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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마지막회,진덕여왕-태종무열왕실록) 본문
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마지막회)
(진덕여왕-태종무열왕실록)
제28대 진덕여왕실록(재위기간 : 서기 647년 정월~654년 3월, 7년 2개월)
1. 난국 타개책으로 즉위한 진덕여왕과 신라의 구애 작전
진덕(眞德)여왕은 진평왕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 국반의 딸이고, 월명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만이다. 그녀는 자태가 곱고 키가 7척이며 팔을 뻗으면 무릅까지 닿았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의 난 중에 죽자, 그 와중에 승만이 왕위에 올랐는데, 왜 그녀가 왕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당시 성골로서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성골 여자인 승만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성골이라는 신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어 이 또한 가설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왕에서 진덕여왕까지를 성골 왕으로,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를 진골 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이 기록의 진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진덕여왕의 즉위를 성골과 진골의 구분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선덕여왕의 영흠한 지혜를 믿던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실권자 김춘추가 난국 타개를 목적으로 그녀를 왕위에 앉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지 9일만에 비담의 난은 종식되었다. 내란을 종식시킨 일등공신은 김유신이었다. 당시 도성 병력은 반군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는데,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말려 반군은 궤멸되었고, 비담을 비롯한 30여 명의 반군 지휘부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진덕여왕은 곧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내정을 수습하는 한편 당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당 태종은 지절사를 보내 선덕여왕을 광록대부에 추증하고, 진덕여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 왕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진덕은 즉위 한 달 만에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도 공인도 받았다.
그러나 신라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비담의 난으로 많은 신하와 장수가 죽었고 병력 손실도 컸다. 백제가 그 틈을 노려 그해 10월에 쳐들어 왔다. 백제군은 순식간에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자 김유신이 병력 1만을 이끌고 나가 대적하였으나 열세였다. 그때 김유신 휘하의 비녕자가 아들 거진과 함께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 전사하자, 그들의 용맹에 힘입어 신라군의 사기가 되살아나 백제군을 격파하고 3천 명의 적을 죽이는 큰 성과를 냈다.
648년 3월엔 백제 장군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을 유린하며 휩쓸고 다녔는데, 요거성을 비롯하여 열개의 성이 무너졌다. 김유신이 나가의적과 대적하였는데, 김유신의 전술에 말려 백제군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쫓갸갔다.
649년 8월엔 백제 장군 은상이 다시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다시 출전시켜 열흘 동안 적과 대적하여 고전하다가, 도살성에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9천 명에 가까운 적군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듯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즈음, 김춘추는 아들 문왕과 함께 당에 들어가 있었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난 자리에서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하락을 받아 내고, 스스로 신라의 휘장과 복식을 당의 것으로 바구겠다고 약속했다. 또 사신 감질허가 당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자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래서 649년 정월부터 신라 백관이 모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고, 650년부터 당의 연호를 썼다.
당 태종이 죽자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태평송'을 올렸다.
한마디로 태평송은 지극한 '아부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는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신라는 고구려까지 가세하여 신라를 공격하면 회복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던지 당의 군사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김춘추가 스스로 당의 복제를 따르겠다고 한 것이나,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한 것도 모두 당의 지원을 받아 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김춘추가 주도한 이 같은 구애작전은 나중에 나당연합군으로 결실을 맺는다. 김춘추가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철저하게 무릎을 끓은 모습은 약소국 신라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진덕여왕은 재위 8년째인 654년 3월에 죽었고,사량부에 능이 마련되었다. 당 고종은 대상승 장문수를 사절로 보내 조문하였으며, 진덕여왕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보냈다.
진덕여왕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29대 태종무열왕실록(재위기간: 서기 645년 3월~661년 6월, 7년 3개월)
1. 통일의 야망을 이룬 무열왕과 백제의 몰락
태종무열(太宗武烈)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장남 김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 소생이다. 603년에 태어 났으며, 아버지 김용수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 천명부인이 삼촌인 김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다. 24세 되던 626년에 화랑도의 풍월주에 올랐다. 이후 이찬의 벼슬에 올라 진평,선덕,진덕여왕 대의 대외 정치 및 외교 문제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다.
642년에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고, 맏사위 품석(큰딸 고타소의 남편)을 비롯해 죽죽,용석 등을 참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김춘추는 외교 관계를 통해 백제를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담판에서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 땅을 내놓아라'고 하자 거절했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다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거짓으로 연개소문의 제의를 수락한 뒤, 간신히 신라로 돌아올 수 잇었다.
647년에는 김유신 등과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활을 했다. 진덕여왕 즉위 이후에는 친당 정책을 주도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을 방문하여 당태종 이세민에게 병력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 냈다.
한편, 당시 화랑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유신 등의 가야파 군벌과 손을 잡고 막강한 힘을 형성했으며, 654년에 진덕여왕이 죽자, 신하들의 지지를 얻어 52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당시, 신하들은 상대등 알천에게 섭정을 하라고 요청했다. 알천은 김유신보다 앞선 세대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고, 백성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선덕여왕 시절에 임종, 술종,호림,염장,유신 등 당시 가장 이름 있던 장수들과 남산 우지암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고 있던 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자 다른 이들은 놀라서 일어섰으나,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호랑이를 때려 잡았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용맹과 기개가 높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전쟁에 나가 패배한 적이 없는 뛰어난 전술가 였으며 진덕여왕 시절엔 상대등에 임명된 덕망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그런 그를 높이 평가하여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알천은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는데, 그는 사심이 없고, 형세 판단이 정확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은 이미 늙었고, 내세울 덕행도 없다면서 김춘추를 추천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김춘추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정치인이었으나 폐왕 진지왕의 손자라는 사실 때문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많아 처음부터 왕위 계승 대상에서 배제돤 상태라 왕위 계승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영걸 알천이 그를 추천하고 덕망이 높던 김유신 또한 지지하자, 대세가 김춘추에게 기울어져 가까스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무열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 심라를 노리고 있었고, 일본마저 백제와 연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라의 희망이라곤 오직 바다건너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주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655년 정월,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군사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고, 졸지에 서른세 개의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른다. 무열왕은 급히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당 고종은 영주 도독 정명진과 중량장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덕분에 고구려는 급히 신라 전선에서 발을 뺐고, 백제의 의자왕도 물러났다.
그 무렵, 백제에서는 의자왕이 초반의 승리에 도취되어 점차 향락에 빠지면서 신료들은 임자파와 성충파가 갈려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의자는 임자파를 지지하는 바람에 성충이 감옥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성충은 술과 향락에 빠진 의자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하다가 미움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다 죽었다.
그런 가운데, 당은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자 다음해인 658년 설인귀와 정명진을 재차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고, 659년에도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고구려의 연개소문 전술에 말려 계속 패전만 거듭했다. 그래서 무열왕이 요청한 신라에 대한 당의 원군 파병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무열왕은 660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노심초사 당의 원군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해 3월 당 고종은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당에 숙위하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파견했다. 이에 무열왕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소정방은 7월 10일 백제 도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김유신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소정방과 연합하게 하고,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7월 9일 김유신이 황산벌로 진격하니, 백제의 맹장 계백이 오천 결사대와 함께 대적해 왔다. 김유신과 품일 등이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눠 네 번이나 공격을 감행했지만, 적진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김유신의 아우 흠순은 자신의 아들 반굴에게 적진을 돌파할 것을 명령했으나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에게 적진을 뚫을 것을 명령하여 돌진하였으나 계백은 어린 관창의 용기가 가상하여 포로로 잡힌 관창을 돌려 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돌아온 즉시 다시 말머리를 돌려 계백의 진영으로 뛰어 들었다. 계백이 그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 벤 머리를 말안장에 매에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내자 되돌아 온 관창의 머리를 보고 신라군은 비분강개하기 시작했다.
신라군이 관창의 머리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진격하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계백도 전사했다.
계백이 무너지자,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7월 12일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당과 신라 연합군은 웅진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휘하 장수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무열왕은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금돌성에서 나와 주연을 베풀고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이 마루 아래에 앉아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을 따르니, 백제의 조평 및 여러 신하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백제 병력이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었다. 임존성에는 흑치상지 등이 웅거하고 있었고,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에서 병력을 집결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백제 왕조는 회복할 힘을 잃고 있었다.
무열왕은 마침내 일생의 숙원이던 백제 병합에 성공했으나, 백제의 잔병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한 때인 661년 6월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호는 무열이며 태종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능은 영경사 북쪽에 마련되었다. (끝)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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