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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69 : 해방과 건국 29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2)

 

 

한국의 역사 1,069 : 해방과 건국 29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2)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2

 

 

2. 광주민주화운동(1979~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화려한 휴가》, 《26년》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4]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민중항쟁추모탑
별칭 5.18, 광주민중항쟁
장소 대한민국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현 대한민국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날짜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사망자 사망: 165명,부상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 76명
부상자 부상: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 기타: 1,589명
원인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
웹사이트 5·18기념재단

 

 

개요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를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 수천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에서 5·18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6년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되었다. 한편, 신군부군사독재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1980년 2월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를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였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같은 날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5월 17일 24시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같은 날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시 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 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전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전남도청 별관

 

 

 

사건 초기

 

5·17 조치 이전 계엄반대시위

5월 15일 광주에서는 오후 4시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학생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릴 경우 16일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뒤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시위 방침을 시달했다.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오후 10시경 보안사령부는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10]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 검속했다.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에 의해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이 이러하다.

  • 북동 276번지 3층 건물에서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고, 거기에는 정은철 총무와 배달학생들과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밝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두 군인들은 다시 들어와 정은철 총무 뒷덜미를 낚아챈다. 정은철 총무는 업무를 보던 상태였다. 정 총무는 의자와 함께 넘어졌고 두 군인들은 정 총무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정 총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렸고, 두 군인은 정 총무의 두 발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끌고 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끌린채였다. 그 뒤, 두 군인들은 또 들어와서 담당구역 수금하고 들어왔던 배달학생 박준하 씨를 진압봉으로 수도없기 때리고 짓밟은 뒤에 정 총무처럼 끌고 나갔다. 박준하 씨는 계단에서 실신했고, 두 군인은 그대로 팽개쳐두고 내려갔다.
  • 군인들은 부부들이 탄 택시를 붙잡았다. 부부들은 끌려나왔고 군인들은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먹인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기고 신랑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은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 군용트럭이 11대가 줄을 지어서 행렬해 있다. 그 대열에서 마지막 차량에 젊은 여성은 옷이 갈기찢겨 젖가슴이 보일정도였고, 그 옷은 피투성이였다. 병원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간호사 가운을 들고 나왔다. 병원 옷을 입은 남자는 옷을 여자에게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쫒아왔다. 이민오씨는 교장 관사까지 도망쳤지만 거기까지 쫒겨 구타당했다.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
  •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그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셔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후두부 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 타박상)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광주외곽봉쇄작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 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 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피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1994년 검찰은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중 가장 나이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 1980년 5월 27일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0년 당시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연행자 고문 피해

5·18에서 3천여명에 달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5·18 과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하여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 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말했다.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

 

연행자는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피해자들의 55.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살자 비율은 10.4%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영향과 평가

 

추모탑 (국립 5·18 민주 묘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의의 및 교훈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며,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관련 판결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지 않고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

 

 

5·18 사건 대법원 판결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 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 질서 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 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편철 4,271권, 8,580,904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장, 영상 65작품, 1,471명의 증언,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142]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은 다음의 9개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1.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
  2. 군 사법기관 재판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육군본부 소장)
  3.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4.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5.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6. 피해자들의 병원 치료 기록(광주광역시 소장)
  7. 국회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8. 국가의 피해자 보상 자료(광주광역시 소장)
  9.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특히 여고생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적은 일기장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일기를 적은 인물은 이를 유네스코 등재 위원회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9월 4일 강운태 광주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31년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쾌거다"며 "5·18 민주화 운동이 헌법전문에 명시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시민과 해외 선교사 등을 대상으로 자료 수집 운동을 펼쳐 수집된 자료를 추가 등재할 계획이며, 이와 함께 광주가톨릭센터에 5·18 아카이브의 구축을 통한 기록물 디지털화, 기록물의 국가문화재 지정과 또한 5·18의 헌법전문 명시,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인권평화상의 제정 등이 추진된다.

 

 

기타

 

5·18 당시 광주대동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의 대열에 참여해 총상을 입었던 윤기권은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으며, 정신질환 치료비 조로 보상금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91년 1월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을 수령 후, 노모에게 광주 보상금을 건넨 뒤,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했다. 지인들은 "윤씨가 사람들의 긴 침묵에 괴로워했다."라면서 5월 항쟁의 큰 충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한 고등학생에게 11년이 지난 오늘 '월북'이라는 '돌연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5·18 현장에 있었던 많은 증인은 진압군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등의 증언을 하고 있다. 술 취한 군인이 연행자를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1980년 5월 22일쯤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은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부상자는 헬기로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 김순현 준장은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자신에게 대들었으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

 

5·18 당시 '여학생 유방 난자'라는 유언비어와 관련해, 5월 20일 밤과 5월 21일 오전의 가두방송을 주도하며 관련 내용을 방송했던 전옥주는 민화위에 출석해 "여학생의 유방이 찔렸다는 말이 유언비어라지만, 나는 여자의 가슴이 칼에 찔려 유방이 드러난 것을 봤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국회 광주 민주화 운동 특위는 1989년 1월 16일 항쟁 당시 부상 시민들을 수술했던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과 종합병원에 대한 문서 검증을 해 항쟁 초기 단계에 공수부대원의 대검과 진압봉에 의해 자상과 타박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확인했다. 그 결과 전남대 흉부 외과의사였던 오봉석 씨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수부대와 시민 간에 접전이 치열했던 19일부터 22일까지는 병원 응급실은 물론 1층 환자대기실 수납창구와 복도까지 매트리스나 보조침대를 깐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수부대의 처녀 유방 난자' 소문과 관련 대검으로 가슴을 찔린 여자 환자를 치료한 적 있다. 가슴 부위와 등을 대검에 찔린 최미자(당시 19세) 양이 찔린 정확한 부위는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로 계엄군이 젖가슴을 목적으로 찔렀는지는 이상 부위만 갖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환자는 4주 후 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