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1,065 : 해방과 건국 25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 10)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1960~70년대) 10
11. 1960~70년대 경제와 문화
박정희정권이 통치하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경제제일주의가 표방된 가운데 강력한 국가주도의 성장정책을 밀고 나갔다. 모든 정치적 폭압과 부정은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정당화되었다. 그만큼 한민족 5천년 역사를 통해 민중의 가난이 점철되어 왔고 그 오랜 고통의 해소야 말로 대한민국의 지상과제임을 박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절실하게 실감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외국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공업을 육성하고, 양질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산된 제품을 수출하고 자본을 축적해 나간다는 전략이었다. 말하자면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전략이었다.
정부는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우고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한 결과 1960년에 3천 3백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이 1966년에는 2억 5천만 달러로 증가하여 연 44%의 고속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경젝성장률은 연평균 8.5%에 이르렀다. 1967년부터는 다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하여 이 기간에 수출은 연평균 33.7%,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10.7%(1971년 수출 10억 6천만 달러)를 기록하여 경제발전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 1964년에 가동되기 시작한 울산 정유공장, 1969년에 조성된 마산의 수출자유지역과 1970년 7월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경제발전의 상징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 남북대화가 열린 배경에는 남북간에 경제력이 균형을 이룬 것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박정희정부는 유신체제하의 70년대에도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1977년부터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우선 정책으로 방향을 선화하여 경제구조에 균형이 잡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여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 사업이었다.
70년대에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인상하여 경제발전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수출은 꾸준히 지속되어 1977년에는 100억 달러, 1981년에는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수출상품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어섰다. 그리고 공업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5%를 상화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경제성장률은 8.9%를 기록하여 세계적으로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여 국민의 자존심을 부추기고, '하면 된다'는 말로 표현되는 박대통령의 강력한 신념과 개발독재형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성취욕, 그리고 수천년 간 선진문명을 꾸려온 문화적 잠재력이 되살아난 것이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대외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고,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산업불균형,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에서 오는 부패의 만연, 지역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공해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박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반감이 점차 증대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모순점이 재야 및 학생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촌사회의 소득을 올리고,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박대통령이 발의하여 전개된 이 운동으로 초가집의 개량, 농촌도로의 정비, 영농기반의 조성 등 침체된 농촌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뒤에는 도시까지 확대되어 총체적인 국가발전 전략으로 발전하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라는 노래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는 새마을운동을 상징하는 국민가요로서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고 직장과 모든 행정단위에도 실천조직이 짜여져 관민이 다 함께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응하는 의미도 가진 새마을운동은 70년대의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박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박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교육, 문화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4.19혁명을 전후하여 불기 시작한 민족주의 열기를 박정권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 교육, 문화 전반에 '주체적 민족사관'을 강조하고, 이를 교육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민교육헌장'(1968)을 제정하고, 이를 각종 교육지보히에서 낭송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민종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이러한 민족과 국가관념을 높이기 위해 1970년대 이후에는 국사교육을 강화하고 '국민윤리'라는 새로운 과목을 신설하고 대학에도 국민윤리교육과를 설치하였다.
헌편 문화정책에서는 일제시대 파괴된 상곽이나 고적이 복원되고, 이순신이나 강감찬과 같은 애국 무장들의 사당에 대한 성역화사업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국학연구와 고급인력의 연수교육을 겸한 연구기관으로 1978년 '한국정신문화원'을 경기도 성남(판교)에 세웠는데, 10여 년의 작업 끝에 27권의 방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88-1991)을 편찬하였다. 이 사전은 1978년에 완간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24권)와 더불어 박정희정권의 대표적 학술문화사업으로 꼽을 수 있다.
정부의 민족주의 통치철학은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개발독재를 강화하는 역기능이 노출되어 민주화를 열망하는 재야의 비판과 지식인과 마찰을 불러왔다. 자유당 시절에 반독재의 선봉에 섰던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잡지가 <사상계>였다면, 박정권하의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교양지는 <창작과 비평>(1966년 창간)과 <문학과 지성>(1970년 창간)등이었다. 그러나 박정권의 민족주의는 해방후 일제 식민주의 잔재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없던 상황에서 민족 주체성에 대한 국민적 자각과 자신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경제발전의 정신적 추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서 찬반의 팽팽한 주장들이 상존하는 가운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5천년 동안의 민중들의 가난을 극복하게 하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늘의 풍요가 바로 제3공화국의 경제발전이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군사혁명, 인권탄압, 장기집권, 유산독재, 부정부패, 정경유착 등 부정적인 통치행위에 대해서 비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더라도 위대한 군주일수록 정권 창출 및 통치과정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전한 무제와 당 태종 이세민을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는 이유는 국운융성을 가져온 군주이기 때문이다. 한 무제는 영역을 만 리나 넓혔고 많은 민족을 한나라에 복속하게 만들었다. 또 노예 출신의 위청, 곽거병이란 장수를 등용하여 북방의 가장 골치아픈 종족이던 흉노족을 물리쳤는데 이러한 그의 정복 노력은 통치기간 내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수많은 장졸들이 대흉노전쟁에서 죽거나 불구자가 되었고 무제의 무리하고 강압적인 전쟁지시에 여러 장수들이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스스로 전멸당하여 죽거나 군대와 같이 흉노에 망명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주변 사람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하여 자신의 황후는 물론 아들까지 처참하게 살해하는 폐륜을 저지르는 등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정치적 여러 실정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 당 태종 이세민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등극한 폐륜군주이나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정관의 치>로 불리는 그의 치세는 고른 인재등용, 반란군 진압, 영역확장, 반대세력 포용, 직언과 반대 의견 수용, 문화통치, 국력배양, 국운융성을 가져온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으며 중국 역사에서 모범적인 통치사례로 삼고 있다.
후세의 사가들이 제3공화국을 어떻게 평가할지 알 수 없으나 예상컨데,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을 반석위에 올려 놓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위대한 군주가 등장하지만 그들이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강력한 지도력으로 영역을 확장하였고 사회를 개조하고 국력을 배양하여 국운융성을 가져와 민중들이 가난을 면하게 하고 풍요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면 그의 공과를 떠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힘들게 이룩한 이러한 풍요와 정치적 민주화를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고 자만과 정쟁, 이념논쟁, 정통성 시비, 양극화 심화, 사회적 부조리 확산, 비리와 부패 일반화, 일부 계층의 자본의 독식, 종교집단의 불법적인 탐욕, 과거사 정리에 매달려 개혁을 시도하지 못하고 아까운 세월을 허비한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업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나라는 발전과 추락의 기로에 서 있다. 다시 일취월장 하느냐 아니면 고려말이나 조선말처럼 소수의 가진자와 권력층에 의해 부패와 탐욕이 심화되고 자본적인 신분 변화의 기회가 상실된다면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져 내부적으로 심각한 중병에 걸리는 경우 결국 북한을 포함 주변 강대국에 다시 나라를 빼앗기고 속국화되어 멸망당하는 비극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12. 북한의 변화
남한에서 강력한 군사정부가 수립되었던 1960년대에 북한에서도 항일빨치산 출신의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남로당, 연안파, 소련파 등 비교적 온건노선을 추구하던 세력이 이미 50년대에 숙청되어 김일성 동료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무장투쟁의 경력을 가진 항일빨치산세력은 60년대부터 국방건설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고, 이른바 4대군사노선을 채택하여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군수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말하자면 북한사회 전체를 병영으로 개편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방비의 비중이 국가재정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지고,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둔화되기 시작했다.
박금철, 이효순 등 이른바 갑산파가 국방건설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부르조아 수정주의 사상으로 규탄을 받고 1967년 숙청되었다.
북한의 국방건설에 우선을 둔 것은 남한에서 한.일협정으로 한.미.일 안보체제가 구축되고, 베트남 파병 후 국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소련 및 중국과의 관계가 악회되어 국제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에서 후르시쵸프(1958~1964)가 등장하여 스탈린 노선이 비판되고 수정주의와 평화공존이 추구되자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중.소 분쟁이 격화된 가운데 중국에서 '문화대혁명'(1966~68)이 일어나 김일성을 수정주의자, 독재자로 비난하면서 양국관계가 악화되었다. 여기에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함이 북한연안을 정탐하다가 나포된 사건은 북한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국방건설과 더불어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주체노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주체노선은 자주(정치), 자립(경제), 자위(국방)를 강조하였다. 또한 김일성과 노동당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김일성우상화와 김일성가계의 성역화가 추진되었고, 우리나라 역사를 조선인민의 입장과 계급적 입장을 조화시켜 서술하고, 특히 근대사와 현대사를 빨치산중심으로 쓰도록 강요하였다. 역사연구의 주도권을 당이 장악하여 김일성의 '교시'기 등장한 것도 60년대초부터이다. 1969년에는 '주체사상'을 노동당의 '유일사상'으로 규정하였다. 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크게 수정된 것을 의미한다.
60년대의 북한은 강온 양면의 대남정책을 추진하였다. 60년 북한은 겉으로는 평화적인 '남북연방제' 통일안을 제시하고, 내면적으로는 60년대초부터 남한에 '통일혁명당'을 조직하여 주체사상에 입각한 내부혁명을 부추겼다. 70년 북한은 남조선혁명을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여 미군철수를 최우선과제로 제시하였는데, 이 이론이 80년대 중반이후 남한의 이른바 '주체사상파'(약칭 주사파) 학생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68년에는 무장군인들을 남파하여 청와대를 습격하고, 다음해에는 무장게릴라를 삼척에 보내 무력도발을 게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도발은 도리아 남한의 안보의식을 자극하여 박대통령의 권력강화와 군사통치를 강화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1970년을 전후하여 북한은 강경노선을 완화하고, 경제건설과 대남정책의 실패를 물어 빨치산세력 중 강경파를 숙청하고 실무형관료와 혁명 2세대를 등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들 김정일을 비롯한 김일성의 친인척이 권력의 햑심에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김일성 족벌체제가 출범한 가운데 안으로는 김일성의 권력을 무한대로 높이기 위해 1972년 12월 '인민민주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헌법은 국가권력을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의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절대권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남한에서 10월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다. 또한 새 헌법은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꾸어 평양이 '민족의 심장부'로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의 북한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김정일이었다. 그는 30세 되던 1973년 9월에 당을 장악하고,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인되어 '당중앙'으로 호칭되었다. 그는 또한 1973년부터 3대혁명소조운동을 지도하면서 수만 명의 젊은 엘리트를 장악하고, 1974년부터는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구호가 나타나 김정일 세습체제를 대중속에 뿌리내려갔다.
김정일은 다시 활동을 본격화하여 권력강화와 아울러 이른바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활동이 1985년에 이르러 <위대한 주체사상총서>(전10권)라는 이름으로 발간되면서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이 마무리되었다. 주체사상의 확립을 계기로 북한은 그 동안 의지해온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청산하고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천명하였다.
70년대 북한의 경제는 여전히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6개년계획(71~77), 7개년계획(78~84)이 잇달아 추진되었지만, 연평균 성장률이 2%를 넘지 못하였다. 이 시기 남한이 10% 내외의 고속성장을 이룩한 것과는 대조를 보였다. 1980년 현재 남한의 국민총생산은 북한의 4배 가까이 되었다. 북한은 경제발전을 다그치기 위해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기업의 독립채산제 등을 실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술혁신의 부족, 외국원조의 감소, 대외무역의 부진, 전력과 석유의 부족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로지 노동력 동원에 의존한 경제건설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70년대의 남북관계는 비교적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경경파의 퇴진으로 1972년의 역사적인 남북대화가 열리고, 동서평화공존 분위기에 어느 정도 순응하였다. 그러나 남조선해방을 내세워 북한주민을 결속시키고, 남한의 반정부운동을 고무하는 정책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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