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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사회적 자살...

니트족과 비정규직과 저출산 그리고 사회적 자살
[칼럼] 고용유연화·비정규직의 양산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
입력 :2007-05-24 14:47:00   김헌식 문화평론가
어느 교수가 미국에서 세탁소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중에 서울대 출신이 많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한국에서는 통용되는 학벌이 높다고 해도 미국에서 별다른 기술 없이 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다만, 그 말의 요지는 미국에서는 학벌이나 학력에 관계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탁소에서 일한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서울대 출신이 세탁소를 하면 손가락질 한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아도 혀를 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9급 공무원에 응시하면 혀를 찼다. 5급 정도는 응시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대학원 학위자가 9급에 응시하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박사는 무조건 교수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사자나 보는 이나 서로 비참해 한다. 청소부에 지원했다고 매스컴이 흥분하는 것은 아직도다. 엄밀하게 본다면 학벌과 사회적 지위, 성공과는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능력이 있으며, 전공을 했는가가 관건이어야 한다. 여기에 성취욕과 기회가 작용을 한다.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과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적 관심거리로 떠오른 지 오래다. 특히 니트족의 30%가 은둔형 외톨이로 이동한다는 조사도 있었다. 물론 정말 직장이 없어서 니트족과 같이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산업 현장에서는 사람이 없다고 난리다. 요컨대, 그럴듯한 직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안으로 언급되는 맞춤형 인력 훈련 프로그램 활성화의 한계가 발생한다.

취직에 사회적 평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 혹은 대학원을 나오면 아무 일이나 할 수 없는 불문율이 형성된다. 이 때문에 잘 알려진 곳은 엄청난 경쟁률을 보인다. 잘 알려진 곳이란 폼나는 곳이다. 그러나 결국 서로의 시선이 서로의 목을 조인다.

특이하게도 니트족이나 은둔형 외톨이의 대부분은 젊은 남성이다. 두 가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여성들은 대화적 소통력이 있기 때문에 은둔형 외톨이로 이동하지 않으며, 다른 하나는 구직에서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이 크다는 점이다. 이점이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적 기대감을 채우지 못한다면, 구직 포기로 이어지고 아예 사회적 시선, 주위 시선을 피해 은둔해 버린다. 남자는 뭔가 그럴듯한 직장을 얻어야 한다. 이 두 번째가 관심의 대상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데는 사회적 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화 외에 자식을 부양해주는 동양권의 풍토도 한 몫 한다.

사회적 시선에 따른 직종의 등급화는 결혼 문제로도 이어진다. 남성은 그럴듯한 직장이 있어야 결혼의 상대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갈수록 결혼 기피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직장이 변변치 않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안과 결혼의 상관관계도 중요하다. 이는 비정규직, 고용 유연화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문제이다.

결혼은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이 될 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안정된 밥벌이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부양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비정규직은 이러한 면에서 사회적 혹은 경제적 자살을 의미한다. 설령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두 사람도 먹고살기 빠듯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최소한 두 사람은 낳아야 현상 유지가 된다. 그런데 하나만 낳거나 그 이하이므로 현상유지도 힘들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할 때 2300년 한국의 인구가 불과 31만 명이 된다는 예측도 있다. 또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으며 결혼을 해도 늦게 한다. 여기에 만혼에 따른 출산이 다른 문제들을 양산 한다. 결국 단기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을 얻기 위한 비정규직과 고용 유연화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잉태하고 있다. 물론 기업이 만들어낸 이 같은 행태는 결국 공공부문, 국민들의 세금을 통해 극복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물론 근대적 가치관의 한계와 문명적 발달이 지닌 모순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볼 수도 있다. 물질적 기반은 교육 수준의 증대로 이어지고 교육 수준의 증대는 자녀의 수와 반비례라고 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 아이를 낳을 것 같지만 종족 번식의 필요성이 덜 절박해진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교육 수준의 증가는 주체적 자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와 가족 자체가 재산인 단계가 아니게 되는 문명의 발달은 집단적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적 자유 개체 문화를 증대 시킨다. 주체적 자의식은 이를 더 증폭시킨다. 애써 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보다 물질적 문명의 수혜에 기대어 개인적 삶을 누리는데 더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요 진리이며 진보가 된다. 그런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구시대적 유물로 전락한다. 따라서 이혼율과 저출산율, 독신자를 양산한다.

▲ 김헌식 칼럼니스트 
그럴듯한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근원적으로 비비안 포레스터나 리프킨의 말처럼 일자리는 사리지고 노동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은둔형은 더 늘어나고 출산율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슈펭글러는 그러한 출산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는 사회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다고 했다. 이른바 개인은 문명에 기대어 자유를 누리는지 모르지만, 사회는 스스로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는 결국 로마에, 로마는 북방민족에 인구수에서 밀렸고, 다시 북방민족은 이슬람민족에 그 인구수에서 밀리고 있다. 물론 인구가 많은 민족이 다음 문명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국력의 중요한 요소가 인구임에는 분명하다. 이렇다고 보면 국가 경쟁력을 키운다는 고용유연화, 비정규직의 양산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인지 모른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남의 시선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