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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중국의 동북공정, 허구성의 핵심 열쇠1

 

중국의 동북공정, 허구성 핵심 열쇠 1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날조 사업을 지금 열심히 펼치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역사를 폄하여 장차 그들이 기도하는 의미를 알고 분쇄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우리들의 강력한 근거있는 항의와 국제 여론을 몰아 위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되?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릉비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이래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수천년을 찬바람 눈.비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리고 1870년대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어느 조선인도 그 비석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런 일이었다. 그 비석은 금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는 것이며, 신라통일 이래 고구려에 대한 역사연구와 역사서는 전래되는 것이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며, 조선의 많은 문헌과 보물을 도굴, 약탈 등으로 훔쳐간 중국,유렵,미국,일본의 어느 박물관이나 사료 보관소에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현지 답사를 통하여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지역의 모든 비석,성곽,궁성터,이동로,전투 현장,비문 글씨 내용,기와 조각,봉분 형태와 구조, 내부 벽화 모양과 묘비명과 글씨내용,현지 박물관/고서적,현지 주민 탐방,전래되는 야사, 지역명칭 유래, 그 지역 향토 역사서 등 다방면의 사료를 살피고 수집하며 현장에 대한 사진,동영상 촬영 등으로 근거를 �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의 나라 역사학자가 쓴 왜곡된 역사서나 참조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특히 일제시대 식민역사학자 이병도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국정교과서에 삽입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하여, 온 국민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무관심 하고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뿌리를 상실하게 만든 원흉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이병도의 제자들로 어느 역사학자도 제대로 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70년대 중반에 어느 육사 출신 육군 포병 중위가 전쟁사를 전공하였는데, 임관 후 전방 지역 GP에서 관측장교로 근무시 비무장 지대내에서 삼국시대의 전적지를 연구하다가 비무장 지대내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추가로 발견하여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뿌리도 못�고 파벌싸움만 하고 있을때이다.  

 

고구려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1870년대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포병 중위이며 첩보요원이었던 '사오쿠' 중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일본군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밀반출을 시도하였으나 집안현 지사 오광국이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이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면 비문은 일제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변조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1. 고구려의 건국기원

 

고구려 시조 주몽은 동명성왕은 추모왕이라고도 불리며 가장 오래된 광개토태왕릉비에 잘 나와 있다. 중국의 고서  <한서>,<후한서>,<위서>,<양서>,<수서> 등지에 나타나 있으며, 한국의 고서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지금은 전하지 않는 <단군기>,<구삼국사>가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사료 근거로는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 묘지문에 나타나 있어 가장 근거있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주몽의 출신지역에 대하여 중국 사서들은 북부여,동부여,부여 등 여러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북부여로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로 봄이 타당 할 것이다. 주몽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자의 자식이니 고구려를 천자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 단군이 창건한 고조선을 이어받은나라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중국의 고서는 고구려 민족을 예.맥족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여 동북아 만주지역을 지배하였던바, 주몽의 고구려가 부족을 규합하고 그 세력을 떨치며 한사군을 쫓아내고 나라를 세우니 바로 고구려이다. 부여도 건국영웅이 동명왕으로 해모수나 해부루로 추측을 하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으며 부여 동명왕이 태어난 사화가 고구려 주몽의 태어난 사화로 추앙 사용되면서 공식입장이 되었다. 부여의 잔존세력은 신예 고구려에 결국 합병되고 그로써 나라의 틀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2대 유리왕은 현도군에 소속된 고구려현을 점령하고 전한에서 전권을 행사하던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여 고구려는 신나라와 투쟁을 벌였다, 신나라가 왕망이 재위 15년만에 망하고 후한 광무제가 나라를 세웠다. 3대 대무신왕 때는 신나라를 뒤이은 후한의 요동태수의 공격을 받으나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들의 공격을 물리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무신왕의 맏아들 4대 모본왕은 한나라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하였는데, 한나라 요동태수 채용이 고구려와 화친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북평>.<어양>.<상곡>.<태원>은 <중국역사지도집> 제2권(진,서한,동한시기)에 따르면 <북평>은 지금의 '북경 서남쪽 하북성 만성현' 부근이며, <어양>은 지금의 '북경 동부지역으로 북경시 밀운현 부근'이며,<상곡>은 지금의 지금의 '화북성 회래현으로 북경 북쪽으로 중국 북방 전진기지였던 요충'이다. 그리고 <태원>은 지금은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로, 북 중국의 중심이자 훗날 당태종이 발원한 지역이다.

 

일본과 식민사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내용중 '초기내용 불신론'을 펴면서 고구려의 중원점령 치적을 폄하시키려고 하였다.중국측 사료에는 <후한서><광무제 본기 하>에 나오는데,"(광무제)25년(서기 49년)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략하였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구절이다. 고구려라고 쓰지 않고 맥인이라 쓴 것은 고구려에게 후한의 강역이 대거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고 거짖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 뒤에 "맥인은 예맥군인을 뜻한다"라고 주석을 달아 예맥족의 고구려 국가임을 나타냈지만 끝내 고구려라고 쓰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태원은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쪽으로 자칫하면 수도 낙양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 부대를  북중국의 여러곳에 보내 공격함으로써 후한의 혼을 빼놓았다.요동태수의 화친으로 더 이상의 공격은 진행되지 않았으나 요동이 당시는 북경 일대를 포함하여 불려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고구려군은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는데, '요서지방에 성 열개를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고 <삼국사기> 태조대왕 3년 봄 2월조에 나와 있다.성을 쌓아 한나라 침략에 대비했다는 것은 그 지역을 영구히 차지하려는 고구려의 의지를 나타낸다. 10개의 성은 만리장성 끝단인 산해관 남쪽 '청려','건평'에서 대릉하 하천을 따라 서북쪽으로 축성되었으며,만리장성 외곽 서북 방향으로 '평천','승덕','융화','위장','다륜','적봉'의 10개 성이 축조되었다.그후 태조대왕은 53년(서기 105년) 요동 6개현 공격,태조대왕 59년(서기 111년) 현도군 공격,태조대왕 66년(서기118년) 요동의 현도군 공격,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에는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후한이 반격에 나섰는데, '유주자사 풍환,현도태수 요광,요동태수 채풍 등이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고 <후한서>는 적고 있다. 같은해 4월 태조대왕은 서북방 선비족과 같이 공동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전사시켰다. 태조대왕 94년(서기 146년) 8월에 요동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 잡았다. 서안평은 전략요충지로 미천왕 12년(서기 311년)에도 공격하게 되는데,<한서>의 <지리지>에 '왕망은 북안평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으며 <위씨춘추>에는 '서안평현 북쪽에는 '소수'란은 강이 있다' 고 전하고 있는데,<후한서>의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구려(句驪)는 일맥 맥이(貊耳)다. 따로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소수는 고구려 초기 강역을 추정할 때 중요한 지역이다.<위씨춘추>는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에는 소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구려의 별종을 소수맥이라고 한다"고 전한다.

 

정리하면, 서안평현은 소수라는 강 남쪽에 있고, 소수에는 맥의 별종인 소수맥이 살고 있다. 곧 소수 출신 맥인들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소수는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중국측은 이병도의 주장을 반갑게 받아들여 소수를 지금의 압록강변 단동시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병도가 일본 학자들과 지금의 신의주 건너편 단동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단동은 북쪽에 소수라는 강이 없고 또 압록강은 남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이병도는 고구려사를 축소하기 위해 지리적 감각도 없이 역사왜곡을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다.

 

<한서>의 '지리지 8'에 기록된 현도군 소속 서개마현의 위치도 서안평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서마개현 마자수는 서안평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쪽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는 구절이다.염난수는 현재 내몽골을 가르지르는 '시라무렌' 강을 뜻한다. 따라서 서북으로는 서러무렌 강에 닿고 서남쪽으로는서안평을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강을 ?아야 하는데,이는 산해관 부근의 '대릉하'나 '난하'다.중국은 이병도의 말을 믿고 단동을 서안평으로 표시하고 서개마는 요하 북쪽에 있는 현재의 무순시로 표시해 놓았다. 중국이 스스로 오류를 자인하고 있는 역사지도 표기이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 서안평을 쳐서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것은 서안평이 낙랑군과 그리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낙랑군은 갈석산 부근의 '창려'~'난하'일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한나라 때의 대방현은 조선.패수.점제.열구 등과 같이 낙랑군 18개 속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서안평도 대릉하~난하에서 ?아야 된다.

 

고구려 미천왕 12년(서기 311년)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서쪽 진출 교두보를 확보했고, 서진하여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는 낙랑군에 칩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았으며, 이듬해 (서기 313년) 가을 9월에는 대방군을 침공했다. 계속해서 그 이듬해(서기 315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함으로써 서안평을 교두보로 한 서쪽 지역의 공략을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고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중국 세력인 한사군을 지금의 난하 밖까지 축출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2. 덕흥리 고분벽화: 유주자사 진의 진실

 다음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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