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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당신, 멋져!

 

 

[아침논단] 당신, 멋져!

[조선일보 2007-04-23 23:25]    

어느 모임에서 근사한 건배사(乾杯辭)를 하나 배웠다. 선창자가 “당신!” 하고 외치면, 나머지 사람들이 “멋져!” 하고 화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건배사가 그렇듯 ‘당신, 멋져’ 역시 약자(略字)로 만든 것인데, 그 뜻인즉 ‘당’당하고 ‘신’사답고 ‘멋’지게 ‘져’주자는 것이라고 한다. 신선했다, ‘져주자’는 기원(祈願)이.

대한민국은 치열한 투쟁사회다. 거리마다 난립한 형형색색 간판들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다못해 TV의 오락프로그램에서도 ‘서바이벌’이나 ‘배틀’이 아니면 눈길을 끌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일본의 부모들이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고 훈계할 때, 우리 부모들은 “절대 어디 가서 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숨가쁜 경쟁 자체보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우리 사회에서 승부는 대개 완승(完勝) 아니면 완패(完敗)로 끝난다는 점이다. 서로 한 발씩 물러서는 지혜나, 이번에 양보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전략적 신뢰는 설 자리가 없다. 이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봐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패자(敗者)의 승복이나 승자의 아량은 찾아볼 수 없고, 승패의 후유증은 오래 지속된다.

사회 전체에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의 이분법이 횡행할 때, 마지막 기댈 수 있는 곳이 정치분야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을 조정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것이 정치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의 영역에서 상황이 가장 심각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식의 사생결단이 국가적 여망과 대의(大義)를 짓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컨대 1980년대 초 ‘서울의 봄’ 당시, 어느 한쪽이라도 ‘멋지게 져주는’ 이가 있었더라면, 이 땅의 민주주의도, 당사자들의 대통령 취임도 훨씬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곡(序曲)이었다. 이후로도 한 치 양보 없는 조급한 승부욕들이 역사를 바꾸어왔다.

시간이 갈수록 과열 양상을 보이는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경쟁을 보고 있자면, 역사는 또 이렇게도 무력하게 되풀이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무안의 보선(補選) 지원유세에서, 당 중진의원의 상가(喪家)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 유력 후보 진영 간의 불협화음이 들려온다. 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난 두 번의 경험을 뒤돌아볼 기초적인 기억력도 없는가? 그동안 대선에서 ‘나누기’의 정치를 보였던 후보나 정당은 예외 없이 패배했던 교훈을 모두 잊었는가 말이다. 한나라당은 최근 대선기간 중 촛불집회 금지, 다른 정당 간 후보단일화를 위한 토론회 금지,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당선 무효 등, ‘2002년의 악몽’을 막기 위한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어이없는 발상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2002년의 기억은 다름이 아니라 과열 경선과 그 후유증이다. 내년 총선을 미끼로 의원을 줄 세우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서는 안 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불복(不服)하지 않고 멋지게 지는 후보’와 ‘깨끗하게 이기되 독식(獨食)하지 않는 후보’가 나올 수 있는 축제의 마당을 준비하는 일이다.

비록 여권의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대선에 참여하는 여야 모두에 같은 부탁을 하고 싶다. 당당하고 신사답고 멋지게 경쟁해서, 선거 이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이 대선을 국가 도약의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라 공약과 정책으로 승부하는 페어플레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어느 쪽도 완승하지 않겠다는 중용(中庸)의 지혜와 참여자 모두가 “당신, 멋져”라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도(襟度)를 전제할 때 가능한 것이다. ‘당신, 멋져.’ 이 말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우리 정치문화를 바꾸는 화두(話頭)로 커나가기를 희망한다. 정치권에서 먼저 수범(垂範)을 보이면, 투쟁적인 우리 삶의 양상도 차츰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멋지게 질 수도 있다는 당당한 사고가 우리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성숙한 마음의 버릇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