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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교육정책의 야만성...

 

 

 '교육정책'이란 이름의 야만

중앙일보 | 기사입력 2007-06-19 20:01 | 최종수정 2007-06-19 20:58 기사원문보기
[중앙일보 김종혁] 바로 어제 일인 듯 기억에 생생하다. 1980년 고3 여름방학 때였다. 찜통 같던 학교 독서실에서 친구들과 낑낑대며 대학 본고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의 입시 시스템은 이원적이었다. 예비고사는 10여 개가 넘는 전 과목을 다 치렀다. 이 점수가 높으면 그걸로 대학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위 명문대는 정원의 상당수를 본고사로 뽑았다. 국어.영어.수학인데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대부분 본고사를 준비했다. 그날 오후, 누군가 독서실에 뛰어들어와 소리쳤다. "얘들아, 본고사 없어졌대. 우린 망했어."
 

'본고사 철폐, 내신 강화, 과외 금지'라는 전두환 정권의 정책은 폭력적으로, 하루아침에 발표됐다. 입시를 5개월쯤 앞둔 시점이었다. 학생들이야 죽어나든 말든 정권 맘대로였다.

 

그럴듯한 명분은 그때도 있었다. 군사정권은 "과외가 성행해 위화감을 조성시키니 내신 강화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고 외쳤다. 요즘 우리가 듣는 것과 똑같은 레퍼토리다.

 

당시 고3 교실에선 대혼란이 벌어졌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입시 행로를 바꿔야 했고, 뒤죽박죽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항의하지 못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멋모르던 고교생이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적의(敵意)를 느꼈다. 정책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권력의 폭압성에 대해.

 

어처구니없지만 27년의 세월이 흐른 뒤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대학입시를 불과 몇 달 앞두고 교육부는 "각 대학은 입시에서 내신의 실질 반영률을 50% 이상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안 따르면 가능한 모든 제재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언했다.

 

교육부 지시대로 하면 대학입시에서 수능이나 논술은 의미가 없어진다. 사실상 내신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라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전국 과학고.외국어고.자립형 사립고에 다니는 학력이 우수한 아이들 상당수는 국내에서는 좋은 대학에 갈 방법이 없다. 선택은 두 가지다. 중하위권 대학에 가거나 그게 싫으면 빚을 내서라도 자기 실력을 인정해주는 외국 대학에 가야 한다. 어쩌면 공부 잘하는 중학생들은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시골 오지로 전학을 가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신 1등급 받기가 쉬울 테니까. 한마디로 코미디다.

 

'내신 50% 밀어붙이기'는 대통령 한마디가 결정타가 됐다. 하지만 교육부가 사립대학 입시를 간섭할 법적 근거는 없다. 그러자 관계 장관들이 모여 방안을 논의했다. "말 안 들으면 재정 지원을 끊겠다" "국공립대도 교수 정원을 줄이겠다"는 등의 방법이 나왔다. 총칼을 동원하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한 협박이다. 어쩌면 그렇게 과거 군사정권의 행태를 빼다 박았는가.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교육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이다. 그동안 "대학 자율이 소신"이라고 해왔다. 그런 김 부총리가 이런 야만적(野蠻的) 정책을 묵인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권력과 지식인의 야합'은 군사정권, 포퓰리즘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한다. 입맛이 쓰다.

 

이웃 일본과 중국은 열심히 21세기를 향해 달려가는데 대한민국 교육정책은 수십 년째 거꾸로 가고 있다. 최근에는 시계추를 반대로 돌리려는 '낭만적 평등주의자' '엉터리 전인교육론자'들의 허황된 논리가 판친다. 세계사의 흐름, 우리네 교육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교육 관료들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장단을 바꿔가며 춤춘다.

 

고3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지금 커다란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27년 전의 내 처지가 생각나 가슴 아프고 미안하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딴 건 몰라도 제발 교육만큼은 "대못을 박겠다"고 달려들지 말길 바란다. 애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 외에 무슨 죄가 있는가.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