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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6월,용서를 생각하다...

 

 

[데스크 칼럼] 6월, 용서를 생각하다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7-06-20 10:11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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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이면 윤흥길의 소설 '장마'가 생각난다. 6.25전잰중에 일어난 한 가정의 비극적 상황과 그 극복과정을 아이의 시각에서 담담하게 그려냈다. 외삼촌은 국군으로 입대하고 삼촌은 빨치산이 되면서 함께 사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이 시작된다. 외삼촌의 전사소식을 접한 뒤 두 할머니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느 날 빨치산 삼촌 대신 구렁이가 아이들의 돌팔매에 쫓겨 집에 들어온다. 할머니는 아들(삼촌)의 죽음을 직감하고 쓰러지지만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삼촌의 환상으로 믿고 배웅해준다. 이 사건으로 두 할머니의 갈등이 해결되는 계기가 주어지고, 할머니는 임종직전에 외할머니와 화해를 한다는 줄거리다. 봄과 여름이 자리바꿈을 하는 이 좋은계절 6월에, 한민족은 극단적인 비극과 격정, 환희를 차례로 겪었다. 6.25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피 흘리는 6월'이다. 남한에서만 사망자, 부상자, 고아,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 등 총 피해자 수가 133만여명에 달했다. 1987년은 '6월 항쟁'이 있었던 자유와 민주의 달이었고, 월드컵 4강의 위업을 이룬 2002년 6월은 환희의 물결이었다.

 

7년 전 6월에는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공동 선언문을 채택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를 지키던 젊은이들의 참담한 희생을 보고 우리 가슴은 구멍이 났다. 그러나 정작 이 나라 정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가해자인 북한의 눈치를 살피느라 노심초사하고 있다. 불과 5년전에 나라를 지키다 피투성이가 된 채 목숨을 다한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 가고 있다.

 

6.25와 서해교전을 도발한 북한은 전혀 변하지도 않았고 반성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에 박차를 가한다. 북한의 전략적 필요성과 경제적 궁핍이 참여정부의 '순진한'기대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변하고 있는것처럼 보일뿐이다.

 

북한정권에 대해 어설프게 용서와 화해를 운운하는것은 족쇄에 묶인채 신음하는 북한 주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이땅에서 감히 용서를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호국영령과 유가족밖에 없다. 그런데 병역의무조차 치르지 않은 일부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북한에 대해 마구 쏟아놓는 말을 들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지금도 곳곳에서 나오는 국군장병의 유골 보기에 부끄럽다. 젊은 군인들이 거친호흡을 하며 불렀을 애끊는 '어머니'소리와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푸른 하늘이 떠오르는 듯하다. 참된용서는 무조건 눈감아주고 머리를 조아리는것이 아니라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밝혀, 한반도에 더 이상 불행한 희생이 재발하지 않도록 막는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분)는 외아들을 유괴한 살인범을 용서하러 교도소를 찾았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다'는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살인범의 말에서 신애는 용서의 끈을 놓아버리고 절규한다. '살인마도 예수가 용서하면 다 되는겨?'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왜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해요?'

 

영화속 대사처럼 하나님 말씀중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것이 용서다. 대도로 불린 조세형부터 김태촌,조양은 같은 인물도 용서받고 회개해서 새사람이 됐다고 요란을 떨었지만 또다지 범죄를 저질렀다.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사람과 역사는 잘못된 일을 되풀이 하면서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지훈 시인은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라는 간절한 소원을 현충일 노랫말에 담았다. 보훈의 달 6월이 지나면 바로 장마철이다. 폭우가 내려도 태풍이 몰아쳐도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분노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용서가 어렵고 화해가 힘든지 모른다.

 

[윤영걸 / 주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