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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실걸이꽃 12

두바퀴인생 2025. 5. 8. 06:20

실걸이꽃 12

실걸이꽃

실걸이꽃은 주로 해안가에서 자생하는 꽃으로 전설에 의하면 한 어부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영영 돌어오지 않자 해안가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난 다음에 그 영혼이 환생하여 해안가에 자생한 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꽃밭을 지나가면 낚시 바늘같은 가시가 옷에 걸리면 뿌리가 뽑힐지언정 가시가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명 옷걸이꽃이라고도 한다.

 

남겨진 편지

그러다가 그녀는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편지가 있는데 꼭 선생님을 찿으면 드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녀는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나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얼굴에 대고 그녀의 남겨진 향기를 맡으며 울먹거리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나는 혜연이 딸 앞에서는 도저히 그 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편지를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혜연이가 묻혀 있다는 동백나무 앞에는 조그만한 비석이 서 있었는데, 나는 동백나무 앞에서 편지를 읽으려 했으나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눈물 방울이 편지와 신발 위로 뚝뚝 떨어졌다.

비석에는 혜연이가 딸에게 부탁하여 만든 글귀로 이런 글이 까만 비석 위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한 여인이 여기 묻혔습니다. 뛰어난 미모에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인이 젊은날 잃어버린 사랑과 행복을 찿지 못하시고 기다림에 지쳐 여기에 조용히 영면했습니다. 그 아름답던 사랑은 저승에서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나는 비석 앞에서 비문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아 그제야 편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편지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존경하옵는 오빠에게!

처음에는 생도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오빠! 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빠와 헤어진지 벌써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네요. 꿈많던 여고 시절, 그때 대구 YMCA 건물에서 오빠를 처음 만났지요. 그후 오빠는 저의 집을 찿아와서 부모님도 만나고 그날 이후 저에게 수많은 편지를 통해 저에게 많은 꿈과 용기를 심어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주 폭동 사건 발발 당시 제주에서 하숙집을 하던 주인집 딸이었는데, 토벌 부대로 제주에 와 있던 육군 중위였던 아빠를 하숙집에서 만나게 되었고, 결국에는 아빠의 청혼으로 결혼하셨죠. 그후 어머니는 군인의 아내가 되어 저를 낳고 살아오다가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진급하여 육군 대령으로 논산훈련소 부소장으로 재직 중 그해 장군으로 진급 예정이었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시절 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산당 색출작전이 실시되었죠. 당시 숙군작업을 실시하던 방첩대장 김창룡의 공산당 색출 사정팀은 아빠의 처가 쪽 친척이 공산당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아빠는 빨갱이라는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 쓰고 갖은 고문 끝에 결국 강제 예편당하셨죠.

그후 우리 가정은 정권의 탄압으로 직장은 물론 수입도 어렵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머님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가난과 궁핍 등 여러가지로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아오신 바람에 어머니께서는 군인 아내의 힘든 삶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체험하셨기에 제가 군인 아내가 되는 것을 절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제가 오빠에게 빠질까봐서 너무 깊이 사귀지는 말라고 나에게 당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오빠께도 제가 말씀드렸을 거에요.

그 당시에는 저도 어머니께서 군인을 싫어하신다기에 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고, 대학에 들어가자 갑자기 변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자 젊음의 열기 속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자 저의 사고도 여러가지로 변했던 거 같습니다. 오빠께서 육사를 졸업하는 날 제가 참석하여 오빠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먹은 후로 우리는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지요.

세월이 참 빠르네요. 저도 의사와 결혼 후 딸 수미를 낳고 살다가, 남편의 병원 개업에 대한 금전적인 부담 문제로 시댁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그결과 시댁 부모들의 변심과 멸시,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다가 결국 이혼하고 하나 뿐인 딸 수미를 혼자서 키우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제 딸 수미도 결혼에 실패하여 지금 혼자 살고 있구요. 모전자전인가 봅니다. ㅎ ㅎ ㅎ. 우리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저는 유방암으로 항암 치료까지 받았으나 이미 온 몸에 퍼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오빠를 꼭 한번 보고 싶은데, 딸 수미한테 오빠를 찿아보라고 부탁했지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편지를 오빠께서 직접 읽어신다면 그때는 이미 제가 이 세상을 떠난 이후일 겁니다.

오빠께서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어머니의 반대와 대학 입학 후 철없는 자만심에 빠져 오빠와 헤어졌지만 나는 절대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치이며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오빠! 감사합니다! 오빠께서는 어린 저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희망을 심어주신 분이십니다. 그 시절 오빠의 편지를 읽은 후에는 머리가 맑아졌고 예습과 복습도 열심히 했고 그래서 시험 점수도 잘 나왔던 거 같습니다. 제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빠께서 격려와 용기, 희망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 대학 입시에서 우리 학교 3학년 전교생 중에서 겨우 4명 만이 서울 S대에 합격했는데 그때 영광스럽게도 저도 포함되었으며 그것도 오빠의 지도와 격려 결과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가정 형편상 해외 유학도 못갔지만 간호원으로 꼭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결혼을 서두른 것도 어쩌면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면 우리집 형편도 낳아지리라 믿었지만 그것은 기대에 불과했고 환상이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세요.

오빠! 죄송합니다! 저에게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아끼지 않았셨던 오빠의 마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떠난 점이 자금 뒤늦게 생각하니 너무나 후회되고 죄송스럽습니다. 나이 70 살이 넘은 제가 이제야 철이드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저의 인생이 행복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했던 점이 너무나 가슴 아픔니다. 주변 환경 변화와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저에게 쏠려지자 저는 환상에 빠져 자만심이 생기고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면서 오빠를 잊어버린 것 입니다. 배은망덕이죠. 결국 저는 저의 이기심으로 오빠의 진심을 몰랐던 제가 너무나 큰 실수였으며 불찰이었습니다. 모든게 어리석었던 저를 용서해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그리고 제 딸 수미에게 얼마의 돈을 맡겼습니다. 제가 죽고 나서 오빠를 찿게 되면 꼭 맛난 거 자주 사드리고 명절이나 좋은 날에는 반드시 오빠에게 선물이나 축하금을 보내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빠의 현재와 노후를 위해 수미에게 가진 돈을 아끼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서 오빠에게 도움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빠의 마음을 받아드리지 못한 죄송함에 이제나마 조금이라도 보상을 하려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오빠! 이제나마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사랑하는 오빠! 오랜 세월 너무나 그리웠고 보고싶었습니다. 저는 이혼 후 딸 수미만 키우면서 악착같이 살았는데 주변의 유혹도 많았지만 모든 것을 뿌리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서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 첯사랑인 오빠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히 피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죽기 전에 오빠를 꼭 보고 싶었는데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오빠께서 제가 죽기 전에 나타나신다면 제가 일어날 수도 있고 그리고 마음껏 사랑도 하고 싶지만, 그것은 저의 마지막 기대와 희망일 뿐일 겁니다.

저는 지금 병상에서 온 힘을 다해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쓰고 있습니다. 딸 수미에게 오빠를 찿게 되면 이 편지를 꼭 전해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우리들의 첯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더욱 아름답고 애절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이제야 오빠께서 저를 사랑한 것이 저를 위한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오빠! 남은 여생은 저를 대신해서 반드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 딸 수미를 부탁드립니다. 오빠 딸처럼 생각하시고 자주 방문해주시고 딸의 외로운 삶을 격려해주시고 거두어 주세요. 저 혜연이가 다하지 못한 삶을 대신 살아달라는 것 입니다.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넣지 말고 카페 앞 동백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혹시 오빠를 찿게되어 오빠께서 여기 오시면 저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수미에게 부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오빠! 오빠와 현생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늘나라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이만 이별을 고합니다.

오빠!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오빠를 사랑하는 혜연이가 >

https://www.youtube.com/watch?v=8P5ugYP-hxw&pp=ygUm7JWE66mU66eI66as7JWEIOuwlOydtOyYrOumsCDsl7Dso7zqs6E%3D

 

이 음악은 내가 혜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방에서 틀어주던 음악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 감미롭고 잔잔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는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이 음악을 듣곤 했다. 또 욕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비울 때 이 음악은 더욱 나의 영혼을 더욱 위로하고 맑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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