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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줄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

 

[경향의눈] 낙하산 줄이 끊어지지 않은 이유

[경향신문 2007-05-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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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9일 노정권 탄생의 숨은 공신들이 청와대 만찬에 초대됐다. ‘노무현 대통령’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음지에서 발로 뛴 경선조직팀 43명이었다. 초대한 사람이나 초대받은 사람이나 얼마나 감개무량했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런데 얼마 안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경선때는 꿈과 희망이 있었다. 자리보장은 없었지만, 사명감과 희망을 갖고 뛰었다. 결국 대통령이 되셨고 오늘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왠지 허전하다. 주위사람들이 팽 당했다고 평가해 얼굴을 못들겠다. 자리까지는 못얻더라도 팽 당했다는 인식은 안받았으면 좋겠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보도에 따르면 한 참석자가 총대를 메고 이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 빙빙 둘러 얘기하고 있지만, 요는 자리 하나 신경 써달라는 것이다. 당시는 “인사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한 당선자 시절의 엄포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때였다. 그렇게 취임한 지 두달도 안된 대통령을 앞에 두고 팽 운운하며 인사 민원을 한 것이다. 노대통령은 “어려운 일이다. 잘 알고 있다. 같이 걱정하고 연구합시다”라고 즉답을 피했지만, 이후 이들중 상당수는 신(神)도 부러워한다는 공공기관의 감사자리를 꿰찼다. 당시 자리 얘기를 꺼냈던 사람은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가 되어 ‘제가 바로 무능한 낙하산입니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참여정부는 낙하산 줄을 끊었다’고 하던 노무현식 인사원칙은 동지들의 취직이라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시작부터 흔들렸던 것이다.

 

 

-시작부터 흔들렸던 人事-

 

원칙최근 공기업 감사들의 남미 외유사건을 계기로 노정권의 낙하산 인사가 또 한번 도마에 올랐다. 물의를 빚은 감사중에 노대통령과 이런 저런 인연을 갖고 있는 정치인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문에 보도된 이들의 경력을 보면 정권 탄생에 공을 세운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무현 후보 대전 충남 조직특보, 노무현 후보 선대위 동작을 위원장, 노무현 대통령 추대위 충북본부 고문 등등. 대전 충남에 조직특보가 있었다면 광주 전남에도 있었을 것이고, 동작 을 지역에 선대위 위원장이 필요했다면 마포갑에도 필요했을 것 아닌가. 이들 중 용케 한 자리 차지한 사람은 남미로 출장가며 정권참여의 지분을 만끽하겠지만, 여태껏 자리를 못얻어 “나만 팽 당했다”며 울분을 토하는 사람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모부처 국장으로부터 “이럴 바엔 차라리 논공행상비로 한 300억원쯤 정권 잡은 쪽에 주는 게 낫겠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처 산하기관 임원 자리에 업무관련 전문성이 전혀 없는 정치인이 줄줄이 임명돼 국가적 손해가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거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내칠 수도 없을 테니, 아예 나랏돈을 뚝 떼어 주고 자리를 넘보지는 말도록 하자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낙하산 인사 조사위원회’란 걸 만들어 조사한 참여정부의 낙하산 인사 사례는 줄잡아 140명. 이들의 평균 연봉을 1억원만 잡아도 집권 5년에 700억원이 필요하다. 이런 돈을 논공행상비로 쓴다는 게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오죽하면 그런 발상이 나올까 심정만은 이해할 수 있다.

 

 

-직장접고 선거 올인하는 그들-

 

공기업 감사들의 남미 외유 사건이 터지자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의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가 초래한 도덕적 해이의 결정판”이라며 노정부에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한나라당 역시 집권할 경우 선거 공신들의 취직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지 회의적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나 박근혜 전 대표 캠프에는 현재 직장도 접고 선거에 올인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이야 나름대로 사명감과 희망으로 뛴다고 하겠지만, 권력 잡고 난 뒤에는 자리욕심이 안생길 수 없다. 이대로 두면 다음 정권에서도 어김없이 낙하산 인사 시비가 재연될 것이라는 얘기다.

 

해결책은 딱 하나다. 대통령의 인사권한을 대폭 줄이면 된다. 정무직이 아닌 자리는 청와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다. 정권 잡아도 나눠줄 전리품이 없다면 각 후보 진영에 지금처럼 사람이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 과열 분위기를 한결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이 방안을 공약으로 내세울 후보는 어디 없을까.

〈이종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