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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67 : 해방과 건국 27 (신군부 등장과 권력장악 과정 2)

 

 

 

한국의 역사 1,067 : 해방과 건국 27 (신군부 등장과 권력장악 과정 2)

 

 

 

                                          신군부 주역들

 

 

신군부의 등장과 권력장악 과정 2

 

1979~80년 신군부 등장

 

10.26과 합동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7년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정세가 조성되었다. 전두환(全斗煥)과 하나회는 그 어느 정치세력들보다도 신속히 이 사건에 대처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국면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2인자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권력다툼은 2인자들끼리 서로 견제시키고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던 박정희식 용인술(用人術)의 결과였다. 2인자들 중에서도 특히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세력이 강했는데,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3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차례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모든 정보채널은 차지철에 의해 사전에 파악되고 차단되었다.

10월말 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등 박정희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다툼이 극도에 달해 자칫 대통령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사실은 10월 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 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어. 김재규, 차지철, 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보안사에서도 진종채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박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에 들어가서 최광수 의전수석을 보고 10월 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대통령 비서실 등 주요 권력기관에서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몰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계통에서는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은 10.26사건을 마치 예견이나 한듯이 신속한 대응을 취하였다. 그는 밤 11시경 국방부 보안사 부대장실에서 김재규 체포 및 호송 작전에 참여하였고, 새벽 2시경 33헌병대를 보안사 직속부대로 배속받아 궁정동 안가로 진입, 경비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27일 오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약칭 합수본부)를 설치하고 그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권력의 공백기에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군부와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수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 그는 보안사 회의실에 각 수사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통고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수집된 모든 정보를 합수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13시간만에 취해진 조치들로서, 너무나 완벽한 대응이었다.

10.26 직후의 합수본부는 단순한 수사전담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림 4-1>과 같이 합수본부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검찰, 헌병 등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장악하고, 3실 3처 1단의 조직구성에 약 5백명의 요원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출신 기관별로 살펴 보면 <표 4-1>과 같이 보안사 출신이 379명으로서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합수본부는 보안사가 다른 수사정보기관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경찰, 행정관료, 정치인, 기업인, 군 장성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합수본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자석에 빨려들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미국측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정보기관에서는 한국의 차기 정권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의 세 사람을 꼽고, 최규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정승화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전두환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이 각각 맡아 빈번히 접촉하였다.

미국측이 평가하기에 최규하가 헌법상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기 편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정승화는 계엄령하에서 3권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반면 전두환은 보안사,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수사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하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함께 합수본부라는 공조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10.26 이후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 표 4-2 ] 10.26 이후 주요 사건 일지



79-80년 주 요 사 건
10. 26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12. 12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12. 21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겸임 발령
4. 21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 15 전국 대학생 연일 대규모 시위
5. 17 비상계엄 전국으로 확대
5. 18 광주민주화운동
5. 27 계엄군 광주시위 유혈진압 (사망자 174명 발표)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상임위원장 전두환)
6. 1 중앙정보부 요원 300명 숙정
6. 24 김종필 모든 공직 사퇴
7. 10 고급 공무원 243명 숙정
7. 15 일반 공무원 4,760명 숙정
7. 19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 연행
7. 31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8. 13 김영삼 정계은퇴
9. 1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 17 김대중 사형선고
10. 22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
10. 27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
11. 12 정치활동규제자 811명 발표
11. 14 언론기관 통폐합
12. 1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12. 2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대회
12. 6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



 

12.12 군사반란과 군부의 세대교체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간부문과 군부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계속 맡아 수행하는 경우이며, 세째는 군부의 강경파가 무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

향후 정치진로와 관련하여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군부와 민간부문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소장군부는 군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심각한 단계에 이른 12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민간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군부정권 연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2.12사건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장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출신 소장군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 상급 장교들을 체포, 연행하고 군의 주도권을 잡은 하극상(下剋上) 사건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군부 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관해 주한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과 선배 육사 출신 사이에는 단층선(fault line)이 있다고 보았다. 군부에 이런 단층선이 있을 때 외부적 환경이 조성되면 변란이 생길 수 있는데 (1961년의: 인용자 주) 5.16쿠데타가 그런 경우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단층선 위에 있는 비정규육사 출신의 상층부만 통제할 뿐, 단층선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장교단이라는 중추부를 컨트롤(control)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전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군의 세대교체작업은 정승화와 김재규 인맥을 제거하고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인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김윤호 장군으로 구성된 '6인 군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업으로 12월 19일 구세대에 속하는 약 40여명의 장성들이 강제 퇴역당했다. 반면 12.12에 적극 참여했던 유학성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으로, 황영시 1군단장은 참모차장으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노태우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김윤호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백운택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정호용 향토사단장은 특전사령관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12.12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은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부 내에 단층선이 형성되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회와 같이 군의 공식적 지휘계통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결사조직이 없었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에 따르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측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 미 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통된 요구에 기반하여 1963년 결성된 하나회는, 16년이 지난 1979년 마찬가지 이유에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그림 4-2>와 <표 4-3>과 같이 12.12 당시 병력을 동원한 많은 수의 장교들은 1963년 결성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성장해 온 하나회 조직의 회원들이었다.

[ 표 4-3 ] 12.12사건 참가자 명단


성 명 직 책 계 급 육 사 하나회
전두환 보안사령관 소장 11기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준장 14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15기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령 17기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17기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중령 18기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준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중장 8기  
황영시 1군단장 중장 10기  
노태우 9사단장 소장 11기
정호용 50사단장 소장 11기
백운택 71방위사단장 준장 11기
박준병 20사단장 소장 12기
박희도 1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장기오 5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최세창 3공수여단장 준장 13기
송응섭 9연대장 대령 16기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대령 16기
구창회 9사단 참모장 대령 18기
안병호 29연대   20기
이상규 2기갑여단장 준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8기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장 대리 준장 13기
고명승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15기
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 대령 13기
성환옥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18기
이종민 육본 헌병대장 중령    
박희모 수경사 30사단장 소장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16기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17기
김진선 수경사 33경비단   19기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조 홍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21기


위의 표와 같이 12.12사건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진 34명의 장교들 중 하나회 소속은 24명으로서 약 70%에 해당한다. 게다가 차규헌(車圭憲), 유학성(兪學聖), 황영시(黃永時) 등은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하나회를 후원해 온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보안사와 서울 근교의 9사단, 20사단, 71사단, 공수부대, 그리고 청와대, 수경사, 육군본부, 국방부 등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가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연락을 받고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 날 진압에 앞장섰던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예하부대에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 등도 초기에는 강제 진압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하층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휘관들 중 대다수가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하나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쿠데타 군의 서울 진입을 막아야 할 수도경비사령부 안에도 장세동(張世東), 김진영(金振永), 김진선(金鎭渲)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12사건을 계기로 하나회 인맥은 군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고 군부의 세대교체를 이루어 내었다. 1980년 이후 이들은 승진을 거듭하여 <표 4-4>와 같이 대장 18명, 중장 20명, 소장 13명, 준장 9명 등을 배출하였다.

[ 표 4-4 ] 최종 계급별 하나회 회원 명단


대 장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박준병, 안필준, 최세창, 정진태, 이종구, 이진삼, 고명승, 나중배, 송응섭, 신말업, 김진영, 이문석, 구창회, 이필섭
중 장 김복동, 최성택, 장기오, 황인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이대희, 권병식, 민병돈, 장세동, 최평욱, 정만길, 김태섭, 조남풍, 김정헌, 김재창, 서완수, 김진선, 안병호
소 장 노정기, 박세직, 조명기, 권영휘, 정도영, 신우식, 장기하, 김정룡, 이현우, 최윤식, 최석림, 장석규, 김무웅
준 장 손영길, 이우재, 안무혁, 이춘구, 정순덕,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성환옥
대 령
이 하
권익현, 안교덕, 정동철, 신재기, 황진기, 오한구, 우경윤, 박종남, 허청일, 박정기, 배명국, 노석호, 정봉화



 

 5.18과 국보위

1980년의 봄은 민주화 열기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야당과 재야, 노동자, 학생 등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월 21일에는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10만여명이 모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군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강경진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5월 18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시내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이로써 정국은 군부와 반대세력간의 정면대결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신군부의 정국대응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기존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날로 격화되는 계엄철폐 시위를 무력을 동원하여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양보책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일단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에 점진적인 유화책을 쓰기로 하였다.

5월 18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정치인), 김종필(공화당 총재), 이후락(국회의원), 박종규(국회의원), 문익환(목사), 김동길(연세대 부총장), 이영희(한양대 교수) 등 26명을 부정축재 및 사회혼란조성 혐의로 연행하고, 24일 대통령살해사건과 관련해 사형이 확정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5월 27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공수특전단,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 5천여명이었는데,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공수 7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였다. 공수특전단은 1971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근무한 이래, 1974년 노태우가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같은 해 정호용이 공수여단장으로, 그리고 1977년부터 최세창(崔世昌)이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근무한 곳으로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인 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원회에 있었다. 국보위원의 인선작업은 보안사의 권정달(權正達) 정보처장,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인사처장, 이학봉(李鶴捧) 대공처장 등에 의해 보안사 안가에서 은밀히 이루어졌다. 국보위는 당연직과 임명직을 포함하여 총14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상임위원급 이상 52명 중에서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하였다.

[ 표 4-5 ] 하나회 출신 국보위원


성 명 직 책 육 사 이후 주요 경력
전두환 상임위원장 11기 제11, 12대 대통령
노태우 상임위원 11기 내무장관, 민정당대표위원, 대통령
정호용 상임위원 1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이춘구 사회정화위원 14기 국회의원, 내무장관, 민정당사무총장
안무혁 건설위원 14기 국세청장, 안기부장
민병돈 내무위원 15기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최평욱 운영위원 16기 보안사령관, 철도청장
허삼수 사회정화위원 17기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
서완수 사회정화위원 19기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표 4-5>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국보위에 들어가 적극 활동하였다. 상임위원회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의 세 사람이 참여하였다. 국보위 각 분과 중에서도 특히 많은 역할을 했던 사회정화위원회에는 이춘구(李春九), 허삼수(許三守), 서완수(徐完秀) 등이 참여하였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각계 인사들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등 요직으로 진출했다.

국보위는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을 일소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2급 이상 공무원의 12.1%인 243명, 일반 공무원 4,760명, 국영기업체 임원의 23%인 176명이 숙정되었다. 6월 4일부터 7월 31일까지 2개월에 걸친 정화작업으로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7월 19일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이 연행되었고, 7월 31일 정기간행물 172개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른바 '3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6월 24일 김종필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8월 13일 김영삼을 정계은퇴시켰으며, 9월 17일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와 함께 11월 12일 구세대 정치인 811명을 정치활동규제자로 선정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고, 11월 27일까지 4개월에 걸쳐 폭력배, 공갈사기배, 밀수마약사범 등 사회풍토문란자 총 5만 7,561명을 검거하고, 이들 중 66%에 해당하는 3만 8,259명을 군부대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하여 이른바 삼청교육(三淸敎育)을 받게 하였다. 삼청교육 대상자 중에는 정치인, 재야인사, 광주시위 관련자, 대학생, 종교인 등 시국사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진행된 공직자 숙정 및 사회정화운동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 숙정작업으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많은 수의 민간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하나회와 대립관계에 있던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했다. 심지어 1973년 윤필용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아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구속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7월 21일 계엄군에게 연행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면서 가혹한 삼청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 하나회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은 1980년 도로공사사장을 맡는 등 후배들로부터 과거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또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던 많은 수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새롭게 정계와 국영기업체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하나회 창립 멤버였던 권익현은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한 후 삼성정밀 전무를 지내다가, 육사 11기 친구들의 배려로 7월 26일 제2무임소 장관 보좌역에 임명되었다.

1979-80년 권력의 공백기에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10.26, 12.12, 5.18 등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제5공화국 창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군 상층부와 야당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 들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이 내적 결속력이 높은 비밀사조직을 통해 오랫동안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

인맥정치에 관한 평가

제5공화국의 정치인맥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에도 국가권력의 핵심부를 장악한 세력은 재벌이 아니라 군부였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비밀사조직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비밀리에 가입된 이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육군본부, 수경사, 보안사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는 1979-80년 신군부 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쿠데타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들의 3분의 2가 하나회 회원이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부대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 부대인 공수특전단이었다.

 

이들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마련하는 작업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보안사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국보위 인선작업과 민정당 창당과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하나회 인맥의 위세는 제5공화국의 출범과 더불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형성하고, 청와대, 행정부, 국회 및 정당, 군, 정부투자기관, 기업체, 연구단체 등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상층부와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민간세력이 결합하여 "전두환-하나회-정규육사출신-전문관료.민간인"의 구조를 가진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원인으로는 군 내부적 요인과 사회정치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 군 내부적 요인이 더 강했다. 197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인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불투명한 사회정치적 상황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과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간의 세력다툼이라는 군 내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군사쿠데타는 개인적 쿠데타, 파당적 쿠데타, 제도적 쿠데타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개인적 쿠데타는 상대적으로 민간부문의 정치제도화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 몇몇 군 장교들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1966년 나이지리아 쿠데타의 사례처럼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 파당적 쿠데타는 군 내부에 엄격한 규율과 위계질서가 확립된 국가에서 군부 내 파벌집단간의 세력다툼에 의해 발생하는 쿠데타로서,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전두환의 12.12쿠데타가 여기에 해당한다. 제도적 쿠데타는 잘 조직되고 우수한 교육을 받은 제도화된 군부집단이 민간부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로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12.12사건은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형적인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군부 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비정규육사 출신 선배 장교들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상급 장교들을 제거한 하극상 사건이다. 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 내에 하나회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갖춘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회 인맥은 큰형님인 전두환을 중심으로 형님-아우 관계로 맺어진 가부장제에 비유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하나회를 낳고 길러 준 어버이에, 윤필용과 같이 하나회를 후원한 선배 장교들은 삼촌에 비유될 수 있다. 다른 비밀사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행정적 지시나 명령보다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의리가 강조되었다. 하나회는 지도력과 위계제 그리고 규율 있는 구성원들을 가지고 정치적 목적을 추구한 정치적 머신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공공의 이익보다도 자기 그룹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하나회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일종의 군부 파벌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동질감과 선배 장교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공통된 불만을 바탕으로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단합시키고 비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에 대항해 배타적 집단이익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12.12사건 직전에 군부는 정승화를 대표로 하는 상층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층으로 양분되었다. 하나회 인맥은 후견인-수혜자 관계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 선배들을 최상층으로 하고 각 기수별로 10-12명의 후배들이 망라된 후견인-수혜자 피라미드에 비유될 수 있다.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전두환은 자신을 추종하는 회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고 그 대가로 자신과 조직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 내었다. 이들이 정권을 잡은 1980년대에는 하나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민간정치세력들이 망라된 거대한 동심원 구조가 형성되었다.

인맥정치는 정치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인맥에 의해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정치행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5공화국의 정치행태는 '하나회 중심의 군부인맥'에 의한 인맥정치였다.

인맥정치는 정치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한 것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 비슷한 이념과 정책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활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국정운영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일사불란한 통치행위를 펴 나갈 수 있다. 권력의 공백기에 정치인맥은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혼란된 정치상황을 헤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맥정치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의 결정이 사적인 자리에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은밀히 내려짐으로써 조직 내부의 민주적 절차가 파괴되고 공식적 조직체계가 약화될 수 있다. 또한 자기 인맥에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이나 조직들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기 쉽고 집단간 갈등과 대결을 불러오기 쉽다. 정치적 머신, 파벌 등과 마찬가지로 정치인맥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제5공화국의 하나회 인맥은 한국정치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우선 군 내부에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보직을 주고받는 불공정한 인사관행을 되풀이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저하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2.12사건과 같이 군의 정상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하급자가 상급자를 체포하는 좋지 못한 전례를 남겼다. 하나회 인맥은 제5공화국의 창출과 운영 과정에서 군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고 민간정치세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으며, 국보위에 의해 주도된 개혁작업과 사회정화활동에 의해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3김 세력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약 8,600여명의 공직자가 물러났다. 그러나 이들은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일해재단, 새세대심장재단, 새마을성금, 평화의 댐 건설 등 이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거액의 기부금을 마련하고 개인적으로 유용하였다. 전기환, 전경환, 이규동, 장영자 등 전두환 친인척들의 비리행위도 극심했다.

정치분야에서 인맥이 없을 수 없다. 동서고금의 모든 정치체제에서 인맥이 형성되지 않았던 때를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렵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인맥이 형성되는 경우를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정치와 인맥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인맥정치는 자기 인맥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잘 뭉치고 강한 힘을 발휘함으로써 안정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 자세를 취하는 등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경시하고 집단이기주의와 부정부패를 낳는 구조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 참고 : 기수별 하나회 명단

 

< 11기 >

☞전두환(全斗煥): 1931년 경남 합천 출생, 대구공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59년 부관학교 졸업, 60년 미국 보병학교 수료, 61년 육본 특전감실 기획과장 대리, 61년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63년 육본 인사참모부 근무, 65년 육군대학 졸업, 66년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67년 수경사 30대대장, 69년 육참총장실 수석부관, 70년 주월백마부대 연대장, 71년 제1공수특전단장, 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78년 1사단장, 79-80년 보안사령관, 80년 중앙정보부장 서리, 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 80년 대장으로 예편; 80년 11대 대통령, 81-88년 민정당 총재, 84년 미국 페퍼다인대 명예정치학박사, 81-88년 12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 1932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59년 미국 특수전학교 심리전 과정 수료, 68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공수특전여단장, 78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79-80년 수경사령관, 80년 국보위 상임위원, 80-81년 보안사령관, 81년 대장으로 예편; 81년 정무제2장관, 82년 초대 체육장관, 82년 내무장관, 83-86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84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 85년 12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대표위원, 87년 민정당 총재, 8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명예법학박사, 90년 민자당 총재, 88-92년 13대 대통령

☞김복동(金復東): 1933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69-70년 주월사 보안대장, 73년 육사생도대장, 75년 3군사 작전참모, 77년 5사단장, 79년 3군사 참모장, 80년 육사교장, 82년 중장으로 예편; 82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82년 광업진흥공사 사장, 85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8년 국제문화연구소 회장, 89년 미국 남캐롤라이나대 명예법학박사, 민자당 대구동갑 지구당위원장

☞정호용(鄭鎬溶): 1932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63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67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공수여단장, 78년 사단장, 79년 특전사령관, 80년 국보위 상임위원, 81년 육참차장, 81년 군사령관, 83-85년 육군참모총장, 85년 대장으로 예편; 87년 내무장관, 87년 국방장관, 13대 대구서갑 민정당 국회의원, 저서 '용병의 원리와 실제'

☞권익현(權翊鉉): 1934년 경남 산청 출생, 55년 육사 졸업, 67년 육군보안사 정보처장, 69년 육군대학 졸업, 69년 주월맹호사단 대대장, 70년 육참총장 보좌관, 72년 연대장,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74년 대령으로 예편; 76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76년 연합철강 상임고문, 78년 삼성정밀 전무, 80년 제2무임소 장관 보좌관, 81년 11대 국회의원, 82년 민정당 사무총장, 84년 민정당 대표위원,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한일의원연맹 회장, 85년 민정당 상임고문, 92년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

☞남중수(南仲守): 55년 육사 졸업

☞노정기(盧正基): 1935년 장흥 출생, 55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68-69년 주월맹호사단 공병대 대장, 71년 수경사 군수참모, 73-75년 제1207건설공병단장, 78년 제2공병여단장, 80년 한미연합사 공병참모 겸 군사정전위 한국군 대표, 소장; 82-89년 주미대사관 국방무관て정무공사, 89년 주 필리핀 대사

☞박갑룡(朴甲龍): 55년 육사 졸업

☞백운택(白雲澤): 55년 육사 졸업, 71방위사단장

☞손영길(孫永吉): 경남 울산 출생, 55년 육사 졸업, 61년 5て16 당시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준장으로 예편; 동주산업회장

☞안교덕(安敎德): 1933년 경북 울진 출생, 55년 육사 졸업, 59년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졸업, 56-60년 육사 영어과 교수, 68년 맹호사단 작전참모.대대장, 70년 미8군 연락장교단장, 72년 연대장, 73년 군사령부 작전과장, 74년 대령으로 예편; 76년 정우개발 대표이사, 정우개발 부회장,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한-네덜란드 의원친선협회 회장, 85년 농업개발공사장, 8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7년 농수산물유통공사장, 9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91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최성택(崔性澤): 1931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55년 육사 졸업, 76년 육본 교육참모부 개인교육처장, 77년 사단장, 79년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 79년 합참2국장, 81년 국방부 정보본부장, 84년 중장으로 예편; 84-85년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수, 86-90년 석유개발공사 사장



< 12기 >

☞김홍진: 56년 육사 졸업

☞박세직(朴世直): 1933년 경북 칠곡 출생, 56년 육사 졸업, 56년 육사 교관, 60년 서울대 문리대 졸업, 69년 육군대학 졸업, 74년 수경사 작전참모, 76년 대통령 안보담당특별보좌관, 78년 국방부장관 보좌관, 79년 군사정보참모, 7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0년 사단장, 80-81년 수경사령관, 81년 소장으로 예편; 81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82년 한전 수석부사장, 82년 안기부 2차장, 85년 총무처 장관, 86년 체육장관, 86-88년 서울올림픽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88년 안기부장, 89년 미국 타우슨대 명예인문학박사, 89년 국민체육진흥공단 고문, 90-91년 서울시장, 9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대학원 졸업, 민자당 구미 지구당위원장

☞박준병(朴俊炳): 1933년 충북 옥천 출생, 대전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60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60년 육사 교수, 70년 육군대학 졸업, 79년 사단장, 80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1-84년 보안사령관, 84년 대장으로 예편; 84년 국민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실장, 87년 국회 보사위장, 88년 13대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사무총장, 91년 민자당 당무위원

☞박희도(朴熙道): 1934년 경남 창녕 출생, 56년 육사 졸업, 69년 육군대학 졸업, 72년 연대장, 76년 군수지원사 참모장, 76년 공수여단장, 80년 사단장, 81년 특전사령관, 82년 제1군단장, 82년 연대 경영대학원 졸업, 83년 참모차장, 83년 군사령관, 85-88년 육군참모총장, 88년 대장으로 예편; 88년 서울대 AMP과정 수료, 저서 '영원한 삶을 위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

☞안필준(安弼濬): 1932년 충북 중원 출생, 청주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77년 육본 교육훈련처장, 78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이수, 80년 사단장, 81년 육본 인사운영감, 82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2년 연대 경영대학원 졸업, 83년 군단장, 84-85년 보안사령관, 85년 야전군사령관, 87년 대장으로 예편; 87년 한국청소년연맹 총재, 88년 석탄공사장, 91년 보사부 장관

☞이광근: 56년 육사 졸업

☞임인식: 56년 육사 졸업

☞장기오(張基梧): 1932년 서울 출생, 56년 육사 졸업, 75년 연대장, 77년 특전사 작전처장, 78년 공수여단장, 81년 사단장, 82년 동국대 대학원 졸업, 83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3년 특검단장, 84년 군단장, 85년 육군 교육사령관, 86년 중장으로 예편; 86년 총무처 차관, 87-88년 총무처 장관, 89년 근로복지공사 이사장

☞정동철(鄭東喆): 1933년 경북 칠곡 출생, 대건고 졸업, 56년 육사 졸업, 61-64년 육사 교관, 66년 서울대 상대 경영과 졸업, 71-73년 서울지구 보안부대장.주월맹호사단.대대장 사단포병사령관, 73년 대령으로 예편; 78년 호텔신라 사장, 80년 감사원 사무차장, 81년 노동부 차관, 85년 한국문화진흥 사장, 87년 한국산업안전공단 이사장

☞최웅(崔雄): 1934년 서울 출생, 56년 육사 졸업, 63년 외대 노어과 졸업, 68년 대대장, 74년 연대장, 77년 특전여단장, 81년 사단장, 82년 특전사령관, 84년 특명검열단장, 85년 합참본부장, 85년 외대 무역대학원 국제경영과 졸업, 86년 중장으로 예편; 86년 외교안보연 연구원, 87년 주 파키스탄 대사, 90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92년 주 폴란드 대사

☞황인수(黃仁秀): 경남 사천, 경남상고 졸업, 중장, 육본 정보참모부장, 육사교장, 사회정화위장, 전 국방부차관



< 13기 >

☞권영휘(權榮暉): 경북 의령, 소장, 육본수송사령관, 창원기계공단 이사장

☞박종남(朴鍾南): 전남 목포, 대령, 새서울종합용역 대표

☞신재기(辛再基): 1933년 경남 창녕 출생, 57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73뇬 윤필용 사건으로 투옥, 73년 대령으로 예편; 78년 한국트랜스주식회사 총무부장.이사, 80년 한국강업주식회사 사장, 80년 수협중앙회 상임이사.부회장, 8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농어촌발전특별위원장

☞오한구(吳漢九): 1934년 경북 봉화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68년 서울대 상대 경영과 졸업, 71년 육군대학 졸업, 71년 육군대학 교관, 77년 대령으로 예편; 77년 포항제철 관리부장.서울사무소장.이사, 81-88년 11.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1년 민정당 원내부총무, 82년 대한산악연 회장, 83년 민정당 대구.경북도지부위원장, 85년 국회 경제과학위원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탈당, 90년 국회 내무위원장

☞우경윤(禹慶允): 경북 예천, 대령, 범죄수사단장, 전 덕평골프장 사장

☞윤태균(尹泰均): 1935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73년 수경사 정보참모, 79년 서울대 학군단장, 80년 육사 참모장, 82년 37사단장, 83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4년 육본 정보참모부장, 85년 국방부 정보본부장, 87년 중장으로 예편; 88-91년 한국도로공사장, 90년 도로협회장, 92년 13대 민자당 전국구 국회의원

☞이우재(李祐在): 1934년 서울 출생, 57년 육사 졸업, 68년 육군대학 졸업, 69년 사단 통신참모, 73년 국방대학원 졸업, 76년 군단 통신참모, 78년 통신단장, 80년 육본 통신차감, 80년 국보위 교통체신분과위원장, 80년 입법회의 의원,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89년 전기통신공사장, 83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수료, 85년 한국전자통신연 이사장, 86년 국제사격연 부회장, 87-91년 아세아사격연 부회장, 89-90년 체신부 장관

☞정동호(鄭東鎬): 1935년 경남 의령 출생, 마산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61년 제1공수특전단 지대장, 65년 주월군수단장, 69년 육군대학 교관, 76년 연대장, 80년 대통령 경호실장, 81년 8사단장, 82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3년 5군단장, 85년 육참차장, 86년 중장으로 예편; 86-88년 도로공사장, 도로협회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9년 낙하산협회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상무위원회 수석부의장

☞정진태(鄭鎭泰): 1934년 충남 예산 출생, 57년 육사 졸업, 61년 서울대 문리대 외교과 졸업, 61년 육사 교수, 76년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79년 제1군단 참모장, 80년 육본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 81년 보병 제9사단장, 83년 육본 정보참모부장, 84년 정보사령관, 85년 고대 경영대학원 졸업, 85년 수도군단장, 87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88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0년 비상기획위 위원장, 대장

☞조명기(趙明紀): 대구, 소장, 헌병감, 지하철공사감사

☞최문규(崔文奎): 대전, 대전고 졸업, 중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수도군단장, 국방대학원장, 육사교장, 비상기획위 부의장,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최세창(崔世昌): 1934년 대구 졸업, 경동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57년 육군 소위, 71년 여단작전참모, 74년 연대장, 76년 군단작전참모, 77년 특전여단장, 80년 사단장, 81-83년 수방사령관, 83년 군단장, 84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4년 육참차장, 85년 3군사령관, 87년 합참의장, 89년 대장으로 예편; 90년 광업진흥공사장, 91년 국방장관

☞황진기(黃鎭祺):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7년 육사 졸업,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 대령



< 14기 >

☞김충욱: 58년 육사 졸업

☞문영일: 58년 육사 졸업

☞박정기(朴正基): 1935년 대구 출생, 58년 육사 졸업, 70년 육군대학 졸업,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령으로 예편; 73년 (주)종근당 부장, 76년 정우개발 상무, 81년 정우개발 사장, 81년 평통자문위원, 82년 한국중공업 사장, 83-87년 한국전력 사장, 83년 에너지연 이사장, 84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수료, 84-87년 원자력산업회의 회장, 84년 전기협회장, 85년 육상연맹 회장, 85년 KOC 상임위원, 89년 한덕생명보험 회장, 91년 육상연맹 집행이사, 저서 '어느 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

☞배명국(裵命國): 1934년 경남 진해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62년 육사 교수, 65년 주월사 대대장, 7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72년 중령으로 예편; 72년 청와대 민정비서실 근무, 81-88년 11.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1년 국회 건설위장, 83년 국회 상공위장, 85년 민정당 중집위원, 88년 민정당 진해.의창 지구당위원장, 88년 지역개발연구소 이사장

☞신쌍호: 경북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신우식(申佑湜): 경북 문경, 문경고 졸업, 소장, 관광공사 감사

☞안무혁(安武赫): 1935년 황해 안악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62년 육사 전임강사, 71년 공병여단장, 73년 육군대학 교관, 78년 건설공병단장, 80년 국보위 건설분과위원장, 80년 입법회의 경제 제2전문위원, 81년 공병여단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사회정화위원장, 82년 국세청장, 87-88년 안기부장, 90년 한국발전연구원 이사장, 14대 민자당 전국구 후보 8번

☞이경종(李暻鍾): 1936년 서울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미국 퍼듀대 대학원 토목과 졸업, 62-73년 육사 토목과 조교수.부교수, 70-75년 서울시 수도행정자문위원, 73년 중앙대 부교수, 75년 한국해외건설사업담당 이사, 79년 극동건설주식회사 기술담당 상무, 81년 정우엔지니어링 사장, 81년 정우개발 부사장, 83년 정우개발 사장, 86년 (주)한양 사장, 88년 양간종합산업주식회사 회장, 91년 양간화학공업주식회사 명예회장

☞이종구(李鍾九): 1935년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6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1년 사단장, 82년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졸업, 83-85년 수방사령관, 85-86년 보안사령관, 86년 2군사령관, 88-90년 육군참모총장, 90년 대장으로 예편; 90-91년 국방장관

☞이철희(李哲熙): 1934년 경남 진해 출생, 58년 육사 졸업, 62년 미국 퍼듀대 대학원 전기과 졸업, 62년 육사 전자과 교수, 73년 숭실대 전산과 교수, 88년 중앙대 전산이학박사, 88년 숭실대 정보과학 대학원장, 88-90년 정보과학회장, 저서 '소프트웨어공학' '컴퓨터 구조론'

☞이춘구(李春九): 1934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육사 졸업, 75년 국방대학원 졸업, 75년 수경사 정보참모, 76년 사단 포병대장, 80년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80년 국보위 사회정화위원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내무부 차관,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6년 민정당 사무총장, 87년 대통령선거대책본부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내무부 장관, 88년 민정당 충북지부위원장, 89년 민정당 사무총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한-우루과이 의원친선협회장, 92년 민자당 사무총장

☞장기하(張基夏): 1933년 경북 울진 출생, 58년 육사 졸업, 74년 국방대학원 졸업, 74년 국방대학원 교수, 78년 연대장, 82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2년 사단장, 84년 소장으로 예편; 84년 청보식품 사장, 85년 (주)진로 고문, 88년 (주)진로 사장, 90년 진로그룹부문 부회장, 91년 진로그룹 회장

☞장홍열(張洪烈): 1935년 강원도 명주 출생, 강능농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7년 명지대 대학원 졸업, 81년 정보사 참모장, 82년 육본 인사운영감, 83년 육군 제50사단장, 85년 교육사 참모장, 86년 육본 관리참모부장, 87년 국방부 조달본부장, 89년 중장으로 예편; 89년 조달청장

☞정도영(鄭棹永): 1935년 경북 문경 출생, 문경고 졸업, 58년 육사 졸업, 74년 육군대학 졸업, 79년 보안사령부 1처장, 80년 보안사 참모장, 82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5년 국방대학원 경영관리과정 수료, 85년 소장으로 예편; 85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86-89년 사회정화위원장, 89년 성업공사장, 90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1년 부동산신탁 주식회사 사장,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최종국: 58년 육사 졸업



< 15기 >

☞강자화(姜資和): 59년 육사 졸업, 군인공제회 관리이사

☞고명승(高明昇): 전북 부안, 전주사범 졸업, 대장, 84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5-86년 수방사령관, 86-87년 보안사령관, 군사령관, 민자당 부안 지구당위원장

☞권병식(權丙植): 1934년 경북 영일 출생, 경북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65년 연대 상경대 경영과 졸업, 66년 연대 대학원 졸업, 81년 육본 인사관리처장, 82년 수도경비사 참모장, 83년 보병 제26사단장, 85년 육군 제3사관학교장, 86-87년 수방사령관, 87년 육군참모차장, 88년 육군 교육사령관, 88년 합동참모본부장, 90년 중장으로 예편; 91년 한국도로공사 사장

☞김상구(金相球): 경북 상주, 수경사 포병대대장, 석유개발공사 이사, 호주대사,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김중영: 59년 육사 졸업

☞나중배(羅重培): 충남 예산, 대전고 졸업, 대장, 사단장, 육본 정책기획실장, 군단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민병돈(閔丙敦): 서울, 휘문고 졸업, 중장, 80년 국보위 내무위원, 육본정보참모,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박태진(朴泰珍): 1935년 부산 출생, 59년 육사 졸업, 75년 육군대학 졸업, 82년 방공포병 1여단장, 83년 주일수석무관, 87년 방공포병사령관, 87년 소장으로 예편; 87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88년 주 요르단 대사, 91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이대희(李大熙): 1935년 경북 예천 출생, 경북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72년 대대장, 75년 수경사 인사참모, 78년 연대장, 82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사단장, 85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5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7년 군단장, 89년 특명검열단장, 90년 중장으로 예편; 90년 병무청장

☞이상수(李相秀): 59년 육사 졸업

☞이진삼(李鎭三): 1937년 충남 부여 출생, 부여고 졸업, 59년 육사 졸업, 77년 국방대학원 졸업, 77년 연대장, 78년 사격지도단장, 80년 공수특전여단장, 82년 사단장, 85년 정보사령관, 8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87년 군단장, 88년 육군참모차장, 89년 군사령관, 90-91년 육군참모총장, 91년 대장으로 예편; 91년 체육청소년부 장관

☞이한종(李漢鍾): 59년 육사 졸업, 정우개발사장, 국방대학원 교수



< 16기 >

☞김정룡(金正龍): 경북 문경, 문경고 졸업, 소장, 보안사 참모장, 국방부 정보본부차장, 수자원공사 감사

☞김충식: 60년 육사 졸업

☞송응섭(宋膺燮): 대구, 중앙고 졸업, 대장, 합참 제1차장,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대표

☞신말업(申末業): 경남 울주, 부산고 졸업, 대장, 사단장, 참모차장, 전 군사령관

☞양현두: 60년 육사 졸업

☞이지윤: 60년 육사 졸업

☞이필섭(李弼燮): 1924년 당진 출생, 60년 육사 졸업, 79년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2군사령관, 87-89년 육사교장, 91년 합참의장

☞장세동(張世東): 1936년 전남 고흥 출생, 60년 육사 졸업, 81년 대통령 경호실장, 84년 중장으로 예편; 85-87년 안기부장

☞정만길(丁萬吉): 서울 출생, 서울고 졸업, 중장, 5공수여단장, 7사단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5군단장, 국방대학원장, 광업진흥공사 사장

☞정순덕(鄭順德): 1935년 경남 충무 출생, 60년 육사 졸업, 74년 육군대학 졸업, 78년 국방대학원 졸업, 80년 군단참모장, 81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2년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85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5년 민정당 사무총장, 87년 한-모로코 의원친선협회장,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88년 국회 재무위원장, 88년 민정당 경남지부위원장, 90년 민자당 입당, 90년 민자당 사무총장

☞최원규: 60년 육사 졸업

☞최평욱(崔坪旭): 1937년 경남 남해 출생, 60년 육사 졸업, 80년 국보위 운영위원, 86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7-88년 보안사령관, 88년 교육사령관, 89년 중장으로 예편; 90년 산림청장, 91년 철도청장



< 17기 >

☞강명오: 61년 육사 졸업

☞김근준(金根俊): 61년 육사 졸업, 전 군단장

☞김진영(金振永): 1938년 경남 충무 출생, 부산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73년 미국 지휘참모대 졸업, 79년 수방사령부 33경비단장, 79년 수방사 작전참모, 83년 수방사 작전처장, 84년 수도기계화 사단장, 86년 육군3사관학교장, 87-89년 수방사령관.교육사령관, 90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91-93년 육군참모총장, 대장, 9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김태섭: 61년 육사 졸업, 중장, 7군단장

☞류근하(柳根夏): 61년 육사 졸업

☞안현태(安賢泰): 전 대통령 경호실장

☞이문석(李文錫): 서울, 경복고 졸업, 대장, 특전사령관, 참모차장, 1군 사령관

☞이병태: 61년 육사 졸업

☞이해룡: 61년 육사 졸업

☞이현우(李賢雨): 대구 출생, 61년 육사 졸업, 80-81년 수방사령부 30단장, 87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소장

☞임인조(林寅造): 61년 육사 졸업, 87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허삼수(許三守): 1936년 부산 출생, 부산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76년 연대 경영대학원 수료, 79년 보안사 인사처장, 80년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 간사, 80년 준장으로 예편; 80-82년 대통령 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 83년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에서 연수, 민자당 부산동구 지구당위원장

☞허화평(許和平): 1937년 경북 포항 출생, 포항고 졸업, 61년 육사 졸업, 육군대대장, 사단작전참모, 특명검열단 검열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준장으로 예편; 82년 대통령 정무 제1수석비서관, 현대사회연구소장, 경북 포항 무소속 후보



< 18기 >

☞구창회(具昌會): 경남 진주, 경남고 졸업, 대장, 88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89-90년 수방사령관, 90-91년 보안사령관, 3군사령관

☞김재창(金在昌): 대구, 중장, 군단장, 합참 작전실장

☞김정헌(金正憲): 대구, 중장, 육사교장

☞배대웅: 62년 육사 졸업

☞성환옥(成煥玉): 1938년 경북 영천 출생, 대구사범 졸업, 62년 육사 졸업, 75년 사단 헌병대장, 77년 육본 헌병감실 작전기획담당, 79년 육본 헌병대장, 79년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79년 수경사 헌병단장, 82년 국방부 범죄 수사단장, 83년 육본 헌병감, 85년 준장으로 예편; 8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 90년 감사원 사무총장

☞심준석: 62년 육사 졸업

☞이승남: 62년 육사 졸업

☞이시용(李時容): 1938년 의령 출생, 62년 육사 졸업, 62년 육군 지휘관 및 참모, 77년 주서독대사관 국방무관, 80년 준장으로 예편; 81년 주 라이베리아 대사, 83년 미국 하와이동서문화센터 연구원, 84년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정치과 졸업, 84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85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 89년 외교안보연 연구위원, 90년 주 로마교황청 대사

☞이학봉(李鶴捧): 1938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62년 육사 졸업, 77년 보안사 과장, 80년 보안사 처장, 80년 준장으로 예편; 80년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86년 안기부 2차장, 88년 민정당 국책조정위 상임위원, 88년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90년 민자당 입당

☞정태화(鄭泰和): 소령,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

☞조남풍(趙南豊): 부산, 중장, 88-90년 보안사령관, 교육사령관



< 19기 >

☞김상준(金相駿): 63년 육사 졸업, 81-82년 수방사령부 30단장

☞김정환: 63년 육사 졸업

☞김진선(金鎭渲): 충북 괴산 출생, 괴산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90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90-91년 수방사령관, 참모차장, 중장

☞김택수: 63년 육사 졸업

☞김학주: 63년 육사 졸업

☞노석호(盧錫鎬): 중앙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중령, 삼성중공업 부사장, 삼성항공 부사장

☞서완수(徐完秀): 대구 출생, 경북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80년 국보위 사회정화위원, 특전사령관, 91-93년 기무사령관, 중장

☞이택형: 63년 육사 졸업

☞장석규(張錫奎): 서울, 경복고 졸업, 63년 육사 졸업, 보안사 보안처장, 보안사 참모장, 소장, 성업공사 사장

☞최부웅: 63년 육사 졸업

☞최석림(崔錫林): 63년 육사 졸업, 전 헌병감, 소장

☞최윤수: 63년 육사 졸업

☞최윤식: 63년 육사 졸업, 헌병대령, 경호실 안전처장, 소장

☞최준식: 63년 육사 졸업



< 20기 >

김길부: 64년 육사 졸업

김무웅(金武雄): 64년 육사 졸업, 소장, 한미연합사

김종배: 64년 육사 졸업

안광열: 64년 육사 졸업

안병호(安秉浩): 경남 진주 출생, 진주고 졸업, 64년 육사 졸업, 90-91년 육본 인사참모부장, 91-93년 수방사령관, 중장

이현부: 64년 육사 졸업

장호경: 64년 육사 졸업

함덕선: 64년 육사 졸업

허청일(許淸一): 1941년 경북 경산 출생, 경북고 졸업, 64년 육사 졸업, 81년 대령으로 예편; 81년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81년 민정당 원내부총무.의원실장, 83년 연대 행정대학원 졸업, 83년 민정당 총재비서실장.중집위 상임위원, 83년 대륜교육재단 이사, 85년 12대 민정당 국회의원, 87년 민정당 윤리위원장, 91년 기계공업진흥회장, 저서 '국사봉 더운 가슴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