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43 (삼성 성장 과정 6) 본문
우면산의 겨울 43 (삼성 성장 과정 6)
우면산 고목
편향적 판결과 갈등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보도한 PD수첩 제작진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돼 법원과 검찰간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히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판결의 정당성을 두고 법조계에서 시작된 논쟁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문성관 판사는 20일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왜곡ㆍ과장 보도해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민동석 전 정책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능희 PD 등 MBC PD수첩 제작진 5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제작진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자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업무방해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가 사라진 이 땅 국민의 반은 박수치고 반은 판사에게 계란을 던지며 편향적인 판결이라 흥분하고 있다. 머리가 반쪽이 붉게 물든 젊은 사법고시 출신들이 우굴거리는 사법부가 권력에 빌붙고 뒷구멍으로 치부하는 표리부동한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법만 공부하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알기나 하겠는가! 절대 인생이 성공했다고 자만하시지 마시라! 아이티 처럼 이 땅에도 대지진 같은 재앙이 닥치면 그들도 같이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또 전교조 건 강기갑 의원 건을 포함하여 최근 법원의 판결에 검-법, 여-야, 보수-진보할 것 없이 온 나라가 또 갈등의 양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하여 찬반의 의견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를 통합 할 기능이나 시스템이 전무하고 사회정의는 사라지고 근시안적인 사리사욕에 눈들이 어두워 오로지 서로 자신들의 목소리만 높이다 보니 나라는 빙판위의 럭비공처럼 방향도 찿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꼴이다.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이 강화되었던 조선 조정의 사색당파가 형식적인 공리공론으로 나라를 망친 것처럼 개인주의와 편향적인 사고가 상대를 무시하고 굴복시키려는 추세가 과거 역사를 닮은 꼴이다. 개인적인 지식이란 태평양 바다위에 떠 다니는 낙엽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대와 대화는 커녕 타협점을 찿지 못하고 자신만이 똑똑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타는 식의 사고가 팽배한 기른들이 물 위에 떠다니는 것 같은 사회다.
어느 사회나 어떤 사안이나 반대는 있기 마련이다. 또 어느 것이나 모든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강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역사는 흘러왔다. 자신의 의견을 구현하기 위해서 직언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또는 탄압과 굴욕을 참지 못하고 반란.반정도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하여 권력을 잡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이 오십보 백보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정책들이 자신과 무리들의 사리사욕이 아닌 얼마나 국민들의 삶을 평안하게 하였냐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그러한 갈등을 봉합할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시스템도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주변 4대 강국은 한반도를 노리고 저울질 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한국, 일본, 몽골과 지속적인 안보, 경제 협력을 전략을 구상하고 있으나 일본과는 미군기지 문제로 삐걱거리고 있다. 일본의 정계는 도쿄지방 검찰의 집권당 간사장 비리조사로 우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북한의 핵문제, 인권문제, 탈북자 문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문제가 산적되어 있으나 그들의 최근 돌출적인 언동과 태도에 우리 정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유사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장난을 언제라도 저지럴 수 있는 집단이다. 국방장관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 이야기가 신중하지 못하다며 북과의 대화에 찬물을 끼엊는 철부지같은 발언이라며 도마위에 올랐다.
나라는 부채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경제는 400만의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강남의 전세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등 부동산 조짐도 심상치 않다. 어제는 퇴근길에 2호선 지하철이 2시간이나 고장나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주기적인 점검을 하게 되어 있는 오래된 기계가 고장이란다. 잦은 파업으로 배불러진 지하철이라는 공기업의 나태하고 낙후된 업무태도가 1400만 서울 시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아이티는 대지진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으며 대통령도, 야당도, 야당도, 판사도 필요없이 모두 길거리로 나와 노숙자가 되었고 주민들은 폭동과 약탈이 자행되는 등 무정부 상태이다. 미군은 항공모함과 병력을 파병하여 아이티를 지원하면서 장악을 노리고 있다. 대지진, 전쟁, 붕괴, 폭동 등의 대재앙은 각자 살아남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재앙은 북한의 급변사태 뿐만아니라 남한에도 언제라도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끼리 다리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 나라 사람들이다. - 서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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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제작진 무죄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김형태 변호사가 20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PD수첩 선고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조능희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들과 법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0.1.20 jjaeck9@yna.co.kr |
삼성 이야기는 계속된다.
1993년 제2창업 선언 5주년을 기념해 그룹 CI 변경, 싱글 삼성 정책「신경영」 선포
이건희 회장은 그룹의 임원들에게 삼성제품의 심각한 품질문제를 지적하고 양이 아닌 질로 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자'고 설파한 이건희 회장의 변화 요구는 삼성에 근무하는 모든 사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실질적으로 현장의 변화를 위해 도입한 74제는 사원들의 생활에도 신경영이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 국제적으로 기업간의 경쟁과 결합, 제휴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첨단의 기술 제품과 서비스가 쏟아져 나와, 국가간 기업간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삼성은 신경영 출범을 선언하였고, 이는 ‘제품의 일류화’와 ‘고객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친절 서비스’ ‘인류 공영에 기여하는 기업 정신’으로 집약되는 당시 주목받는 기업의 경영혁신 운동이었다. 삼성은 이후 본격적인 질 우선 경영과 월드 베스트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반도체와 컴퓨터 모니터, TFT-LCD, 컬러브라운관 등 세계 시장점유율 5위 안에 드는 제품이 17종류나 되었고, 1위인 제품만도12종류가 되었다. 특히 1993년 사업을 시작한 LCD는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전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고, 삼성중공업의 해저유전 탐사선인 드릴쉽(Drillship)이 세계 시장의 60%를 선점해온 기간이었다.
1990년대의 중반부터 삼성은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조직 분위기를 만들고 고객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사내 친절 강사를 양성하는가 하면 신라호텔에서는 친절 매너 교실을 운영해 친절 노하우를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증권, 삼성카드 등 관련 기업들의 사원들에게 전파했다. 서비스 부문에서도 삼성전자와 전기 등 각 회사의 제조라인마다 불량제품이 발견되면 해결될 때까지 그 라인을 모두 멈춰 세우는 라인 스톱 제를 적용하였고, 삼성물산은 48시간 Home Express제도를, 삼성카드는 서비스 보증제도를 도입하는 등 고객의 제품만족을 위한 내부의 제도 개선과 외부의 서비스 시행 등이 잇따랐다. 삼성은 1990년부터 인류에 공헌하는 기업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기업 문화 활동과 공익 사업, 지구 환경 보호 등을 적극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마케팅 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지난 1996년7월 삼성 이건희 회장이 IOC위원으로 선임되어 스포츠 삼성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1997년 말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에 따라 삼성은 물론 모든 한국 내 기업들의 경영활동은 극히 위축되었고, 구조조정을 위해 기업의 계열사축소, 재무구조의 건실화, 인력 감축 등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삼성도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하며 계열사를 47개사로 줄였으며, 삼성중공업의 건기사업부분(볼보), 지게차부분(클라크) 등 총 10개 사업부를15억불에 해외자본에 매각하였다. 또한 1997년 365%의 부채비율을 1999년 말 183%로 낮췄으며, 종업원도 1997년 대비 약 5만 명을 감축하는 등 자구노력을 통해 이전보다 더 건실한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제 2000년대에는 명실공히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진입을 위해 전자와 금융, 서비스 등으로 사업을 집중시켜, 디지털과 인터넷 기술로 집약되는 광속 정보화 사회를 이끌어 나갈 ‘디지털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94년 삼성의료원 설립
삼성의료원(三星醫療院, Samsung Medical Center)은 서울삼성병원을 중심으로 강북삼성병원, 마산삼성병원, 삼성생명과학연구소로 이루어져 있는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육병원이다. 1994년 11월 9일 강남구 일원동에 1100병상 규모로 개원했다.
삼성서울병원(강남구 일원동)의 인력을 보면 의사 950여 명, 연구원 29명, 간호사 1380여 명, 의료기사 500여 명, 약사 70여 명과 기타 인원 등 모두 4700여 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3개병원을 모두 합칠 경우 의사는 1400여 명을 비롯 모두 7100여 명이다.
1995년 삼성어린이박물관 개관
삼성어린이박물관(三星어린이博物館, Samsung Children's Museum)은 삼성문화재단이 서울 송파구에 설립한 어린이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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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어린이박물관은 1995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관했다. 당시 전시면적 410평 규모에 총 8개 영역에서 60여개의 전시물을 전시했는데 전시물을 만질 수 없었던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삼성어린이박물관은 전시물을 만지고 체험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체험식 박물관이라는 점에 큰 호응을 얻었고, 개관 석 달 만에 관람객 수 10만명을 돌파했다. 그 해 12월에는 기획도서와 가이드북이 발간되었다.
이듬해 1996년 1월에는 삼성어린이박물관의 뉴스레터인 《우리끼리》가 창간되고, 회원제를 실시했으며, 1999년 11월에는 삼성어린이박물관의 공식 웳사이트가 개설됐다. (이후 2001년에 웹사이트가 개편되고, 2005년에 리뉴얼하여 오픈한다) 2001년에는 '쾌적한 환경 유지와 어린이들의 안전'을 이유로 입장인원을 적정 수로 제한하고, '입장권 예매제'가 실시되었다. 2003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내방하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누계 관람객 400만명을 돌파해, 기념 사은 행사를 하기도 했다.
삼성어린이박물관은 4층 건물 전체에 각각 다른 전시장을 배치해두고 있으며, 그 내용은 일정 기간마다 바뀐다. 가끔 특정한 전시 행사를 기획해 일정 기간 동안 열기도 한다. 또한 삼성어린이박물관에서 전시하던 전시물을 지방 순회전을 열어 지방의 다른 박물관에도 전시될 수 있도록 협조하기도 한다.
삼성어린이박물관에서는 전시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인형극, 음악극 등 각종 공연, 실험, 만들기 등의 행사를 일정 기간 동안 여는데 특정 시간, 장소에서 열어 참가비를 내는 조건으로 참가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영유아, 초등학생 저학년 어린이를 위한 〈스쿨 프로그램〉도 있으며, 역시 수업료를 받고 정원에 맞춰 받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운영중인 스쿨 프로그램은 '영유아놀이스쿨, 유아아트스쿨, 키즈놀이스쿨, 사이언스스쿨' 총 4 가지이며, 각 프로그램마다 수업에 참가할 수 있는 어린이들의 나이에 제한을 두고 있으며, 수업 내용도 각각 다르다.
1995년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분리
웅진케미칼(제일합섬, (주)새한, Woongjin Chemical CO.)은 1972년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모태로 제일합섬으로 설립되였으며 삼성그룹 분가 과정에서 1995년 삼선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의 2남 고 이창희(1992년 혈액암으로 사망)회장 몫으로 분류되어 삼성에서 분리, 새한미디어와 함께 새한그룹을 만들어 독립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확장 등으로 2000년 워크아웃을 신청하였고 2008년 웅진그룹에 매각되었다. 그 후 웅진케미칼 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웅진케미칼 New CI 선포식(2008.1.7)
현재 대표이사는 박광업이며 본사은 성루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북 구미, 경기 안성, 충남 공주(유구) 등에 국내 사업장이 있다. 경기 수원에 연구소가 있으며 모태가 되는 경산공장은 워크아웃 기간 중에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매각하였다.
사업내용은 화학.삼유를 주축으로 원사, 원면, 직물, 필터,EG, TPA 등을 생산하며, 2008년 기준 자본금은 2351억원, 매출액은 8502억원이다. 2009년 9월 현재 직원수는 1059명이며 주요 자회사로 새한정보시스템, 웅진로지스틱스가 있다.
199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20주년, 에버랜드로 개칭
에버랜드 리조트는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놀이동산(테마파크)으로, 1976년 용인자연농원으로 처음 개장한 이래 대한민국의 놀이동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96년 에버랜드로 개명하였고 2002년 세계 유원지 입장 관객수 순위에서 6위에 올랐다. 원래 에버랜드는 안성시 (당시 안성군)에 지어지려고 했으나 안성 시민들이 지나치게 반대하여 결국 삼성은 용인시에 에버랜드를 짓게 되었다.
에버랜드 리조트에는 놀이 기구뿐 아니라 동물원과 ‘캐리비안 메이’라는 이름의 워트파크를 가지고 있다. 에버랜드 리조트는 삼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삼성에버랜드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0년 6월 용인 경전철(에버라인)이 기흥(구갈)역부터 전대(애버랜드)역까지 개통되면 더 쉬운 접근이 가능해진다.
에버랜드 리조트에는 테마파크 ‘에버랜드’, 워터 파크 ‘캐리비안 베이’, 가족 숙박시설 ‘홈브리지’, 자동차 경기장 ‘스피드 웨이’가 있다. 이 밖에도 리조트 내에 위치한 시설로는 ‘글렌로스 골프 클럽’, ‘교통박물관’, ‘호암미술관’이 있다.
1996년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으로 재영입되어 고급인력육성에 막대한 투자 시작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Sungkyunkwan University)는 사립 대학교로 1398년 조선 태조 시대 설립된 성균관을 모태로 하며, 일제에 의해 1911년 구(舊) 성균관이 폐지되고 경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최고교육기관의 기능을 상실하였었으나 해방후 1946년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의 주도에 의해 다시 사립종합대학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내력은 아래와 같다.
김창숙(金昌淑, 1879년 ~ 1962년 5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학자, 교육가, 정치가였으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활약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야당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교육계몽사업에도 참여하여 성명학교, 성균관대학교의 개교에 개입하였다. 걍북 성주 출신으로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이다. 다른 이름으로 김우(金愚)라는 이름도 사용한 적이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
경북 상주 대가면 사월리에서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며, 선조 때의 정승 김우용(金宇顒)의 12대손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군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가족들은 그에게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으나 그는 변호사 선임을 거절하였고, 징역 14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3.1 일제 항거사건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는데,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이후 임시정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孫文)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 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만나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합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었다. 왜관 경찰서에 구속되어 수감 중, 일제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여운형, 박헌영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김창숙은 비판을 가하면서 중경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1월 23일 김구가 정국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소집한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의에서 좌파계열 임정 국무위원인 성주식.장건상.김성숙 등이 탈퇴하자 중경 임정 측은 1947년 3월 3일 이승만을 주석으로,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재보선할때 김창숙도 조만식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민주의원 회의에서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등 이후 민주의원에서 활동하며 정당난립과 신탁통치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 등으로 다른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유림계 재건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46년 2월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창숙은 이때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했고 김창숙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으로 선발되었다.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주한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 장군에 의해 민주의원으로 바뀌었고 민주의원 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김창숙은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이미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던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 기존의 성균관을 정비하고,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기치로 명륜전문학교를 병합, 1946년 9월에 성균관대학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에는 전국의 향교를 규합해 성균관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1948년 3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했으며, 4월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이 남북협상을 추진하려 할 때 남한의 이승만의 협조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북한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는가 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야당활동을 하며 독재와 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이시영. 조병옥. 김성수 등과 반독재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해 이승만정권과 계속 투쟁하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4년제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56년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강제 사임하게 되었다. 1957년 성균관 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이승만 퇴진 이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어 출마하였다.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 중 259명의 출석으로 열린 1차 투표에서 29표를 얻어 낙선, 208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병중에 박정희의 방문을 받았으나 외면하였다.그 외에 의성김씨 중앙종친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는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발표 논문수에 의거한 성균관대학교의 순위가 한국에서는 3위, 세계에서는 146위로 나타났다고 밝혔으며, 경영전문대학원(MBA) 평가에서는 한국에서 3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08년 결정된 로스쿨(Law School)에서 120명으로 확정되었고, 각종 국가고시(사법, 행정) 및 자격사(회계사, 세무사, 감평사등) 시험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약칭으로는 성대, SKKU 등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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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398년 조선 태조 성균관 설립
- 1475년 성균관 내에 최초의 도서관인 존경각 설립.
- 1519년 대학의 심벌인 은행나무가 심어졌으며, 후에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
- 1592년 임진왜란에 의해 문묘가 전소 되었음.
- 1601년 선조에 의해 문묘 재건.
- 1895년 성균관은 지금과 같은 대학교의 형태로 3년제 대학으로 전환.
-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학원으로 강제 개명.
- 1946년 조선 시대 성균관이 지니고 있던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기능을 이관받아 성균관대학이 설립됨(초대 학장 : 김창숙, 재단이사장 : 조동식).
-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초대 총장 : 김창숙).
- 1953년 각 도 향교재단의 재산을 거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성균관에 통합.
- 1963년 재단법인 성균관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으로 개편.
- 1965년 삼성문화재단의 학교 운영 참여.
- 1977년 삼성문화재단이 학교 운영 포기.
- 1979년 봉명재단의 학교 운영 참여.
- 1979년 자연과학캠퍼스 준공 및 개강.
- 1990년 건학 600주년 기념 사업회 설립.
- 1991년 봉명재단 퇴진.
- 1996년 삼성재단의 학교 운영 참여.
- 1998년 건학 600주년 기념식.
- 2004년 MIT Slon School of Management와 공동으로 경영전문대학원에 SKK GSB를 신설
- 2006년 삼성재단 영입 10주년.
- 2009년 대한민국 선거사상 최초로 대학내 투표소 설치
캠퍼스의 위치
성균관대학교는 서울 종로구 명륜3가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캠퍼스(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위치한 자연과학캠퍼스(수도권 지하철 1호선 성균관대역)의 이원화 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캠퍼스의 소속 전공은 문, 이과의 구분에 따라 나뉘어져 있으며, 자세한 소속 학부, 전공 및 대학은 아래의 개설학과 카테고리를 참조한다.
부속기관
- 성균나노과학기술원
2005년 3월에 설립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이지마 스미오(Sumio lijima) 박사가 현재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영문 명칭인 "SKK Advanced Institute of Nanotechnology"를 줄여 SAINT라고 부르기도 한다. SCI급 국제저널인 NANO를 발간하고 있다.
- 동아시아학술원
동아시아학 연구를 위해 2000년 3월에 설립되었다.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사범대학 한문교육과의 임형택 교수가 학술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국제저널인 "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를 발간하고 있다.
1997년 삼성프라자 분당점 개점, 올림픽 파트너로 공식 선정. 이로 인해 2004년 15조7천억원으로 수익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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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플라자 분당점은 1997년 11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 위치하여 개점을 하였다. 지상 20층, 지하 6층으로 매장 면적 10696평으로 롯데 백화점에 비해 큰 면적이다. 정직원수는 450명 정도의 직원들이 고객들을 위해 서비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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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개점이래 고품격 이미지와 차별화된 서비스로 지역 유통문화를 선도해온 삼성플라자 분당점은 지역 최고의 명문백화점으로 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명품을 비롯하여 모던함과 클래식이 조화를 이룬 패션의 중심지로 쾌적한 쇼핑환경과 고품격 서비스로 고객들의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해주는 쇼핑과 문화의 메카로 고객들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교통편 역시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이 놓여있을 뿐 아니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버스노선이 발달돼 있다. 또 인근에 대형 업무 시설과 시범단지등 배후수요를 받쳐주고 있어 안정적인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주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10대들의 등.하교 시간과 30대를 주축으로 하는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대인 8~9시, 18~21시가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 한편 낮 시간에는 주부들이 유입되는 편이다. 2006년 매각.
애경그룹은 지난 1993년 구로본점을 시작으로 유통업에 진출하면서 기존 롯데와 신세계 등과 함께 신흥 유통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애경백화점(현 AK플라자)은 1993년 당시 목동과 구로지역에 문화시설을 갖춘 대형 유통시설이 없던 점에 착안, 지역 친화적 마케팅을 통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구로본점의 성공적인 사업진출에 힘입은 애경백화점은 사업 확장을 시도, 지난 2003년 2월 수원점을 출점한 데 이어 분당의 삼성플라자와 삼성몰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또 애경백화점은 지난해 10년 넘게 사용해 온 ‘애경백화점’이라는 이름을 ‘AK플라자’로 바꿔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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