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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신애의 고통...국민의 아픔...

 

 

신애의 고통은 국민의 아픔

노컷뉴스 | 기사입력 2007-06-20 08:01 기사원문보기
[아침카페]
 

영화 밀양의 의미에 대한 종교계의 아전인수 격 해석이 구구하다. 가관이다.

 

남편을 잃고, 유일한 희망인 어린 아들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은 신애(전도연)는 절망의 심연에서 신앙의 힘으로 일어섰다.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 살인범이 갇힌 교도소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신애는 여기서 충격을 받고 미쳐버린다.

 

그 범인이 흉악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해맑고 평화로운 얼굴에 놀랐고 그로부터 "나는 하나님을 영접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한없이 기쁘고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유괴범에게서 참회의 고뇌를 발견할 수가 없었고 그 뻔뻔함이 신앙에서 나왔다는 점, 그리고 내가 믿는 신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 가해자와 한패가 되었다는 배신감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유괴범이 믿는 하나님은 거짓 신(神)이란 사실이다. 이 신은 범인에게 양심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가책이나 질책 없는 평화를 안겨 주었다. 이웃에 대한 책임 따위는 증발하고 없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K씨가 나의 돈 거액을 횡령했다면 K씨의 빚을 탕감하고 용서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나다. 제삼자가 할 수 없다. 그런데 K씨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 받았다며 감사헌금 내고 은혜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자. 여기에 교회 목사가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면 정상이겠는가.

 

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신앙이 만연한 현실을 고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선 5·18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을 위해 목사들이 기도회를 열고 신의 용서를 빌었던 때를 기억해 보라. 억울하게 죽임 당한 수많은 '신애'는 광주에서 오열하고 있는데. 독재의 가해자들, 부패의 주역들, 민족반역자들, 이들은 양심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유괴범의 신을 영접하고 살지 않을까?

 

예수께서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 것은 나에게 죄지은 자에 한한다. 남에게 죄 지은 자를 내가 용서하면 나는 또 하나의 가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하물며 역사와 민족, 국민 앞에 지은 죄를 누가 용서해 주자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대선정국에 검증 논란이 뜨겁다. 국민에게 지은 죄는 국민의 엄정한 심판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유괴범을 용서하는 따위의 그릇된 신앙을 배격해야 한다.

'신애'의 처절한 고통은 곧 우리 국민의 아픔이다.

 

한용상(언론인) nuriys@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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