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살구꽃 피는 마을

 

 

[경기]살구꽃 피는 마을

[데일리안 2007-04-24 09:41]    
[데일리안 김동정 문화 칼럼니스트/객원기자]내 고향은 산 높고 물 맑은 오대산 자락이다.
연어와 뱀장어가 거슬러 오른다는 연곡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늘 푸른 바다도 지척이다. 지금쯤 고향집 둔덕에는 봄빛이 가득할 것이다.

진달래가 지고 나면 어김없이 얼굴을 내미는 살구꽃과 복사꽃, 그리고 배꽃과 앵두꽃이 집 둘레를 단장하고 있을 테지. 고향을 떠난 지 어언 20여 년. 해마다 이 무렵이면 고향집 정경이 삼삼히 그려진다.

봄물 든 산천은 내 어릴 적 추억을 새록새록 샘솟게 하고, 여기저기 다투어 피어난 꽃들은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애틋해 뵌다. 그 모습이 하도 정겨워 봄 노래 한 소절 읊조려 보는 봄날 오후.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로 접어들고 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삐 살아온 날들이었다. 여물대로 여문 봄빛은 산, 들, 바다에 고루 퍼져서 이젠 어디를 가도 그 산뜻함과 화사함에 푹 취할 수 있다.

봄이 주는 에너지요 위안이다. 봄을 심하게 타는 이들일지라도 저 아름다운 꽃들 앞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좋은 봄날, 자연을 만나러 집을 떠난다. 집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달려 다다른 강변마을.
마을길을 따라 복사꽃이며 살구꽃이 새색시 마냥 곱다. 아, 눈 부셔라.


삐뚜름히 올라간 고목의 가지에 흰 살구꽃이 담상담상 매달려 있다. 지금쯤 내 고향집 뒤란에도 살구꽃이 피어 있을까. 소나무가 빙 둘러선 고향집의 봄은 내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봄이면 고향집은 꽃대궐로 변한다.

작년 봄, 정말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았을 때, 집이 온통 살구꽃 향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 고향집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살구나무와 함께 오랜 세월 서 있었던 석류나무와 감나무, 밤나무는 베어져 없고, 그 자리엔 잡초만 다보록했다. 새 주인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모두 베어버렸다고 했다.

용케 살아남은 살구나무는 옛 주인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올해도 그 살구나무는 꽃봉오리를 열었을 테지만 쉽게 갈 수 없으니 세월을 탓해야 할까?

활짝 웃는 살구꽃을 두 손으로 어루만져 본다. 꽃물을 빨던 벌이 흠칫 놀라 쏜살같이 날아오른다. 살구꽃과 복사꽃을 번갈아 바라보려니 내가 꽃이 된 듯 제 정신이 아니다. 저 꽃들과 사랑에 흠뻑 빠져본들 어떠리.

자연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법이 없다. 언제나 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물러난다. 온갖 거짓과 꾸밈과 권모술수로 가득한 인간에 비하면 자연은 지극히 착하고 순수하다.

이즈음 산과 들은 온통 꽃이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땅을 가득 덮은 꽃들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여봐란 듯이 봉오리를 연 복사꽃, 자두꽃, 배꽃, 산벚꽃, 조팝나무, 그리고 길가에 피어난 애기똥풀, 제비꽃, 할미꽃….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먹만한 꽃까지, 그 누구를 그리며 살짝 피어난 생명들인가. 그러나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언제 꽃이 피고 지는지 알지 못한다.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나도 ‘먹고사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연예찬은 먹고사는 것과 다르다.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꽉 찬 마음을 조금만 비우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나왔다. 우리들 메마른 가슴을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자연밖에 없다. 이건 변할 수 없는 진리다.

때가 때이니 만큼 살구꽃 얘기를 더 해 보자. 복사꽃이 좀 더 화려하다면 살구꽃은 수더분한 여인의 옷맵시 같다. 어떤 이는 살구꽃을 일러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수수하고 정갈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은근하고 당찬 멋이 풍긴다. 옛 선비들은 살구꽃 필 무렵에 내리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 해서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살구꽃에 얽힌 재미있는 고사(古事).

옛날, 후한의 재상 조조가 뜰에 살구나무를 심어 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매일 열매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머슴을 모아 놓고 이 맛없는 개살구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머슴이 "이 살구는 참 맛이 좋은데 아깝습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바로 네 놈이구나’, 하고 살구를 훔친 그 머슴(도둑)을 잡았다는 일화다.

아시는 분은 다 알겠지만 살구의 열매는 시큼한 맛이 난다. 어린 시절,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살구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요긴한 열매였다.

살구를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한방에서는 이 열매를 행자(杏子)라 한다.

씨는 한방에서 약재로 쓰이며 차(茶)로도 우려먹는다. 살구차는 살구씨를 빼고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빼낸 씨를 누렇게 볶아서 큰 용기에 물을 넣고 푹 끓인 다음 꿀을 타서 마셔도 좋다.

시골집 흙담 가에 핀 한 그루 살구꽃. 언젠가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마음을 끌어당기는 한 폭의 그림 앞에 서 있으려니 아,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고, 살구꽃에 깜박 홀린 듯 오랫동안 서 있었다. 나도 저 꽃처럼 피어나고 싶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살구꽃이 피면 봄은 절정에 달한다. 꽃잎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산이며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진달래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살구꽃이며 복사꽃이 피어났다.

저녁나절, 아파트 사람들은 살구꽃 그늘 아래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철따라 피고 지는 무수한 꽃들과 그 꽃들이 내뿜는 향기에 내 삶터는 늘 밝고 싱그럽다.

살구꽃을 비롯해 모든 봄꽃은 한순간에 피고 지면서 저마다의 마음에 아름다움과 상실감을 함께 안겨준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렇다.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봄꽃들은 칙칙하던 땅에 환한 잔치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한다. 봄꽃들의 초대에 달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지, 가는 봄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살구꽃은 복사꽃처럼 진하지 않다. 일찍이 청록파의 한 분인 박두진 선생은

복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 오래오래 정들이고 살던 집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라고 무르익은 봄 심사를 노래하지 않았던가.

바야흐로 초록 세상이다. 4월과 5월은 봄꽃을 맞으러 가기에 딱 좋은 달이다. 저기 살구꽃이며 복사꽃, 배꽃, 앵두꽃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이호우 시인의 <살구꽃 핀 마을>을 음미하며 이 글을 맺는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김동정 문화 칼럼니스트

'시대의 흐름과 변화 > 마음의 평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미현 시즌 첯승!  (0) 2007.05.07
행복과 불행을 돈으로 따진다면...  (0) 2007.05.05
당신, 멋져!  (0) 2007.04.24
"나 다시 돌아갈래"  (0) 2007.04.22
겨울을 이긴 새눈들...  (0) 2007.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