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올해는 한.중 수교 15주년이 되는 해다. 이 짧은 기간에 중국은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많은 기회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중국시장은 이제 외국인투자 우대조치 축소나 가공무역 금지 등으로 더 이상 기회의 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기업인은 미래의 먹거리 사업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최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우리 경제가 "5~6년 후엔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 기업의 미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현장의 목소리다.
우리 기업의 이 같은 샌드위치나 너트크래커 신세는 중국 기업의 성장에 따른 당연한 경쟁의 결과다. 10년 전인 1997년에 비해 2006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1배, 수출은 5.3배, 외환보유액은 7.6배나 증가했다. 당시는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해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조차 없던 때였다. 오늘날 일류기업으로 성장한 하이얼(전자), 바오산(철강), 상하이자동차(자동차) 등의 존재조차 몰랐다. 10년 전에도 샌드위치론이 있었지만 당시는 단지 '우려'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아주 심각하고 두려운 '현실'이 됐다는 게 다른 점이다.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 기업의 샌드위치 신세는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다. 매출액(자산) 기준 한.중.일 500대 기업을 선정해 한국 기업의 위상을 평가해 보면, 한국의 기업 수는 2001~2004년간 75개에서 81개로 불과 6개 늘어났지만 중국은 105개에서 139개로 34개나 증가했다. 자산 기준으로도 한국은 오히려 100개에서 98개로 줄어든 반면 중국은 120개에서 135개로 크게 늘었다.
기업들의 순위 변화를 살펴보면 한국은 53개 기업은 순위를 상승시켰지만 하락 기업도 25개나 됐다. 그러나 중국은 24개 기업의 순위는 내려갔지만 무려 81개 기업의 순위가 올랐다. 일본 기업들의 위상 하락을 중국 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기업의 샌드위치 신세는 경쟁이 치열한 제조업에서 더욱 심각하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혁신 능력에 의한 질적 성장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여전히 양적 성장단계에 머물러 있다. 또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자동차.조선.철강 등 대부분 업종에서 일본 기업에 비해 노동생산성(1인당 매출)이 절대적으로 낮다.
반면 중국의 상위 대표 기업들은 아직 노동생산성 수준에서는 열위에 있기는 하지만 총요소 생산성 증가율은 매우 높다. 게다가 이 같은 높은 생산성 증가가 주로 기술혁신을 통해 달성되고 있다는 점이 두렵다. 한국의 기술 수준이 중국에 비해 4~5년 앞서 있다고 하지만 그 격차도 줄어들고 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중국 기업인은 한국의 산업 가운데 반도체.조선을 빼놓고는 안중에도 없다. 전혀 경쟁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샌드위치 현상은 국가.산업.기업 간에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선도적 위치의 변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쟁력 없는 국가나 기업은 탈락하고, 경쟁력이 있으면 선도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경쟁력 변화 과정은 우리 기업들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경쟁력 없는 기업들에는 가차없는 탈락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샌드위치 신세를 벗어나는 것은 결국 우리 기업의 노력에 의해 해결돼야 할 과제다. 투자 활성화, 지속적 구조조정, 대기업의 혁신 역량 강화, 새로운 글로벌 기업의 성장, 기업가 정신의 발휘를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규모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매출 상위 기업들은 대체로 매출의 60%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2005년의 경우 매출 중 수출 비율은 삼성전자 82%, 현대자동차 60%, LG전자 77%, 기아자동차 72%, 현대중공업 85%, LG필립스LCD 91%다. 그러나 이처럼 세계적 기업과 경쟁하는 글로벌 기업이면서도 규모는 '구멍가게' 수준이다. 전 산업을 대상으로 할 때 우리나라의 매출액 상위 100개 기업의 매출(2004년)을 다 합쳐도 일본의 상위 12개 기업, 중국 34개, 미국 3개 기업 수준에 그친다. 우리나라 상위 500개 기업의 매출액을 다 합쳐도 마찬가지다. 겨우 일본의 24개 기업, 중국 90개 기업, 미국 4개 기업 매출액을 합한 것과 같다. 국가와 기업의 성장이 기업의 투자에 달려 있다면 미래 유망산업에 대한 선행투자, 국내투자를 대체한 과감한 해외투자를 통해 규모의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기존 주력산업의 고부가가치화, 노동생산성의 개선, 혁신 주도형 기업성장, 신성장동력이 될 새로운 산업의 성장과 발전이 절대 필요하다. 범용 철강재의 내수 판매만 중시한다면 포스코도 낙관하기 힘들다. 휴대전화.액정표시장치(TFT-LCD)의 삼성전자와 LG필립스도 주요 부품과 소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한 쉽지 않다. 벌크선과 유조선.LNG선만으로는 현대중공업의 미래도 어렵고, 현대자동차 역시 중소형 자동차 생산만으로는 희망이 없다. 세계적으로 높은 임금수준과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노사관계로서는 절망적이다. 조립생산.가공무역으로 매출 규모를 아무리 늘린다 해도 혁신 능력이 없는 기업에는 미래가 없다. 새로운 먹거리 산업을 키우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글로벌 기업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샌드위치 신세가 장기화되면서 국제경쟁에서 탈락하는 기업들이 속출하는 것도 문제지만, 중하위 기업군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성장.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문제다.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과 부품소재 산업에서 중견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해 새로운 글로벌 대기업이 나와야 한다.
샌드위치 신세에 대한 염려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른 우리 기업들의 비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출자총액제한과 경제력 집중 억제, 수도권 규제 등 각종 규제를 짊어진 기업으로는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 기업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힘들다. 사회 도처에 팽배한 반기업 정서와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노사관계는 샌드위치 신세를 심화한다. 우리 기업들이 샌드위치 신세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다. 우리 사회의 역동적이고 넘치는 힘을 이젠 우리 경제의 재도약에 활용할 때라고 생각한다. 정부 정책도 기업의 투자를 보다 활성화하고, 잘나가는 수출기업들의 성장을 제약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
박승록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