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7일 MBC-TV ‘PD수첩’은 영화 ‘맨발의 기봉이’ 등을 통해 유명세를 치른 마라토너 엄기봉씨의 후원금과 관련된 의혹을 파헤쳤다. 엄씨 여동생의 제보로 시작된 이번 취재의 결말은 뜻밖에도 그녀에게 불씨가 튄 채로 막을 내렸고 그 후 네티즌과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쳤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방송 이후 기봉씨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맨발의 기봉이 - 어엿한 초등학교 1학년생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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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라는 호칭과 존댓말을 쓸 수 있도록 그때그때 고쳐주고 있다”고 전했다. 엄기봉씨는 지난 3월 2일 44세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추억이 가득한 충남 서산을 떠나 여동생을 따라 강원도 철원으로 오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의젓하게 인사를 받고, 과제 검사를 받은 뒤 가정통신문을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니 어느덧 두 달이 되어가는 그의 학교 생활이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기봉씨 사태, 무엇이 문제였나 - 아물지 않은 후유증‘PD수첩 - 맨발의 기봉이 그 불편한 진실’편에서는 기봉씨의 법적 대리인이자 마라톤 코치로 잘 알려진 엄 모씨의 돈 관리에 대한 의혹을 파헤치며 주변 사람들이 후원금을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또 기봉씨와 노모를 위한 새집 마련에 참여한 브로커가 일부 금액을 가지고 잠적하는가 하면, 심지어 지난해 7월 서울의 한 일급 호텔에서 열린 ‘엄기봉씨의 새집 마련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에서 모인 돈은 당시 참석자들의 식사비로 사용되기까지 했다는 내용을 내보내 시청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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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기봉씨의 굳건한 의지는 “서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 이유는 거기서는 학교를 다닐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기봉씨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자 삶의 이유는 학교 생활인 듯 보였다. 얘기를 나누던 중 집에 도착하자 그는 기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카메라를 좋아해서 무작정 찍히는 것을 즐기는 그이지만, 이번 방송에서 오간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저 방송 이후 잇따르는 편지와 전화가 가족을 괴롭히는 게 싫다고 했다. 특히 방송에서 몇 가지 의혹을 산 여동생이 화가 많이 난 상태라고 했다. 여러 매체에서 취재를 나왔지만 그녀가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지금 기자의 방문이 동생의 화를 돋울까 봐 심히 염려하고 있었다. 기봉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여동생과 연락을 취한다는 담임선생님도 “동생 분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 때문에 여러 취재 요청이 들어왔지만 일체 차단하고 계시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며 난처한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자세한 정황을 살피기 위해 기봉씨의 동생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논에 일을 나갔다가 돌아온 그녀는 “왜 온 것이냐. 죄송하지만 가달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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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녀는 기봉씨의 돈은 생활비로 썼을 뿐, 자신이 임의로 교회에 헌금했다는 방송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또 어머니가 머무는 곳은 집에서 5분 거리이며, 어머니의 동의 아래 오빠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제 속상함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은 오빠를 다시 서산으로 보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보내지 않을 거고, 오빠도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오빠가 학교 다니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요.”방송 후 세상에 대해 깨달았다는 그녀는 자신이 자초한 일(방송에 제보하고 촬영에 응한 것을 의미하는 듯)이니 어떠한 비난도 감내하겠지만 자신을 제외한 주변에 대해 확대 해석된 의심의 눈초리만은 자제해주길 부탁했다. 또 나중에 기봉씨가 좀더 잘되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래도 마라톤은 계속된다 - 본격적인 대책 마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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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봉씨의 동생에 대해서는 “속사정까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기봉씨를 데려온 것이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 같은 나쁜 의도는 없는 것 같다. 동생네도 법적으로 부양의무가 없고 생활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온화한 성격의 남편, 착실히 공부하는 아이들과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가정에서 기봉씨를 돌보고 있다. 방송에서 보여진 만큼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기봉씨를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방송 후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면사무소 쪽으로 직접적인 제안을 해옴에 따라 장애인 복지관과 면사무소 등의 협의를 거쳐 조만간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이씨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분이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기에 민감한 대처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것은 가정 안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니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카메라 앞에서 해맑은 미소로 “이렇게? 이렇게?”라며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려 보이는 모습을 보니 평범하다 못해 조용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세상이 너무 깊게 관여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장가가고 집도 사고 잘되면 그때 찾아와”라며 언젠가는 희망하는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기봉씨에게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글 / 박주선(자유기고가) ■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