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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선덕여왕실록)

두바퀴인생 2009. 11. 3. 17:12

 

 

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7 (선덕여왕실록)

 

 

 제27대 선덕여왕실록(재위기간 : 서기 632년 정월~647년 정월, 15년) 

 

 

1.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선덕여왕과 신라 내정의 혼란

선덕(善德)여왕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고 아름은 덕만이며, 마야부인 김씨 소생이다. 진평왕은 첯 왕비 마야부인에게서 두 딸을 얻었는데, 첯째는 천명이고, 둘째는 덕만이다. 천명은 폐위된 진지왕의 첯 아들 김용수에게 시집갔으므로 관례상으로는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를 사람은 사위 김용수였다. 하지만 용수는 폐왕의 자식이므로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용수는 천명이 자신의 동생인 용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동생 용춘에게 천명을 부탁하고 얼마가지 못하고 병으로 죽어 버렸다. 덕만은 공주 시절 진지왕의 둘째 아들 용춘과 결혼하여 살았다. 507년에 나이 60에 가까운 미실이 병으로 죽고 난 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화백회의의 지지를 얻어 둘째 딸 덕만을 후계자로 정했다. 덕만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은 마야부인이 죽고 승만부인이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을 때였다. 승만은 왕비에 책봉된 후에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그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결국 632년 정월에 진평왕이 죽자,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용춘에게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즉위 후에는 흠반과 을제가 보태져 남편이 세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삼서제도'를 따른 것이었는데,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갖지 못할 때, 남편을 셋 얻게 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였다. 선덕여왕은 즉위년 2월에 그들 중에서 을제에게 국정을 맡겼다. 용춘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스스로 궁을 떠나겠다고 선덕여왕에게 허락을 청했다. 선덕여왕은 언니 천명공주가 남편 용수를 사별하고 자신의 남편인 용춘을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궁을 떠나 천명과 살도록 허락했다.

 

선덕여왕 대에 와서 신라는 당과의 유대 관계를 한층 더 강화했다. 즉위년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이듬해 7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635년에 사신을 통해 이세민의 신임표를 보내면서 선덕여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진평왕의 봉작을 잇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 이세민은 여자가 왕이 되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봉작 내리는 것을 3년이나 질질 끌면서 허락을 미루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 이세민에게 매우 불쾌한 감정이 생겨 겉으로 표시는 할 수 없었지만 사사건건 은근히 비꼬며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신왕이 여자임을 내세워 봉작을 내리는 일을 질질 끌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은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런 심사를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640년에 당나라 국학에 신라 왕실의 자제들을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등 관계 회복에 주력하였다. 사신이 갈 때마다 이세민은 불쾌한 언사를 서슴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신라 사신은 당나라에 대해서 대꾸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지속적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고 고구려의 위협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선덕여왕 재위 2년(633년) 8월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고, 636년 5월에는 장군 우소를 앞세워 독산성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신라의 맹장 알천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전멸시켰다.

 

이 싸움 이후 한동안 백제는 조용해졌다. 백제 무왕이 나이가 늙어 전쟁을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번에는 고구려가 638년 10월에 북쪽 변경을 침입해 왔고, 11월에는 칠중성(임진강변)으로 침입해 왔으나 알천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이렇게 고구려의 침입이 잦아지자 선덕여왕은 하슬라(강릉)를 북소경으로 삼아 사찬 진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 무렵, 백제의 무왕이 죽고 의자가 왕위에 올랐다. 젊은 왕 의자는 군대를 정비하여 642년 7월 신라에 대대적인 총공세를 감행해 왔다. 그 결과 한 달만에 신라의 서쪽 변경 40여 개 성이 함락되고 그틈에 또 고구려가 침입하여 당항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같은 달에 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 도독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을 죽였다.

 

 

대야성 함락에 놀란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했으나 고구려 연개소문은 신라의 죽령 이북 땅을 내주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말로 김춘추를 농락했다.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제의를 거절하자 그를 감옥에 가둬버렸다. 난감해진 김춘추는 일단 땅을 내주겠다고 약속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신라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선덕여왕은 고구려,백제,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같은 운명임을 깨닭고 급히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지원해 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은 신라 사신을 농락하면서 노골적으로 당의 위세를 과시하는 등 군대 파견은 커녕 불쾌한 언사에도 아무런 애꾸도 못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644년 선덕여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하자, 이세민은 마지못해 고구려에 당의 사신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 중에 신라가 고구려 땅을 빼앗아 간 사실을 들면서 거절했다.

 

그 무렵,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회복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45년 3월 백제군이 신라 변경을 쳐들어 오자 김유신이 나가 적 2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그해 5월, 당의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선덕왕은 군대 3만을 동원하여 협공하였다. 그 틈을 노려 백제가 신라를 급습하여 일곱 성을 점령했다.

 

이렇듯 게속해서 백제에게 당하자 조정은 크게 흔들렸고, 심지어 반정 세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반정의 명분은 여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제와 전쟁에서 계속 땅을 빼앗기고 나라가 피폐헤졌다는 것이었다. 사실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앓아 누웠고 정사를 잘 챙기지도 못했다. 거기다 대외 전쟁은 계속되었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런 와중에 승려 자장의 제안으로 645년 황룡사 대탑을 건축하는 등 전쟁 중에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드는 공사를 하였고 그런 사실들이 반정세력에게 명분을 주고 말았다. 충성스럽던 비담과 염종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647년 정월에 명활산성을 장악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은 645년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다. 그 때문에 그의 반정에는 많은 군대가 동참하였으나 쉽게 서라벌 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서라벌에서 근왕 세력과 반정 세력이 대치한 가운데 군세가 불리한 근왕세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차에 김유신과 알천 등의 활약으로 결국 비담이 붙잡히고 내란은 종식되었다.

 

선덕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던 중으로 반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자, 병이 악화되어 내란 중인 1월 8일에 생을 마감했다.

 

선덕왕은 아기를 갖지 못햇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남편이었던 용춘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흠반과 을제가 동시에 남편으로 관계를 하였으나 아기를 잉태할 수가 없었다. 그들 모두 유부남으로 본 부인과 이혼하고 선덕을 섬겼다. 그러나 후에 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왕위를 잇는 것은 용춘이 한때 선덕왕의 남편이었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다.

 

선덕왕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언하고 무덤의 위치까지 정해 뒀다고 한다. 현재 선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보문동이 바로 그곳이다.

 

선덕왕은 공주 시절 김용춘과 결혼하였고, 그 때문에 용춘의 아내였던 선화공주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또 선덕왕은 삼국유사에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이 전해지면서 꽤 총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선덕왕을 높이기 위한 과장된 면이 있으며 사실과는 다르다고 판단된다.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것은 장군 알찬의 지략이며, 비담의 무리가 일으킴 반정의 명분이나 황룡사 대탑 건립 같은 무리한 공사를 강행한 것은 반정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                                      *                                      *

 

지금까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선덕왕까지 살펴 보았고 미실에 대해서도 살펴 보았다. 신라 왕실의 진골과 성골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무질서한 근친간의 결혼, 의제가족제도, 마복자 제도 등 신라 사회의 결혼 풍습은 혈통에 혼란을 가져오며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모두를 섬겼고 동륜태자,사다함,세종 등 당대에 내노라 하는 왕족들이 앞다투어 미실을 탐하였고 미실 또한 권력욕에 사로 잡혀 마음껏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진평왕은 미실에게 시달리면서도 왕권을 유지하였고 미실이 나이 60세에 죽고 나서도 24년을 더 왕좌에 있다 죽었다.

 

천명공주는 드라마에서 처럼 일찍 죽지 않고 오랫동안 살면서 첯 남편이던 용수가 죽자 평소 흠모하던 그의 동생 용춘에게 시집을 가서 속세를 떠나 그와 같이 바둑이나 두면서 여생을 산궁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덕만은 용춘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자 즉위 후에 유부남이던 사람 두 명의 남편을 더 만들었다. 그래도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비롭게 보였을 지는 몰라도 총명하지도 않았고 병약하기만 하여 국정을 제대로 돌 볼 수가 없었다.

 

미실이 60세 나이로 죽고 그후 진평왕이 24년을 더 재위에 있다가 죽으면서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 덕만은 1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당나라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계속되는 대외 전쟁으로 나라 재정이 피폐해 졌으며 진흥왕 대에 확장하였던 많은 땅을 백제와 고구려에 빼앗겼다. 병약하여 정사를 제대로 돌 볼 수가 없었고 후계자를 생산하지도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황룡사 대탑을 건축하는 등 내치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은 명분이 있었는데 선덕왕의 전쟁,대외관계,내치 등 정치역량이 부족하였고 총명하지도 못했다는 사실과 병약한 몸,그리고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석녀였다는 사실이다.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을 섬겼고 나이 40에 진평왕이 열세 살에 즉위한 579년부터 진평왕을 섬기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나이 60이 되어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거의 20년간 신라 조정을 자지우지한 시기다. 미실이 60세 나이로 죽은 해가 607년이며 진평왕은 미실이 죽은 이후 24년을 더 재위에 있다가 죽으면서 선덕왕이 즉위한 해가 632년이다. 이를 볼 때. 미실과 선덕의 나이차는 대략 20~30년 이상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20대 처녀와 50대 아줌마가 우리 드라마에서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 재위 36년, 진지왕 2년, 진평왕 52년,선덕왕 15년, 진덕왕 7년, 태종무열왕 7년의 재위기간과 치적을 살펴보면 선덕여왕의 치적은 재위기간 15년에 비해서 이룬 것이 별반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여왕에 불과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  TV 역사 드라마는 역사를 왜곡하여 허구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 드라마가 허구와 과장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주몽','용의 눈물','불멸의 이순신','대조영'은 그래도 비교적 역사 내용에 충실하게 드라마가 제작된 작품들이나, '연개소문'은 한시대에 나타난 풍운아로, '천추태후'는 드라마 전체가 엉터리 내용으로 사랑과 권력투쟁을 그리고 있며 시청자들과 청소년들의 역사 인식에엄청난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는 관련 역사 학회와 공동으로 조언을 받고 있지만 드라마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역사 조작에 합류하고 있다. '역사는 역사고 드라마는 드라마'라고 하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선과 악으로, 백과 흑으로 구분하려는 이분법적 사고로 충동시키고 있으며 시청자들은 자신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환상에 빠지고 있다. 이렇듯 드라마 작가들의 심각한 역사 왜곡은 시청자들의 역사의식을 또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초동-

 

 

 

<관련 엉터리 칼럼>

 

방송 첫회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MBC 창사 48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선덕여왕’(극본 김영현 박상연 연출 박홍균 김근홍)의 주인공 ‘미실’의 나이에 대한 궁금증이 네티즌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 왕을 섬기며 당대를 사로잡았던 여걸로 극 중 주인공 덕만(이요원 분)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정적으로 군림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톱스타 고현정이 미실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드라마 인기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고현정은 황후 자리를 탐내 어린 진평왕(백종민 분)의 아내 마야부인(박수진 분)을 사지에 내모는 악녀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문제는 ‘미실’의 나이. 드라마 속에서는 미실의 동생 미생(정웅인 분)의 대사를 통해 미실이 진평왕보다 약 15세 가량 연상으로 그려진다. ‘미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한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미실이 550년 께 제 2대 풍월주 미진부와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의 딸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말년에는 중이 됐다고 알려졌으나 사망한 해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이 서거할 무렵인 576년 미실의 나이는 26세다. 이후 진지왕이 약 3년간 왕위에 올랐으나 579년 폐위돼 진흥왕의 손자이자 진지왕의 조카인 진평왕이 바로 왕위에 올라 632년까지 재위한다. 천명과 덕만이 태어난 정확한 해는 기록돼 있지 않다.

드라마가 전개되는 정황상 진평왕이 재위 첫 해 덕만과 천명(이요원 분)공주를 낳았다면 이 때 미실의 나이는 어림잡아 29-30세 가량으로 추정된다. 즉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632년에는 미실의 나이가 약 80세에 이른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당시 신라인의 평균수명을 감안할 때 미실이 80세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문제를 언급한 블로거 ‘타라’는 “역사 속에 기록된 인물들의 나이를 계산했을 때 미실은 덕만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선덕여왕파와 미실파의 대립구도가 주구도인 드라마에서 그럴 일(덕만이 왕위에 오르기 전 미실이 사망)은 없을 것이다. 즉 애초에 주인공들의 나이 계산을 잘못했고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는 얘기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MBC 드라마국 관계자는 이같은 문제제기에 “대부분의 역사사극이 그렇듯 ‘선덕여왕’ 은 주인공 덕만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과정을 그린다. 즉 선덕여왕 재위 기간 후는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80대 미실은 비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사극은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다. 따라서 드라마 속 ‘미실’의 나이는 적절히 융통성 있게 그려질 것이다”이라고 덧붙였다.

mulgae@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