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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7 : 흥망의 기로에 선 이 나라

 

 

강남의 봄 17 :  흥망의 기로에 선 나라

 

 

                                                                                                         계절의 꽃 장미

 

새벽 기온도 영상 10도 이상 오르고 공기도 훈훈해졌다. 봄은 꽃을 피우는 듯 마는 듯 지나가고 가정의 달이라는 5월도 세월호 슬픔과 분노로 벌써 보름이 지났다. 가로수들이 푸르름을 더해가고 신록의 5월은 절정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계절의 날씨는 여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살기 힘들다고 해도 먹고 마시고 행락을 즐기는 데 고속도로가 만원이다. 삶을 즐기면서 죽음을 향해 달리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오늘도 권세와 재력을 가진자는 큰소리치며 살고 있다. 과연 그런 삶이 몇십 년 몇 백년을 갈 것인가? 자본주의 한국의 대통령 삼성 회장도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자연은 불교의 윤회설처럼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동물이나 인간이 자손번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노예처럼 살면서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어느날 갑자기 후진적인 국가에서 비명횡사를 당하였다. 이미 탐욕과 비리, 부정에 빠진 우리 사회가 저지른 것이지 지금의 정권 책임도 아니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사고는 진행되고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사자떼가 권세를 탐하던가 재물을 탐하던가?  오로지 어린 새끼를 먹일 하루의 먹이감을 사냥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늙어서 병들고 부상당한 사자는 무리를 떠나 홀로 초원을 헤메다가 다른 맹수의 먹이가 되고 그 맹수는 다시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사자가 먹이를 얻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달리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목숨도 내놓고 탐욕에 빠지는 것이 우리 인생인 듯하다.

 

그런데 요즘은 독신자가 많다.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능력도 없고 혼기도 놓쳤다. 결혼에 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포기한 사람도 많다. 집 장만, 양육 부담, 취업,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이제는 삶의 짐으로 생각하는 추세다. 비혼모, 미혼모가 점점 많아지고 버려지는 아기도 많다.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기성세대는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결혼해도 문제지만 안 해도 문제다.

 

그래서 독신자들이 늘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젊을 때 당장은 젊고 힘이 있고 능력도 있고 미모가 삶의 동력이 될 수 있으니 혼자 살면서 마음 편하고 나날이 즐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능력이 없어지고 병들어 버림받을 때가 문제다.  아프리카 동물이 혼자 살기 힘든 것처럼 혼자사는 데 경제적인 능력이 있으면 몰라도 능력도 없고 자식도 없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극심한 외로움과 허망함을 누군들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젊을 때는 독신자는 처자식 부담없이 독신자 모임에 나가서 눈맞는 사람을 골라 서로 즐기고 만끽하며 온 몸이 다 타도록 사랑하며 쾌락과 기쁨을 누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쁨과 쾌락이라는 것은 허기가 생기듯이 반복되고 그것조차 지겨울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깊어가는 주름살, 어느날 갑자기 빠지는 잇빨,  난잡한 성생활로 떼묻고 늘어지고 검푸른 색깔로 변한 그곳, 상대적 박탈감, 탐욕과 억울함에 늘어나는 스트레스, 그로인해 생기는 암.종양 등 각종 몹쓸 질병, 탄력을 잃고 늘어진 피부, 튀어나와 늘어지고 처진 배, 유방과 엉덩이, 늙은 쥐처럼 머리털이 슝슝 빠지거나 희긋희긋 늘어가는 흰머리털, 이룬 거 없이 모든 게 허접하고 공허하기만 한 지난 시절  쾌락과 기쁨의 허망한 세월의 시간 뿐일 것이다.

 

그러나 결혼하여 자식을 키우면서 지지고 복으며 싸우고 하지만 갈라 설 부부도 자식을 위해 참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식을 다 키우고 나면 훌훌 혼자 멀리 떠나고 싶은 심정도 생길 것이다. 부모는 평생 자식을 위해서 살며 애지중지 키우고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서 노예처럼 살아도 자식이 남에게 괄시받지 않게 하려고 비싼 명품 가방과 신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자식이 어느날 갑자기 한순간에 내 곁을 떠나서 사라진다면? 그것도 나라를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너무나 탐욕스런 가진자들에 의해 어처구니 없고 억울한 죽음이라면? 그 아픔과 비통함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세월호 추모 열기가 전국 곳곳에서 더해가고 한 달이 다 되가도록 아직도 시신을 찿지 못한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이제는 지쳐 포효를 토하고 있는 듯하다. 비탄과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방선거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고 후진적인 한국 정치계가 이런 사회를 만들었다는 국민들의 의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 원흉이며 배후인 사이비 종교 교주 일가는 검찰 공권력을 비웃으며 버티거나 자취를 감추고 있다. 포교우너 같은 곳에서 신도와 노인들을 상대로 사기 장사를 하는 곳도 수없이 많다. 종교를 빙자한 축재에 여념이 없는 종교계다. 말을 돌리고 곡해하여 뒤집어 씌우고 교리를 제 멋대로 해석하여 현혹시키고 권력과 재물에 눈이 벌개져 있다.  일말의 양심이나 부끄럼이 없는 사탄같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들이 사회악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공권력에 저항하는 종교집단은 단호하게 소멸시켜야 한다.  이건 종교탄압의 문제가 아니다. 땀흘리는 노동의 댓가를 마다하고 세 치 혀를 이용하여 감언이설로 민중을 선동하고 유혹하면서 막대한 치부를 일삼고 있지만 무지한 민중은 그의 말에 세뇌되어 사병화 집단이 되어 정문을 가로막고 교주를 지키고 있다. 소왕국을 꿈꾸는 종교집단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것은 자명하다.

  

검찰은 사건의 복잡성과 광범위한 비리 사슬에 놀라서 그런지 아니면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신속하고 과감한 조사를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충분한 증거자료를 준비하고 완벽한 기소를 하려는지는 몰라도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 중에서도 주모자들에게 시간을 벌어주는듯 너무 뜸을 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 이런 비극적인 불행이 일어나도록 사이비 교주의 방만한 탐욕을 못 본채 방치한 관계기관은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법건축물을 방치한 지자체, 탈법과 불법운행을 방치한 인천시, 비리커넥션을 예방하지 못한 감사원과 국세청, 검,경찰, 뇌물로 연결된 해수부와 해양경찰 공직자, 입법안을 수년째 방기한 국회, 교주의 뇌물을 받은 정치권 인사와 공직자 모두가 이번 수사로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할 범법자들이다.

 

그동안 이러한 엄청난 비리커넥션이 고리를 형상하여 수십년 동안 해 먹을 동안 이런 상태를 방치한 정부와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공정위, 경검찰, 지자체, 국세청, 감사원은 무엇을 했으며 왜 눈감아 주었는가? 그리고 청해해운 비리에 대해서 청와대 민원게시판 고발건에 대해서 청와대부터 묵살한 이유를 알아야겠다. 해경, 해수부는 말할 것도 없고 검.경찰을 포함하여 모두가 그 교주가 전방위적으로 뿌린  뇌물을 먹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단 말인가? 검찰 조사가 지지부진하고 증거인멸의 시간을 벌어주는 듯하고 도주를 방조하는 듯한 이유가 무엇인가? 약자인 서민들에게는 그렇게 강력하던 공권력이 사이비 교주 앞에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외국으로 도망치면 그만인가? 이스라엘처럼 유태인 학살자를 세계를누벼서 찿아내듯이 해외특수전담반을 만들어서라도 외국으로 도망친 파렴치하고 흉악한 범법자를 찿아내 송환할 의지는 없는가?

 

 

                                                                                                          방배역 인근 청권사 전경

 

이 나라가 썩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교육계는 공사, 납품, 급식, 교복, 참고서, 승진, 수학여행 등을 통해서 업주로부터 뇌물을 챙겼고, 감사원, 국세청,지자체 등을 포함하여 군의 기무, 헌병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판검사, 경찰, 변호사 등 법조계는 뇌물을 받고 향응을 제공받으며 기업주 스폰서를 만들어 편의를 봐주고 뒤로 은밀히 뇌물을 챙기고 기업주가 사건화되어 구속되면 법을 마음대로 요리하여 솜방망이 처벌이나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더 많은 재물을 챙기고, 대학과 교수는 등록금, 연구지원비 등으로 현금을 챙기고, 한은, 금융위, 금감위 등 출신들은 산하금융기관에 낙하산 재취업하여 로비와 뇌물로 저축은행 같은 권력형 불법대출 사건을 일으키는 등 재물을 챙기고, 각 부처 공직자는 산하 정부기관이나  산하기관, 관련 기업에 재취업하여 로비를 벌이고 뇌물을 제공하며 재물을 챙기고, 공정위는 과징금을 빙자하여 대기업을 옥죄고 다단계 조합장을 대를 이어 재취업하여 국민들을 주머니를 다단계 업주들이 털어가도록 만드는 등 나라 전체가 권력과 재물이 연결되어 뇌물과 편의제공의 먹이사슬로 촘촘히 잘 짜여 있으니 이번 세월호 사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던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는 종교의 탈을 쓰고 윤리.도덕적인 척, 양심적인 척, 성인군자인 척 하는 집단과 무리, 지도자일수록 비리와 범죄를 감추고 소왕국화하여 외부와 차단하고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려 하고 있다. 이슬람 자폭테러처럼 감언이설에 세뇌된 무리들은 지도자를 신처럼 받들고 신도들은 사병화 되어 있다.  북한 김일성을 우상숭배하듯이 교주를 숭배하며 집단화를 꾀하고 있다. 재물과 권력이 거대한 집단일수록 그 권력과 재물이 세습되고 그런 과정에서 반드시 반대파를 무차별 죽이거나 암매장하는 등 숙청하고 독재자로 군림하며 뒤로는 호의호식하며 여성 신도들의 성폭행은 물론 여러 처첩을 거느리고 말초적인 향락을 즐기면서 소왕국을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천국을 간다,'  '신의 영험한 기운을 받아야 한다.' '헌납한 만큼 영광을 누릴 수 있다.' '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안락한 여생을 보장해 준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현혹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만든 기도원, 자활원 등에서 노예처럼 농사짓고 염전을 일구며 노동의 댓가없이 평생을 교주의 돈벌이에 동원되어 헌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인도나 외딴 섬을 매입하여 그들만의 이상사회를 만든려 하고 있다. 그런 허황된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 사람들은 나이.직업. 학력.출신을 불구하고 전재산을 바치고 자신의 몸까지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지도층은 호의호식하면서 일반 노동자, 민중, 신도들은 모든 것을 그 집단에 의탁하고 가난과 굶주림속에 평생을 교주 한 사람과 그 후손들을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예가 중국 청조말 홍수전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북한 김일성 세습 정권, 한국 대기업 재벌의 세습 상속, 종교 집단의 세습 상속 등이 이에 속한다.

 

 

   

                                                                                                            잠원동 거리풍경

 

요즘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회의원은 장관을 국회에 불러 놓고 여야 할 것없이 대호통을 치고 어떤 여성 의원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모후보도 아들 문제로 눈물을 흘렸다. 요즘 공식석상에서 웃다가는 빰을 맞을 분위기다. 수조원 재산을 가진 대부호가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권력이 그런 것이다. 아들 잘못을 자신이 잘못한 척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고 유권자에게 동정을 호소하고 있다. 야당 지도자들이 현정부를 욕하고 대통령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해방 이후 이명박 정권까지 이념투쟁과 과거사 논쟁, 무리들의 탐욕, 국고 빼먹기로 일관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혈연.지연, 학연, 선거지원집단들이 무리와 파당을 이루어 권력을 독식하면서 이권에 개입하고 편리를 봐주며 뇌물을 제공받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 무위도식하며 나랏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불법대출을 중계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고 재물을 챙기고 물러났다.

 

새누리당은 이번 지방선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통령, 총리, 장관이 욕먹고 해양경찰이 죽일 놈이 되었다. 그러나 욕하지 마라.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렇게 흘러왔고 변질되어 왔기에 당신이 그런 자리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우리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탐욕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반포천 전경

 

중국의 전한 고조 유방, 후한 광무제, 송의 조광윤, 당의 이연, 고려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 등의 대부분 봉건사회의 왕조는 세습왕조였다. 창업주는 유능하여 나라를 세웠지만 그 후손들은 그 창업주만큼 유능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으로 후손들이 권력을 잡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권력의 향락속에 도전정신과 모험심이 사라지고 유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계 왕들이 적자가 아닌 경우도 많았고 반정으로 등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몇 몇 휼륭한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무능한 지도자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 정도전'은 왕권우위론보다 신권우위론을 주장하면서 무능한 왕이 통치하는 것보다 유능한 신하들이 왕을 중심으로 국정을 주도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생각도 결국 절대선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선 5백년 역사를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 사대하며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중지를 모아 국정을 올바르게 추진하여 백성들이 풍족하고 평화롭게 태평성대를 이루기는 커녕 백성들의 삶은 도외시한채 권력을 잡기 위해 사사건건 정쟁으로 서로 피나는 싸움질만 계속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혈연, 학파, 지역에 따라 무리를 지어 파당을 만들고 견제는 커녕 반대파가 추진하려는 정책에 대하여 좋고 나쁨을 떠나 매사에 거부하며 모함과 고변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세월이 계속되면서 국력은 허약해지고 국방은 소홀해졌으며 특권층인 사대부들만을 위한 나라로 변질되고 민중은 노예처럼 수탈에 허덕이며 토탄에 빠지고 말았다. 말년에는 외척을 비롯하여 특정 세족들이 권력을 잡고 농단하며 유약하고 어린 무능한 왕을 찿아내 옹립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매관매직, 탐관수탈,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다가 일제에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식민통치의 지난한 세월이 지나고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 대중착취로부터 부를 축적함과 아울러 대중무지화로 사회 의식이 잉태될 씨앗부터 말살해 나갔다.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 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인 지뱌ㅐ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다. 모래밭을 응집력을 자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끓임없이 물길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깨우침이며 일깨움이다. 사회주의 의식을 획득해 가고, 확대되어 가는 대중의 응집력, 그거은 혁명의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대중들은 절대왕권의 신성이라는 허위를 깨닫고, 더는 존배를 이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이 깨닫게 된 인식의 발전이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의 거부, 그 인식은 바로 그와 반대되는 정치.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것은 모래가 흙으로 변해가는 대중 응집력의 싹틈이었다. 그 상태에서 대중들이 맞이한 것이 해방이었다.'

                                                                                                                                                                             - 조정래 장편 <태백산맥>에서-

 

 

 

 

 

해방을 맞은 우리 사회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금속하게 이식되었다. 제주 4.3 반란, 여순.순천 반란사건, 대구 폭동 사건 등이 일어난 것도 몇 몇 적색분자에 의해 일어났지만 해방 후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의 정책이 민중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친미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존 세력, 즉 친일파를 재등용하여 민중을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공산당 제거 작업과 기대보다 실망에 빠진 민중 탄압,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이러한 반란과 폭동은 친일파와 일제 앞잡이 등이 경찰, 군에 재등용되어 앞장서고 미군정이 저지른 잔학한 민중탄압의 실태를 소설 태백산맥은 구구절절 잘 기술하고 있다.

 

이후 한국전쟁의 처참한 고난을 겪고도 전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으로 달려온 결과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고 오늘의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그러나 미국식자본주의 사회가 성숙되어 오면서 4.19, 5.16. 5.19. 6.29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발전은 물론 정치적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정신적인 발전은 거의 무시되고 말았다. 대기업 위주의 한국경제는 부가 편중되고 말았고 세습화되고 있다. 그들의 부가 스스로가 아닌 국민들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일구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대기업 위주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였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며 비리와 부패가 뇌물고리를 형성하여 사회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인명을 경시하고 인권이 무시되고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공권력이 무력화 된 작금의 현실은 결국 세월호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어느 한가지 제대로 작동한 것이 없는 현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극단적인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지만 100만이 넘는 공무원집단과 싸워야 되고 사회 전방위적인 손질이 요구되는 현실이라 정권을 내놓더라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는한 쉽게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라도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현명하게 처리하기에는 너무 뿌리가 깊고 확산되어 있어 잘못하면 무리수를 두기 쉽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개혁이 추진되었지만 기존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대부분 흐지부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비정상은 모든 것이 정치에서 비롯되었다. 엄청난 돈과 인력을 수반하는 현재와 같은 선거제도는 비리와 부패를 막을 수가 없다. 낙하산 인사도 바로 선거제도로 인한 보상적 인사이기 때문이다. 공무원 집단의 퇴직 후 인재 재활용 방안과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않는한 관련기관, 기업체, 산하기관에 취업을 막을 수도 없다. 명운을 건 대개혁을 시도하지 않는한 성공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과제지만 지혜로운 방안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기다.

 

조선이 망한 것은 양반사대부들의 권력 독식과 부패, 그리고 정치적으로 외척 가문이 권세를 잡으면서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부의 편중과 불평등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민중을 수탈해오면서 성숙되어 왔기 때문이다. 결국은 권력층의 부패와 탐욕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정치는 실종되고 국방은 멀리한 결과 일제에게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초래하고 말았다.  작금의 현실을 돌아볼 때 비리와 부패의 심연에 빠진 이 나라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걱정이다.  

 

 

  

 

 

아래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실태와 문제점을 지적한 노르웨이 오솔로대학 한국학 교수인 박노자씨의 글을 싣는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국, 안과 밖’ 

정부가 해운업 감독 책임을 방기하고, 기업은 이윤을 위해 고객과 노동자 생명을 볼모로 잡는다면 이는 사고가 아니다. 살인이다. 삼풍과 세월호 참사는 구조적으로 거의 흡사하다. 삼풍 붕괴를 가능케 한 국가와 기업 사이의 관계 구도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살인마다!” “아이를 살려내라!” 아이를 먼저 보내는 체험을 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아픔으로 넘치는 유가족들의 이 외침 속에 이번 사태의 본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이비 “언론인”들은 “교통사고” 따위를 들먹이지만, 해운업 감독의 책임이 있는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기업은 이윤을 위해 고객과 노동자의 생명을 볼모로 잡는다면 이는 사고가 아니다. 살인이다.

사고야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1994년에 탈린과 스톡홀름 사이에서 운항했던 페리인 에스토니아호가 침몰돼 852명이 사망하는 20세기 최악의 선박사고가 났다. 그러나 왜 에스토니아호 희생자들의 유가족 중에서는 그 누구도 “정부는 살인마!”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에스토니아호를 소유했던 에스트라인이라는 회사는 공무원들과 결탁하여 상습적 과적 운항 등 각종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스웨덴 해양구조 당국은 특혜 업체를 위해 초동대응을 늦추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호 참사가 말 그대로 사고였다면, 이번 일은 궁극적으로 국가와 기업에 의한 간접적 대량살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살인마라는 표현은 맞다.

군사독재 시절의 정부나 기업이 노동자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다. 박근혜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아버지 시절 ‘산업화’의 현장은 처참한 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최대 국책사업인 경부고속도로를 보라. 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 권리를 팔아먹고 일본과 ‘관계 정상화’ 해서 얻은 차관과 베트남에서의 미국 침략의 현장에 한국 군인들을 팔다시피 하여 보내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1968~1970년 동안 했던 그 공사의 정치적 의미가 커서 정권은 계속 공기 단축을 재촉했다. 도로 공사에 익숙하지도 못한 노동자들이 최저가의 노후장비로,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살인적 속도로 작업하다가 줄줄이 죽어나갔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대가는 노동자 77명의 산재사와 수백명의 부상이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물론 한 푼의 국가배상도 없었다. 단 시공사 차원에서 사망자 한명당 그 당시 돈으로 50만원, 즉 오늘날 돈으로 500만원 정도 주었다. 이는 “조국 근대화” 시절에 노동자 목숨의 값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타살의 구조는 지금까지 왜 그대로인가?

도살장 같은 이 국가는, 1987년 이후에 민주화됐다기보다는 기업에 의해서 사유화됐다. 관료집단이 기업을 관리하는 구조는, 기업이 상납 등을 통해서 관료들을 관리하면서 이용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기업의 목적이 오로지 이윤이다 보니 이러한 변화에 따른 것이 90년대 중반의 여러 대형참사였다. 502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는 대표적이었다. 더 많은 이윤을 내려는 삼풍그룹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먹여가면서 상가 건물을 무리하게 백화점으로 개조하고, 그 백화점의 매장 공간을 최대한 넓히려고 벽을 헐어버려 건물을 부실하게 만들고, 거기에다가 건물이 무너지려는 징조가 보여도 계속 영업 지속을 강행하자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수백명을 죽이고 말았다. 구조적으로 삼풍백화점 참사는 이번 참사와 거의 그대로 흡사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가능하게 한 국가와 기업 사이의 관계 구도가 그동안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달라진 게 있다면 1997~98년 환란을 계기로 국가는 더욱 기업국가 방향으로 변모돼간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구호인 ‘기업하기 좋은 나라’대로, 사기업의 이윤은 국가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됐다. 기업국가로의 전환이 쉽고 자연스러웠던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기업가와 고위직 공무원들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혼연일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노회찬 전 의원이 삼성으로부터 명절마다 천만원가량의 ‘떡값’을 챙겼던 검사 7명의 명단을 발표해도, 사법 처리 당한 게 검찰청의 ‘삼성 장학생’들이 아니고 바로 노회찬 의원 자신이었던 것은, 이 사회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검·판사가 재벌의 사위가 되고, 퇴직한 공무원이 평소에 관련했던 업계로 내려가 한자리를 하는 사회에서는 ‘국가’와 ‘기업’은 이미 하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국가의 총력이 사기업의 이윤 창출에 동원되는 기업국가, 기업사회로서의 한국은 1997~98년 이후 승승장구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난 현장에서야 국가는 턱없이 부실해도 국가와 하나가 된 주요 재벌들의 이윤실적들은 계속해서 세계 재계의 부러움을 사왔다. 최근 몇년간 세계공황 등으로 기업매출증가율이 연간 2%에 그치고 수익성은 악화돼도 한국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 대주주들의 배당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예컨대 삼성의 이건희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으로부터 2011년 1091억원, 2012년 1034억원, 지난해 1079억원 등 불황 속에서도 어마어마한 배당금을 받아왔다. 10대 그룹 대주주 10명이 상장계열사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최근 4년 동안 약 1조원이나 되는데, 대한민국 전체의 1년간 실업급여 예산은 3조8600억원 정도밖에 안 된다. 즉 약 70만명 이상이 되는 공식 실업자들이 받을 돈의 약 30%에 해당되는 금액을, 최고 부자 10명이 개인적으로 챙겨가는 셈이다. 이런 현대판 귀족사회에서 과연 국가가 서민의 목숨에 무슨 가치라도 부여하겠는가?

기업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공성의 부재다. 기업국가에서는 공공기관이 챙겨주어야 할 서로 평등한 민주시민은 없다. 그저 기업으로서 필요한 인간부품들이 있는가 하면, 필요가 없어져 폐기처분되는 폐품들이 있다. 이번 참사의 피해자 같은 아이라면 아직 “쓸만한 부품”이 되지 못하지만, 더 이상 기업으로서 이용가치가 없는 노인들 같으면 바로 폐품으로 취급받는다. 한국에서 특권층·중상층이 아닌 이상 노인으로 산다는 것은 ‘처벌’에 가깝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거의 49%로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는 최악이고, 프랑스(5%)나 독일(10%)은 물론 미국(14%)과도 비교조차 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빈곤율은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악화돼간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44%였는데 이제는 노인들의 거의 절반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민연금이 극도로 부실한데다가 기업들이 나이 든 사원들을 너무나 쉽게, 국가의 어떤 제재도 없이 퇴출시키는 게 원인 중의 하나다. 2007년에 명예퇴직과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65만명이었다면 작년에는 87만명이 됐다. 일회용 제품처럼 쓰였다가 버려지는 노동자는 빈곤노인이 되고, 가면 갈수록 삶이 빡빡해지고 각개약진, 각자가 그 생존의 길을 알아서 가는 게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그의 가족들도 그를 외면하게 된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인들에게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로 보인다. 2000년에 10만명당 34명이었던 65살 이상 한국 노인의 자살률이 이제는 80명, 즉 세계 최악이다. 유럽에서는 노인자살률이 내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한국에서는 정반대이며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별다른 대책도 없다. 알아서 죽으라는 것이다. 저질 기업국가 아니면 이런 죽음의 행렬이 가능하겠는가?

기업국가 해체만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기업 본위의 사회를 인간 본위, 노동자 본위의 사회로 바꾸는 일에 다들 함께 착수하고, 기업국가 해체를 위하여 다 같이 반란자가 되지 않으면, 구명보트를 탈 만큼의 특권층이 아닌 대한민국호 승객의 대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장일 뿐이다.

노인들과 함께 기업국가의 또 다른 커다란 피해자층은 바로 이번 참사 속에서 희생된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청소년, 청년들이다. 한국만큼 아이들이 불행하게 사는 나라는 없다. 기업들의 ‘쓸만한 부품’으로 가공돼야 할 그들은 살인적 경쟁에 휘말리면서 심신의 황폐화를 일찌감치 당한다. 한국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절반 이상이 가끔가다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3분의 1은 간헐적으로나마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늘 명하는 기업국가는, 그들에게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기업국가 해체만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기업 본위의 사회를 인간 본위, 노동자 본위의 사회로 바꾸는 일에 다들 함께 착수하고, 기업국가 해체를 위하여 다 같이 반란자가 되지 않으면, 구명보트를 탈 만큼의 특권층이 아닌 대한민국호 승객의 대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장일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기고]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박근혜 퇴진 선언한 한 초등교사

[편집자주] 이 글은 43명의 교사들이 ‘박근혜 퇴진 선언’을 한 뒤 교사커뮤니티에 올라 온 글이다. 이번 선언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솔직하게 담고 있어 필자의 동의를 구해 <참세상>에 소개한다.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에는 항상 거부감이 있었다. 너무 과격하지 않나, 한 번 더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하는 정서적 거부감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 다수가 나와 같은 온건함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함, 정부에 대한 관용, 배신을 당하고도 한 번 더 믿어보려 하는 순진한 마음에 대고 권력자들은 비웃고 다시 속이고 약속을 어기고 무시한다.

 

그래서 여전한 정서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퇴진을 외치기로 했다. 권력자들이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국민이 무섭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아니 적어도 귀찮은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국민을 속이고 우습게 알면 국민에 의해 끌어내려질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누군가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정치활동도 금지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교실 안의 중립성에 대해 말한다면 난 필요하다고 본다. 아이들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와 다양한 시각을 편파적이지 않게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립은 두 개의 정의 사이의 중립이지 정의와 부정의 사이의 중립은 아니다.

 

교사가 말 꺼내지 않아도 아이들 대다수가 정부를 욕하고 불신하는 상황에서 아무 말하지 않거나 균형을 위해 정부를 옹호하는 말을 하는 것이 정부와 교육청에서 요구하는 중립이라면 나는 하지 않겠다.

 

나는 교사이기 때문에 더구나 도덕교사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정의를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명백한 부정의 앞에 침묵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숨죽이고 기다리고 포기하는 사이에 가장 약한 존재들이 희생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희생은 계속될 것이고 나의 학생들 그리고 나의 딸도 그리고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퇴진을 외친다.

 

교사선언에 참여하기로 한 뒤에 유가족들이 정치적 구호에 부담을 느낀다는 기사를 읽고 다시 한 번 망설였다. 추호라도 유가족들과 아직도 아이들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분들이 바라는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해서 하는 행동임을 그분들이 알아주시길 바라고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 아이들이 내 제자들이라면 뭐라고 할까. 잘했다고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잊지 않을 것이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