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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여름 1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면산의 여름 1

두바퀴인생 2009. 8. 14. 12:57

 

 

우면산의 여름 1

 

 

 

 

 

지금 우면산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으며 초목들이 대부분 자신의 멋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는 시기이다. 한창 무더운 날씨지만 강한 비바람의 영향으로 키가 큰 나무들이 넘어지고 뿌리가 뽑혀 쓰러졌다. 특히 20-30년생 아카씨아 나무들이 많이 넘어졌는데 아카씨아 나무는 뿌리를 땅속 넓게 퍼지지만 깊이는 대체로 얕다. 그런데 조밀하게 심은 조림 탓에 성급하게 자라다보니 뿌리 깊이에 비해 키가 너무 높이 자란 관계로 비바람이 조금만 몰아쳐도 넘어지기 쉽다. 지난번 장마에 여러 나무들이 산책로를 덮쳐 길을 막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정리되어 산책에는 어려움이 없다.

  

여름이 절정을 달리고 있는 우면산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거나 기쁘게 하는 이야기도 곁들여 블로그를 풍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다. 모든 것을 선택한 이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항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는 그 순간에는 후회도 많고 회한도 많을 것이다. 그때 부터라도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방법을 강구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인생을 완벽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생은 시행착오와 실수 투성이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러한 오류에 대해서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만이 차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지난번 폭풍우에 뿌리체 넘어진 아카씨아 나무

 

간도협약이 있은지 벌써 100년째라고 한다. 어떤 남의 나라 땅을 점령하여 100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점령국인 그 나라에 귀속된다고 한다. 다음달 9월 4일이면 100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일부 뜻있는 재외동포와 인사들이 국제기관에 소송을 재기하도록 준비를 하였으나 정부 당국의 명의로 제출되지 않으면 인정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그래서 정부 당국에 수 차례 청원을 하였으나 정부는 북한,중국,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묵묵무답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으며 다음달이면 시한이 종료되는 날이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청국과 간도 지역에 대한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이 달라 국경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어 일제는 만주의 조차권을 청국으로 부터 얻어내기 위해서 백두산 정계비를 몰래 없애버리고 청국과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청국 땅으로 인정해 버렸다. 이것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며 우리정부로서는 절대로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될 사안이다.

 

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 지금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 동쪽 끝에 있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거의 해당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 한국에서 간도라고 하는 이 지역을 중국에서는 옌지다오〔延吉道〕라고 한다. 이 지역 곧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또는 동간도)라고 칭하고,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하류유역, 즉 지금의 지린성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에 해당되는 곳을 서간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간도지방이라고 하면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이 지역이 청(淸)나라의 발상지에 가까워 청나라 왕조가 봉금(封禁)의 땅, 즉 이주를 금하는 무인지대로 삼았으므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 해서 붙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간도(墾島)·간도(艮島)라고도 적었는데, 앞의 것은 조선 후기에 조선 농민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고, 뒤의 것은 조선의 정북과 정동 사이에 자리잡은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형은 남서쪽에 백두산(2,744 m)을 주봉으로 하는 창바이산맥[長白山脈]이 달리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북한과의 국경으로 두만강이 흐르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다리링[大麗嶺]·라오예링[老爺嶺]·장광차이링[張廣才嶺]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5월 초순까지 강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하여 지린성에는, 거의 북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설치되어 있고, 압록강측의 서간도에 해당되는 지역에는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두 지역을 비롯한 지린성에는 104만(1982)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구의 과반수를 넘는 이들은 조선족 특유의 생활·풍습과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1.역사

원래 간도는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며, 발해도 이곳을 영토로 삼았다. 고려 때와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후 조선 후기 숙종 38년(1712)에는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졌으며, 철종 말·고종 초부터 한국인의 개간과 이주가 시작되었다. 특히 1869년 무렵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지방으로 들어갔다. 본래 간도지방은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에 가까워 봉금지역으로 정하여 만주족 이외의 입식(入植)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이주한 조선인에 의해서 개간이 진척되어, 1882년 청나라 정부가 한인(漢人)에게 개간을 공인해 주었을 때는 이미 많은 땅이 개간된 뒤였다. 그 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간의 간도지방 국경문제는 미확정이었으나, 조선의 외교권을 쥐게 된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조선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주장하는 국경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무렵인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침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또는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찾아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이 급증하였는데, 이때(1910년 9월∼1911년 12월) 간도로 간 사람은 2만 5000여명이나 되었다. 또 일제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조선 농민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1926년에는 간도지방의 조선인 호수는 5만 2881호(중국인 호수는 9912호)였고, 농토는 전체의 52%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한국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건너간 간도는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투쟁의 기지가 되었다. 많은 민족운동가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1910년대의 의병투쟁, 20년대의 항일독립군 등으로 일관해서 무장항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주사변(1931)을 전후한 시기에는 간도의 한국인은 일본의 침략주의와 중국 관헌의 대항 사이에 끼어, 예를 들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같은 복잡한 고난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항일투쟁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1945년 8월에는 중공군이 간도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49년의 중공정부 수립 후 52년에 연변조선족자치구, 55년에 자치주가 되어 조선족의 민족자치가 인정되었다.

 
2. 간도에서의 항일독립운동

<기지 건설>1910년 무렵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간도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결과, 서간도에서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고, 북간도에서는 명동촌(明東村)과 왕청현(汪淸縣)의 나자구(羅子溝)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가 세워졌다. 삼원보에는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항일 민족지도자들이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군사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명동촌에는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한편으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나자구에는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간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또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의 미산〔密山〕에는 신민회가 세운 무관학교에서 1500명 가량의 한국교포청년이 훈련받으며 독립전쟁에 대비했다.

<독립투쟁의 전개> 한국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무렵 간도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평화적인 시위였던 3·1운동의 한계를 느낀 한민족 사이에서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론이 대두되었고, 당시 만주에 거주하던 모든 교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잇달아 편성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 현지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며, 1919년과 20년의 2년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국 국내에 침투하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조기에 제거하려고 1920년 10월에 조선에 주둔해 있던 2개 연대의 병력과 시베리아 주둔의 병력 일부를 동원하여 이른바 간도출병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지역인 지린성과 옌지다오 일원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싸움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었는데, 이 두 전투에서 독립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봉오동으로 유인, 기습하여 157명의 전사자와 300여명의 전상자를 내게 한 전투였고,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통솔한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교전을 벌여 연대장을 포함한 적군 1200명을 사살한 승전이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 독립군이 만주의 동포들이 전적으로 지원해 준 인적·물적 자원으로 이 대규모의 독립전쟁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간도지역의 동포를 비롯한 재만교포와 모든 한민족에게 독립투쟁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군대를 대거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으나, 주력부대는 이미 소만국경지대의 미산으로 이동한 뒤였으므로, 무고한 재만 한국인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산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이곳에서 약 3500명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1921년에 소만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으로 옮겨 갔으며, 알렉세브스크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1922년 말 무렵부터 다시 간도지역으로 복귀하여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이 일제의 완전지배하에 들어간 1933년에 한국독립군은 활동을 중지하였고, 끈질긴 투쟁을 하던 조선혁명군도 38년 해체되었다.

3. 현황

간도지역에는 1930년대에 조선족이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며, 현재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의 과반수인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행정중심지는 옌지〔延吉〕시이며, 그밖에 투먼〔圖門〕와 옌지·왕칭〔汪淸〕·훈춘〔琿春〕·허룽〔和龍〕·안투〔安圖〕·둔화〔敦化〕의 6현(縣)이 있고, 압록강 쪽에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임업이 활발하여 옌지시[延吉市]에서는 훈춘재[琿春材]·젠다오재[間島材]라고 하는 목재를 산출한다. 옌지 분지는 한민족이 최초로 벼를 이식한 곳으로 수도작(水稻作)이 이루어지며, 그 밖에 콩·수수·옥수수·보리 등도 재배된다. 광물자원은 석탄·유모혈암(油母頁岩)·구리·납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룽징[龍井]에는 제강, 라오터우거우[老頭溝]·허룽[和龍]에는 탄광, 톈바오산[天寶山]에는 구리·납 광산이 있다. 한편 분지와 계곡은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젠다오미〔間島米〕의 산지이며, 수수·콩·담배와 인삼·녹용 등의 한방약재, 목재 등이 많이 난다. 탄광의 개발과 철강·기계·금속·방적 및 제지업이 성행하고 민족색이 짙은 도자기, 조선비단을 생산한다. 또 연변대학 등 조선족 특색을 살린 교육·문화시설이 있다.<자효출처 http://www.dong-gu.ms.kr/kek/학습자료실/사전/용어사전/간도.htm>

 

 

 

지금의 간도 땅은 우리 땅이었다. 올해는 간도가 중국 땅으로 넘어간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해이다.

아래는 간도 땅에 대한 이야기로 <만물상>의 시론을 옮겨 보았다.

 

                   

 

 

<1885년 간도(間島) 국경회담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 대표가 간도 땅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국경선은 한 치도 내놓을 수 없다"고 맞섰다. 청나라 측은 1712년 세운 백두산 정계비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우겼지만 이중하는 송화강 지류라고 끝까지 주장해 회담은 결렬됐다. 간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구한말 청의 위세에 뺏길 뻔했던 간도를 지켜낸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했다.

이중하는 1910년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고향인 경기도 양평으로 내려갔다. 일제는 그에게 훈장과 퇴직 은사금 3000원을 내렸지만 그는 분노하며 돌려보냈다. 일제가 후작 작위까지 줬지만 그는 "눈이 멀어 받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일제가 그를 붙잡아다 눈에 송충이를 집어넣었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고 자손들이 전한다.

백두산 정계비는 1931년 7월 28~29일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다. 백두산 조사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이 정상에 올라갈 때 본 비석이 내려올 때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간도파출소에 근무했던 일본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쿠는 목격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책에 적었다. 시노다는 일본이 국경수비대를 시켜 만주 침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정계비를 없앴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9월 4일은 일제가 만주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긴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다. 국제법상 한 나라가 어느 땅을 100년 동안 실효적으로 지배하면 영유권이 인정된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이 원천 무효라고 해도 중국이 100년을 지배하는 9월 4일 이후는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소용없게 된다.

 

          

재미교포 재야사학자 폴 김이 작년 4월과 지난 6월 우리 정부에 "국제사법재판소에 100년 시효를 중단시키는 소송을 내 중국의 간도 영구소유를 막아야 한다"는 탄원서를 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국가와 유엔 단체만 소송을 낼 수 있는데 정부는 나서지 못하고 있다. 통일이나 북핵 등 여러 변수가 얽혀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까지 자기 역사라고 억지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배경엔 간도문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도를 역사 속 땅으로만 안이하게 생각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민족의 피땀이 서린 간도를 이대로 영원히 중국에 주고 말 겁니까." 폴 김의 절규가 가슴을 찌른다.>

 
이제 간도 땅은 영원히 중국의 영토로 귀속될 전망이다. 정부에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중국 땅으로 국제법상 인정될 것이라 한다. 비록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조약이지만 나라를 잃고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으로 한반도가 갈라지면서 결국은 강대국에 의해 소중한 우리의 땅은 영원히 남의 나라 땅으로 넘어간다는 안타까운 것이다.
 
만주가 우리들 민족의 놀이터라면 간도는 당연히 우리들의 영토이어야 한다. 남의 주권을 탈취하고 그나라 땅을 임의대로 할양한 일제의 만행은 두고두고 우리들에게 한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일제를 식민지화하여 혹카이도를 소련에 넘겨준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힘없고 나라잃은 민족들의 설움이다.
 

간도협약 (間島協約)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 ·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특히 1881년 10월 청이 간도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여 청나라 사람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면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문제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에 대해 간도지역 조선농민의 본국송환을 요구해 옴에 따라 표면화된 국경분쟁은 양국이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의 국경회담을 가졌어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즉, 이에 조선정부는 답사 결과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쑹화 강 상류이며,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의 제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1885년 간도 일부지방의 조선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자, 우리 정부는 다시금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요청함으로써 간도귀속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제1차 회담인 을유감계회담은 우리측의 제안으로 1885년 11월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1888년까지 3차례의 회담이 있었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를 투먼 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투먼 강을 가리킨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후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에 따라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국토임을 확신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조처하였다. 이에 따라 청나라 측과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자 조선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했다. 그러면서 양국은 선후장정이라는 잠정적 문서를 통해 정확한 감계가 있을 때까지 종래와 같이 투먼 강을 경계로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청나라에 대하여 전쟁기간에 감계문제의 재개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감계문제는 중단되었다. 1907년 간도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무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1909년(융희 3) 9월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쳬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 ·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이루되, 일본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 ·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국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 ·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간도반환 소송가능시한 3주밖에 안남아" 재미동포 피맺힌 절규

  • 입력 : 2009.08.12 09:07 / 수정 : 2009.08.12 11:38
‘간도반환 소송가능시한 3주밖에 안남아“ 재미동포 피맺힌 절규
“우리의 땅, 간도를 이대로 놔둘 겁니까? 이제 3주가 지나면 국제법상 간도는 영원히 중국의 땅이 됩니다.”

한 재미동포가 우리 민족의 고토 간도를 수복하기 위한 피맺힌 절규를 하고 있다. 주인공은 뉴욕의 폴 김(59·김태영) 박사. 김 박사는 10일(현지시간) “오는 9월4일이면 중국이 ‘우리 땅’ 간도를 실효 지배한 지 꼭 100년째가 된다. 100년은 국제법의 관례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최후 시한이다. 그 시한이 지나면 우리는 간도를 돌려달라는 합법적인 주장조차 제기할 수 없게 된다”고 관심을 촉구했다.

간도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9월4일 당시 청나라가 일본과 '간도협약‘을 맺고 이 지역의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조선땅 간도를 넘겨주었다. 당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상태에서,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사용, 그 자체가 무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1965년 일본 정부가 간도협약을 무효로 한다는 국제사회에 선언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이 간도를 현실적으로 점유하고 있지만 나중이라도 되찾을 근거를 만들기 위해선 국제법상 법률 시효 기한인 100년 안에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 100년 초읽기에 들어간 현재까지 남북한 어느 정권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 박사는 “만일 누군가 소송을 제기하면 100년의 법률 시효를 묶어 둘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사비를 들여서라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하려고 많은 법조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국제법상 소송 주체는 국가나 국제연합 관련 단체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 박사는 지난해 4월15일자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영토 회복에 따른 국제사법 재판건’이라는 제목의 탄원서를 78명의 뉴욕 뉴저지 한인들의 서명지와 함께 발송했다. 김경근 뉴욕총영사와 UN의 반기문 사무총장에게도 참조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답신 등 일체의 반응이 없었고 김 박사는 다시 지난 6월15일 서한을 재발송했다.

이번에는 지난해 탄원서는 물론, 청·일 간 간도협약 무효 확인 요청 및 국제사법재판소송건이라는 소장을 한글과 영문으로 만들어 보냈다. 양식을 완벽하게 갖췄으니 대한민국 관인만 찍어 사법재판소에 보내달라는 읍소였다.

김 박사는 “이명박 대통령께 7월31일까지 정부의 입장을 알려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했지만 이번 역시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제 간도는 갑론을박하고 탁상공론을 할 시간이 없는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영토라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민간단체에서 실행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보이고 있다.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일제의 왜곡과 한민족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1999년 ‘한민족 사관 정립 의식 개혁회’를 조직했다. 간도협약 99년을 맞은 지난해 9월에는 간도 문제를 풀기 위해 온 몸을 던질 각오로 ‘간도 되찾기 운동 본부’ 뉴욕 지부장을 맡았다. 뉴욕지부는 미국에서 유일한 간도 단체이다.

그는 “간도는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랴오닝성과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 지역을 통틀어 부르며 한반도의 3배 크기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백두산 정계비를 비롯, 숱한 증거가 있다”며 “소위 서북공정의 이름으로 신장위구르 지역과 티벳에 신경 쓰던 중국이 간도를 영구히 저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것이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 역사 왜곡이었다”고 설명했다.

재야 사학자인 그는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Ph. D)를 받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준학사부터 박사까지 다양한 학위를 갖고 있는 독특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한국에서 화공학 학사 학위를 받고 모 전문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했다. 이후에 고려대 대학원에서 무역학 석사학위를 받고 잠시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서른살이 넘어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에게 고려대 대학원에서 논문을 지도한 김완순 교수가 “기왕에 공부하려면 학사 과정부터 하는 게 좋다”는 권유에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대학 과정으로 시작하는 만용(?)도 부렸다.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로 못할 일이었어요. 몰랐으니까 그 공부를 했지요. 하지만 공부하고 나니까 어떤 미국인하고 얘기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생기더라구요.”

내친 김에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쳤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성에 안찼던지 플러싱에서 교육 사업을 하면서 NYU(뉴욕대)에서 TESOL까지 공부하는 등 지칠줄 모르는 학구열을 불태웠다. 스스로도 책읽고 공부하는 게 취미라고 하다시피 어찌보면 40년 동안 공부만 한 셈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에 김 박사는 남은 인생을 걸고 있다.

매주 토요일 자신의 강의실에서 무료 역사강연회를 열고 있는 그는 “간도 문제는 민족의 자존심과, 후손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일제에 ‘도시락폭탄’을 던지고 산화한 윤봉길 열사의 심정으로 모든 걸 걸겠다”며 뜻있는 이들의 동참(doctorkim@gmail.com)을 바라고 있다.

 

 

 

 쓰러진 아카씨아 나무

 

남과 북이 반토막 난지도 어언 반세기 이상이 흘렀다. 남과 북은 이념도 다르고 사상도 다르고 체제도 다른체 지금까지 서로 적대시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나라! 서로 다른 정치체제속에 남북의 이질적인 성향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가고 있다. 국가도 국기도 서로 다르고 언어도 변질되어 가고 있다. 아래는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 교수의 민족의 노래 아리랑에 대한 시론이다.

 

평양의 아리랑, 윤밴의 아리랑

 
< 분단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과 북을 관통하는 민족의 노래는 단연 아리랑이다. 공식적으로도 그렇다. 1991년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면서 한반도기와 아리랑이 남북한을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대회에서 남한의 현정화와 북한의 이분희로 구성된 코리아 여자팀이 우승했을 때 시상식장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사실 아리랑을 공동의 국가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다. 64년 도쿄 올림픽에 파견할 단일팀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던 63년 1월 스위스 로잔 회담에서 남북한은 아리랑을 국가로 합의했던 것이다. 다만 단일팀 파견이 무산되면서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국제무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남북한의 친선 경기며 남이 북을 혹은 북이 남을 응원하는 국제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한반도기가 펄럭이면서 아리랑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러나 2002년 한반도 남과 북의 하늘에는 서로 다른 아리랑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새롭게 태어났던 것이다.
 
 
                                            2002년 윤도현 밴드 공연 모습

남쪽의 아리랑은 월드컵의 흥분과 감격 속에서 재창조되었다. 기존의 느리고 슬픈 가락은 윤밴(윤도현 밴드)에 의해 록 버전으로 바뀌었고, 그 강렬한 비트로 아리랑은 민족의 희망과 성취를 낙관하는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아리랑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 터져라 불렀고, 부르면서 우리 내면에서 폭발하는 힘을 느꼈다. '오 필승 코리아'가 월드컵 선전을 위한 응원가였다면, 아리랑은 우리의 저력을 확인하고 도약을 확신하는 찬가였다. 미래를 위한 아리랑, 희망의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그때 평양에서도 아리랑은 새롭게 태어났다. 2002년 4월 29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평양 능라도의 5·1 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정식 명칭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었다. 카드섹션과 매스게임이 약 90분간 어우러지는 이 공연에는 유치원생까지 포함된 어린 학생 10만 명이 동원되었고, 8월까지 무려 넉 달이나 지속되었다.
 
  
                                                    북의 아리랑 공연
 

학생들은 수개월의 혹독한 연습을 견뎌야 했고, 공연 기간 중에는 오전 수업만 하고는 오후 내내 경기장에서 리허설을 해야 했다. 조명효과를 위해 공연이 해질 무렵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장기간 계속되는 고된 연습과 공연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내리쬐는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필자도 북측 안내원에게 학생들 먹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빵이랑 우유는 줍네다.” 그렇게 힘든 공연을 하면서 빵과 우유만 준다는 답도 기막혔지만, 빵이랑 우유 다음에 붙여진 조사 '는'이 전달하는 뉘앙스가 가슴을 더욱 막막하게 했다.

세계 최대의 매스게임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평양의 아리랑은 그만큼 분노의 아리랑이었고, 북한은 못 보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 선전했지만 보고 나면 평생 가슴 아플 아리랑이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UNCRC)가 아동의 인권 침해를 이유로 북한에 시정을 권고했을 정도다.

한창 경제난이 지속되던 2002년에 이런 장기간의 대규모 공연을 준비한 이유는 김일성의 90회 생일을 축하하고 그를 통해 체제를 결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준비 당시에는 김일성을 상징하는 '첫 태양의 노래'로 명명되었다가 김정일의 지시로 “조선이 어떻게 파란 많은 수난의 력사를 거쳐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으며 오늘은 어떻게 존엄 있는 민족으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보이기 위해 아리랑으로 변경되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을 상징했던 아리랑이라는 코드를 통해 체제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전환하려는 의도였고, 화려한 공연을 통해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기쁨으로 환치시키려는 정치적 환각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체제가 유지되고 주민이 결속될 리 없다. 문제는 식량이지 춤과 노래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주민을 먹일 능력이 없는 북한 당국으로서는 더 잦은 공연으로 주민의 불만을 눈가림할 방법밖엔 없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2005년 재개되었고, 1년을 쉰 후 2007년과 2008년 연속적으로 공연되었다.

그러고는 지난 월요일 다시 2009년의 아리랑이 두 달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답답할 뿐이고, 뻔히 보이는 희망의 길 즉 개방과 개혁의 길을 놔두고 언제까지나 이런 퇴행적인 방법을 지속해 나갈지 안타까울 뿐이다.>
 

 

 

폭풍우가 지나간뒤 우면산

 

북한의 기적

 

‘발트해 3국의 기적’을 아시는지.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세 나라가 1940년 소비에트연방 가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가 투표 하루 전에 발표돼 버렸다. 소련 국영 타스 통신이 미리 작성해 놓은 기사를 실수로 내보낸 탓이었는데 기적처럼 투표 결과와 일치했다. 물론 대답은 ‘찬성’, 독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소련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 천명이었다. 그야말로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타바리시 스탈린’의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7년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좀 민망했던지 다음 날 선거당국이 해명을 내놓았는데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그 이듬해 수립된 북한 정권은 그런 기적 만들기부터 받아들였다. 기적을 행할 수 없으면 국가지도자 자격이 없었다. 열네 살 때 ‘타도제국주의동맹’을 만들었고 열여덟 살 때 이미 주체사상을 창시해 조선 혁명의 길을 밝힌 김일성만이 그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해방도 되기 전인 1930년에 주체의 뜻을 품었다는 건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기적일 따름이다.

‘위대한 혁명 가계’ 김일성 가문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2세 김정일은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1942년 백두산의 밀영에서 김정일은 태어났다. 김일성이 1940년 소련 땅으로 넘어가 88특수여단에서 복무했으며 해방 후인 1945년 9월에 평양으로 돌아왔다는 건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성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니 이런 기적이 또 어디 있겠나.


 

                                                 김일성 동상


북한에는 김일성 가문 말고는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거의 없다. 안창호·신채호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자’일 뿐이다.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 김정일 세 사람만이 ‘백두산의 3대 장군’이요, 김일성의 부친과 모친 김형직과 강반석, 그리고 삼촌·외삼촌들만이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김일성 일가들이 북조선을 해방시킨 것이다. 실로 위대한 기적이다.

그러니 김일성이 죽었을 때 백학 떼가 그의 동상 위를 날며 슬퍼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며,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판문점 방문 때 행여 남측의 저격이 있을까 하늘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를 끼게 만들었다가 초소의 군인 앞에 다가서자 씻은 듯 걷히고 찬란한 햇빛이 ‘웅장한 모습’을 비췄다는 김정일 말고 누가 그 일을 밑겠나.

 

           

                                                        김정일의 시찰모습
그에 비하면 3세의 기적은 미약한 편이다. 클린턴이 태평양을 건너와 장군님께 사죄하게 만든 “김정운 대장의 지략”과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룩한 “세심한 지도와 배려” 정도다. 하지만 호랑이는 개를 낳지 않는다. ‘백두의 혈통을 이어받은 김 대장’의 기적이 곧 펼쳐질 게 분명하다. ‘3년 내 주택 10만 호 건설’ 같은 호언은 그걸 예고하는 작은 기적일 뿐이다.

공산주의 기적은 폭력이 낳는다. 그 힘이 셀수록 큰 기적을 만든다. 그걸 증명한 게 흐루쇼프다. 그가 전임자인 스탈린의 범죄상을 비판하는 연설을 할 때 누군가 외쳤다. “살아있을 땐 아무 말 못하다가 이제 와서 비난하는 게 부끄럽지 않소?” 흐루쇼프는 화난 표정으로 “누구냐”고 고함쳤다. 일순 장내는 얼어붙었고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제야 흐루쇼프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소? 내가 스탈린을 막지 못한 이유를.” 수백만 인민이 굶어 죽고 감옥만도 못한 북녘 땅을 사회주의 인민 낙원이라 믿게 만드는 북한의 기적도 그런 폭력에서 나온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북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종북 세력이 남한 땅에 존재하는 것도 가히 믿기 어려운 북한의 기적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서초동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