업에 대한 제재가 제외되자 독자 제재를 준비했다. 문제는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가 매우 강력해 이에 동참할 경우 한국 기업의 대 이란 무역이 사실상 전면 중단된다는 점이다.

한·미동맹과 우리의 경제적 국익 사이에서 또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명하고 신중한 외교적 대응이 절실한 시점이다. 우선 현실적으로 대 이란 제재에 동참하기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의 요청에 의해 독자적으로 이란 제재안을 만든 나라 수가 30개국을 넘어섰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입장을 반영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에너지를 수입해야 하고, 또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구조에 대해 미국을 충분히 설득해서 합리적인 선을 찾아야 한다. 유엔 결의안과는 별도로 독자 제재안을 만드는 것은 유엔 결의를 준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란은 유엔 수준을 넘어서 적대행위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란에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해 필요 이상의 오해나 감정을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제 역학구도상 대 이란 제재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대 이란 외교와 민간 교류는 배가(倍加)해야 한다. 제재에 해당하지 않는 분야와 사업에는 적극 참여해 우리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동안 경제교류에 비해 우리가 소홀히 했던 이란 및 중동과의 문화교류도 더욱 넓혀야 할 것이다. 최근 리비아와의 외교적 어려움도 그 내면에는 경제만 생각하는 한국에 대한 리비아의 서운함이 담겨 있다.

이란 국민은 한국을 사랑한다. 테헤란시(市)는 '서울로(路)'와 더불어 '서울공원'도 설치했다. 한국산 차량, 전자제품 등이 거리와 가정에 가득하다. 주몽·대장금 등의 시청률은 최고에 달한다. 설득과 교류를 통해 정치적 어려움을 풀어가야 한다. '우정은 나무와 같아 뿌리만큼 자란다'는 중동의 속담이 있다. 어려울 때 더욱 우정의 나무에 거름과 물을 많이 주어야 한다. '제3의 중동붐'은 이란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말에 이견을 다는 중동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

 

미국몰입외교에서 탈피해야...몰려올  재앙

 이란 제재와 관련한 진퇴양난의 처지는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천안함 사건 이후 정부가 유엔 안보리 결의와 별개로 미국에 독자제재를 요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 앞뒤 가리지 않고 미국한테만 매달리면 될 줄 알았다가 허둥대는 모습이 답답하다.

이런 때일수록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미국은 지난 6월 유엔 안보리 결의 1912호에 중국·러시아의 반대로 석유·천연가스 규제 조항이 빠지자 별도의 독자제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의 합의정신에 어긋난다. 우리는 이란 제재에 참여하더라도 유엔 결의 수준을 유지하는 게 옳다. 이것이 국제사회에서 명분있는 행동이다. 외교부도 며칠 전 로버트 아인혼 미국 국무부 특별보좌관 일행의 방한 때 기존 제재 결의 이상의 추가 행동은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어렵더라도 이 기조를 유지하기 바란다.

중국과의 갈등도 지혜롭게 풀어야 한다. 미국은 어제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를 서해 훈련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항공모함의 훈련 참가는 애초 우리 정부가 먼저 거론한 것이다. 중국이 이에 반발하자 동해 훈련에만 합류하는 것으로 물러섰다가 이제 미국이 먼저 서해 투입을 거론한다. 미국과 중국은 동북아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런 대결구도에 끼어들어서는 얻을 게 없다. 국제정치·경제·사회적 부담만 가중될 따름이다. 미-중 갈등 심화는 동북아 평화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 항공모함이 서해 훈련에 꼭 참가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런 외교적 난맥상의 근본원인은 이명박 정부의 ‘미국 몰입 외교’에 있다. 전임 정부들이 한-미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중국·러시아·일본·이슬람권 등과 두루 가깝게 지내는 균형외교를 추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릇된 외교철학에 대한 성찰이 새삼 요구되는 때다.

 

미국의 이란 제재 동참 압박, ‘편식 외교’ 탓 아닌가
어제 서울을 떠난 로버트 아인혼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 일행의 주된 관심도 이란 문제였다. 대이란 제재 문제는 여러모로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나라와 이란은 지난해 원유를 중심으로 수입 57억달러, 수출 39억달러 규모의 무역을 했고 현대와 에스케이 등 20여개 기업이 이란에서 각종 투자개발과 건설사업을 진행중이다. 

우리나라가 이란 제재를 강화할 경우 경제협력 관계에 주름이 질 수밖에 없다.게다가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리비아 외교관 추방 사건 등이 겹쳐 이슬람권과의 외교관계가 전반적으로 원활하지 않은 상태다. 

아인혼 특보 일행은 이런 동맹국의 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제 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아인혼 특보와 면담한 뒤

 “원유 수입이나 정상적인 무역거래는 보호돼야 한다”며 “미국이 공감과 이해를 표시했다”고 밝혔다.그런데 아인혼 일행은  몇 시간 뒤 기자회견에서 

‘유럽연합의 조처를 참고하라’며 압박, 우리 정부가 유엔 제재와 미국 국내법에 따른 포괄적 이란 제재를 충실히 이행했음에도 그 이상의 조처를 공개적으로 요구....

이번 사안과 관련해 외교부는 “추가로 취할 조처는 없다”고 일단 선을 그었다...이명박 정부 들어 미국한테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편식 외교’의 문제점이 심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매달리는 쪽은 얕잡아 보여 언젠가 비용을 거꾸로 청구당하기 마련. 이번 일을 보면 미국이 한국을 가볍게 여기면서 ‘비용 지불’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우려. 

최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 자동차와 쇠고기 부문 재협상을 집중 거론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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