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1,064 : 해방과 건국 24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 9)
역사는 당대에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구성되고 짜여지며, 삶과 죽음의 질곡의 늪을 헤치며 나름대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자의던 타의던 역사의 흐름 속에 던져진다. 역사는 힘에 의해 조종되고 그 힘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역사의 물줄기는 달라지는 듯하다.
현대사에서 10.26사건과 12.12 군사반란은 김재규에 의해 유신독재자의 종말이 오는 순간부터 비롯되었다. 역사에서 독재자의 말로는 항상 비참했다. 강력했던 권력일수록 독재자가 쓰끄러지는 순간부터 권력의 공백에 따른 혼란은 엄청나기 마련이다. 허공에 던져진 권력을 누가 먼저 잡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는 달라진다.
그 당시 개개인 자신이 어디에 서 있었느냐에 따라 역사속의 인물로 부각되느냐 아니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느냐가 판가름 난다. 후일 역사가는 김재규가 유신독재를 종식시킨 인물로 기록할 것이며 고려 공민왕을 살해한 자재위 홀륜 정도의 인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합수부장이며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의 신속한 대응은 김재규를 체포하고 정승화를 앞세워 실질적인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군대내 반대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권력 장악 가능성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친위부대로 양성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주도하게 되는데,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상관에게 항명하는 군내 하나회 사조직의 후배 장교들을 동원하여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총장 정승화를 비롯하여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 등 반대파를 일거에 제거하고 권력의 우두머리로 올라서게 된다.
이 와중에 직장과 공직에서 쫓겨나거나 군복을 벗은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많은 그 사람들의 저주는 5.18 민주화 항쟁으로 나타나게 되고 후일 전두환 정권을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게 된다. 그러나 아직 감정이 잎선 역사의 단죄는 아직 이르다. 후일 역사가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1960~70년대) 9
12.6 사건과 12.12군사반란 관련 인물들
차지철
차지철(車智澈, 1934년 11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5·16 군사정변을 비롯한 박종규와 함께 박정희의 경호 최측근으로 권력을 휘둘렸다.
생애
1934년 11월 16일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에서 태어나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차지철과 다른 성씨를 가진 3녀가 있었고 차지철은 서자였다.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대한민국 육군 포병간부후보생을 통해 소위로 임관한 뒤, 미국에서 포트실 포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8년 육군 최초의 특수전부대인 제1전투단(이듬해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에 창설요원으로 참가하였다. 1960년 미국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전두환 등의 장교들과 함께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에서 레인저훈련을 받았다. 이듬해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의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축이 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쿠데타의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육군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전역한 뒤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학사 졸업, 1964년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1965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어 계속 공화당 의원직을 유지했다. 그 후에는 국회 외무국방위원장까지 지내며 국회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66년 송희성과 결혼하였으나.. 10.26 후 언론보도를 보면 노모 김대안씨와 부인 윤보영 씨 등이 기절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희성과 이혼하고 윤보영과 재혼한 것을 알 수 있다. 1991년 7월11일 보도를 보면 전처 송희성이 중앙일보를 상대로 2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다는 기사도 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차지철은 유신정우회 의원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974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자진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총애를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차지철이 경호실장 된후 차지철이 권력을 휘두르게 됐으며 박정희 정권이 부패되기 시작했다.
사망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사살되었다. 권력기관(장)의 알력으로 중앙정보부장(김재규)에 대해 권력자의 편애, 경질설, 복합적인 불만과 당일 차지철 실장으로부터 인간적인 모멸감이 촉발되어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 도중 죽임을 당한 것, 그리고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과 그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살해한 경위는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어린 두딸이 있었는데, 장례식 당시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있는 어린 두 딸(10세 전후)의 모습이 권력무상을 알게하고, 어쨌튼 차지철은 이후 유신정권의 2인자로 제1공화국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 못지 않게 인간 적으로 나쁘게 평가되어 있다. 차지철의 무덤의 위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재규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행정관료, 정무직공무원이다.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을 수료하고 군인이 되어, 1954년 5사단 36연대장,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 이후 1963년 6사단장, 1966년 육군 6관구사령관 등을 거쳐 방첩부대장, 69년 보안사령관, 1971년 3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중앙정보부 차장, 1974년 건설부장관, 1976년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대통령 경호실 실장 차지철과 갈등하다가 1979년 10월 26일 밤, 삽교천 방조제 준공에 참석하고 온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궁정동 만찬회 석상에서 언쟁 끝에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등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10·26 사태를 일으키고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에 의해 체포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에 반대하여 한때 투옥되었지만 박정희의 동향 인물이라고 하여 풀려나 군정 하에서 호남비료 사장을 역임한 적이 있다. 10·26 사건을 일으켰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실패하고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되었다. 그가 10·26 사태를 일으킨 동기에 대해서는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부마민중항쟁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는 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는 설, 미국의 개입설 등 불확실하다.
박정희 암살의 동기
박정희가 차지철 등을 신임하면서 그와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설과 박정희로부터 업무적인 질책을 많이 당해서 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범행 동기도 우발적이라는 주장과 계획적인 암살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김재규의 살해 동기에 대해 '우발적 행위' '내란음모설' '미국 중앙정보부 사주설' 등이 분분했지만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김재규 본인의 변론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9]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우발적 범죄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지만,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다.
평가와 비판
김재규의 암살을 놓고는 여러가지 의혹이 존재하고 있고 평가도 극과 극을 다릴고 있다.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민주화를 위해서 대통령을 죽인게아니라 단지 권력싸움에서 비롯된거라는 주장이있다.
내연녀의 재산 반환 소송
김재규가 평소 즐겨찾던 용산의 어느 한정식집이 있었다. 그 한정식집의 주인 장정이는 그의 내연녀가 되었다. 그리고 김재규는 용산 서빙고동의 집 한채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김전부장이 즐겨 찾는 한정식집을 운영하며 김씨와 내연관계였던 인물로 김재규는 1968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중경고등학교(지금 한강중 자리)를 설립하면서 학교 뒤편 부지 200여평 땅에 장씨를 위해 집을 지어줬다.
김씨는 2년 뒤 장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중경학원으로부터 이 땅을 아들 명의로 사들였다. 그러나 소유권 이전 절차는 나중으로 미뤘다. 그러던 중 79년 10·26이 터졌고 그는 죽고 만다. 중경학원은 재산환수조치에 따라 신군부의 손에 넘어갔다. 장씨는 82년 중경학원을 상대로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냈지만 실질적 매매관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소유권 이전 절차를 마치지 못했던 장정이 모자의 집도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신군부는 86년 중경학원 소유 땅을 서울시에 증여했다. 하루 아침에 장씨 모자는 시유지에 불법건축물을 짓고 사는 셈이 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장정이 모자에게 퇴거를 요구했으나 장정이는 나가지 않고 버텼다. 서울시는 장씨에게 불법점유에 대한 변상금을 부과했지만 장씨측이 8억원에 달하는 변상금을 한번도 내지 않자 건물철거소송에 들어갔다.
2005년 8월 25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즐겨 찾던 한정식집을 경영하던 그는 20여년 전에 빼앗긴 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방위성금 반환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5단독 백웅철 판사는 “재산 환수과정에서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소멸시효(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 있은 날로부터 10년)가 지났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판결했다”고 24일 밝혔다. 재판부는 “‘안가’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재산환수 절차가 적법하지 않았다”는 등의 장씨측 주장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다. 입증이 어렵고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재판부에 따르면 당시 합수부 수사관 김모씨는 1989년 3월 10일 ‘김재규의 부정축재 재산을 환수하라’는 방침에 따라 장씨로부터 5천3백50여만원을 회수했다. 김씨는 나흘 뒤 장씨에게 국방부장관실 남모 대령 명의로 방위성금 영수증을 발급해줬다. 1심 재판부는 장씨측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땅을 뺏겼다는 증거가 없고 장씨가 서울시에 변상금을 내겠다는 각서를 쓴 점으로 미뤄 소유 의사가 없음을 자인한 것이라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항소심에서의 재판부는 장정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6년 2월 7일 서울고법 민사11부는 "당시 1살이던 장씨 아들의 이름이 과세관청에 신고된 점을 볼 때 김전부장과 장씨가 이 땅을 매수하면서 아들에게 증여한 정황이 인정되고 당시 소유권 이전 절차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장씨가 소유 의사를 갖고 점유해 취득시효(20년)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1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
기타
본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서자 두 형제만 어머니 장씨가 떠난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집을 오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서울시의 건물철거소송에서 패소했다.
생전 김 부장은 자신이 설립을 주도한 학교법인 중경학원 용지 일부를 장씨가 낳은 아들 김모(43)씨의 이름으로 사들였고, 이 땅 위에 휘하의 공병부대원들을 동원해 집을 지었다. 아들 그러나 김씨는 10·26사태 이후 '선물'을 뺏겼다. 부정축재 재산환수 조치에 따라 집이 신군부에 넘겨졌고, 이후 서울시교육청 소유가 됐다. 장씨가 이에 맞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냈지만 기각 당했다.
최규하
최규하(崔圭夏, 1919년 7월 16일 ~ 2006년 10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외교관·관료·정치인으로 대통령 권한대행과 제10대 대통령을 지냈다.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이자 제4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미 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된 이후, 정부수립 후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로 발탁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된 후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기도 했으며 귀국 이후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 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5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5일부터 1980년 8월 15일까지 군부 실권하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그의 대통령 재직 시기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재직 초반부터 하나회가 반란을 일으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 시위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의 봄 이후에도 계속 통치하다가 1980년 8월 15일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퇴임 후에는 박충훈(朴忠勳) 국무총리 서리가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이승만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
강원도 원주 출생이며 자(字)는 서옥(瑞玉)이고, 호(號)는 현석(玄石)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부인은 홍기(洪基)이다.
정승화
정승화(鄭昇和, 1926년 2월 27일 ~ 2002년 6월 12일)는 대한민국의 참전 군인, 정치가, 사회기관단체인으로 6.25 전쟁 당시의 참전 군인이자 제22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1948년 4월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소위에 임관되고 6.25 전쟁 때는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경상북도 낙동강과 안강 전투, 형산강 도하 작전의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 정변 때는 육군 본부 예하 방첩부대장이었으며 7사단 참모장 등을 거쳐 1967년 장군이 되어 국방부 인사국 부국장, 육군 1군 참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1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호는 송산(松山), 벽옹(碧翁)이다.
10.26 사태 전후
그러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 때에 그 장소인 궁정동 안가 '가'동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 이러한 사실이 육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목이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계엄사령관 정승화)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4시부로 계엄사령관이 되어 김재규 체포 작전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승화는 심증만 있고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김재규를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정승화는 불리한 입장에 서 있었지만 야당 인사들과 손잡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야당 인사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11월 28일 이후 대권 문제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언론사 간부들을 세 차례나 육군본부로 초대하여 차기 대권을 둘러싸고 국민의 관심이 쏠린 세 사람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즉 김대중은 사상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무능력하며, 김종필은 너무 부패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당시 군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소신을 가졌던 정승화는 결국 야당 인사들에게 어떠한 협력, 인정도 거부하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참여하라는 어느 후배, 동료들의 권고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강제 예편
1979년 12.12 사태 당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등에게 연행되고, 육군참모총장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국방부 군법회의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예편되었고 곧이어 국방부장관의 형량 확인 과정에서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0년 6월 10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며, 집행유예형이 내려졌지만 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특사로 사면, 복권되었다가 1988년 군적이 회복되었다.
생애 후반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전격적으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1988년 4월 정계 은퇴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1993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장태완,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7년 "김재규 내란기도 방조미수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뒤 대한민국 성우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는 당뇨와 고혈압 등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고, 만년에는 파킨슨병을 앓기도 했다. 2002년에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해 6월 12일 사망했다
사후
셋째 아들 정이열은 그의 생전에 육사 38기로 졸업하고 육군본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정승화는 사후 2002년 6월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태완
장태완(張泰玩, 1931년 9월 13일 ~ 2010년 7월 26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국영기업인, 정치가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950년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58년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11월부터 제7대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반대하여 전두환의 반란군과 맞서 싸웠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반란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육군 소장으로 강제예편되었다. 이때 쿠데타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는 전두환에게 격노하여 그를 '반란군'이라고 욕하면서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지금 전차를 몰고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두환 부대와 맞서 싸우다가 직위해제되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 사장을 맡았고 1988년부터 1995년 3월까지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 회장을 맡았다. 1993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김영삼 정부에 고발하고자 정승화, 이건영 등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4년 4월 부터 1997년 4월까지 3년간 제27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6대 국회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는데,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반 노무현 진영(일명 '후단협')에 가담했다. 장태완은 민주당에서 탈당하려고 했지만 민주당 전국구 의원이었기에, 민주당 한화갑 대표에게 자신을 당에서 제명해줄 것을 요구해 물의를 빚었다. 2010년 7월 26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빈소에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육사 14기 출신으로 하나회 총무를 지낸 이종구 전 국방장관 등 과거 신군부 인사들도 방문해 조문했다.
장세동
장세동(張世東, 1936년 9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본관은 인동(仁東)이고 전라남도 고흥 출생이다. 호는 남촌(南村)이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을 주도한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으로 재직하였다.
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병주
정병주(鄭柄宙, 1926년 ~ 1989년 3월 6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경상북도 영주 출생이다. 군인 출신인데 1974년부터 이듬해 1975년까지 육군 소장의 신분으로 잠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을 역임함에 정치가의 길을 잠시 지냈다. 그는 조선 왕조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삼봉 정도전의 방계 후손이다.
생애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고 그 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1연대 소대장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군인으로서 정도를 걸은 참다운 군인으로,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쿠데타 세력에게 비협조하다가 체포되어 경회루 기둥에 묶여 있다가 영창에 가기도 했다.
이후 1967년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장을 시작으로 특전사와 인연을 맺었으며 1974년에 육군 소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대통령 경호실 차장으로 있다가 그 이듬해인 1975년에 육군 특전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79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같이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가 준장 진급에 도움을 준 박희도와 최세창에게 배신당했다. 정병주는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직속 부하에 의해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며 그를 보호하려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도 쿠데타군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1980년 1월 20일, 정병주는 현역부적합 처리되어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정병주는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1989년에 목매달아 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 군 당국에 의해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정병주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의혹이 있다.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정병주의 죽음에 대해 논란을 제기했다.
기타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 인물(전두환 측)
국군보안사령부
-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소장) : 차후 기술
- 허화평 비서실장 (대령)
- 허삼수 인사처장 (대령)
- 이학봉 수사과장 (중령)
- 정도영 보안처장 (대령)
- 수도경비사령부
- 장세동 제30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선 작전보좌관 겸 상황실장 (중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진백 인사참모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소장) 직속부하)
- 조홍 헌병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최석립 제33헌병경호대장 (중령) (제33헌병경호대는 대통령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전두환)에 임시로 배속됨 )
- 신윤희 헌병부단장 (중령)
- 육군본부 및 국방부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 우경윤 범죄수사단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 변규수 보안부대장 (준장)
- 사단 군단 및 여단 제군 사령부
-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김성환 육군 수도군단 참모장 (준장)
-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최동수 육군 제1군단 헌병대장 (대령)
- 백운택 육군 제71방위보병사단장 (준장)
-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박희모 육군 제30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송응섭 육군 제30보병사단 90연대장 (대령)
- 노태우 육군 제9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차후 기술
- 구창회 육군 제9보병사단 참모장 (대령)
- 이문섭 육군 제9보병사단 28연대장 (대령)
- 이필섭 육군 제9보병사단 29연대장 (대령)
- 김봉규 육군 제9보병사단 30연대장 (대령)
- 정호용 육군 제50보병사단장 (소장)
- 이상규 육군 제2기갑여단장 (준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특전사령부
-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기룡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 (대령)
- 김경일 제1공수특전여단 1대대장 (중령)
- 백남석 제1공수특전여단 헌병대장 (대위)
- 권대포 제1공수여단 작전참모 (소령)
- 박덕화 제1공수특전여단 5대대장 (중령)
-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박종규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중령)
-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정룡 특전사령부 보안부대장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신우식 특전사령부 작전참모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병구 특전사령부 작전처장 (대령)(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대통령 경호실
- 고명승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진압측 인물(정승화 측)
수도경비사령부
-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 김기택 참모장 (준장)
- 김수택 비서실장 (중령)
- 박동원 작전참모 (중령)
- 구명회 야전포병단장 (대령)
- 황동환 방공포병단장 (대령)
특전사령부
-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 김오랑 특전사령관 부관 (소령)
- 이순길 부사령관 (준장)
- 윤흥기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 신수종 제9공수특전여단 참모장 (대령)
사단 및 군단 사령부
- 이건영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중장)
- 최영구 육군 제5군단장 (중장)
- 강영식 육군 제6군단장 (중장)
- 배정도 육군 제26보병사단장 (소장)
- 손길남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한미연합사령부, 국방부
- 노재현 국방부 장관
- 김용휴 국방부 차관
- 김종환 합동참모의장 (대장)
- 류병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대장)
-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대장)
- 로젠 크랜스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직무대리 (중장)
-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중장)
- 문홍구 합동참모본부 본부장 (중장)
-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준장)
-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소장)
- 구정길 육군본부 헌병경호대장 (중령)
- 천주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소장)
- 황의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소장)
- 채항석 육군본부 교육참모부장 (소장)
- 정정택 육군본부 예비군참모부장 (소장)
- 김시봉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소장)
- 이정랑 육군본부 통신감 (준장)
- 신정수 육군본부 민사군 정감 겸 계엄사령부 참모장 ()
- 이범진 국방부 소속 (소장)
- 김광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비서실장 (중령)
- 박종곤 해군본부 헌병감 (준장)
- 황관영 육군본부 본부사령관 (준장)
- 황원탁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령)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대장)
- 김인선 육군참모총장 경호대장 (대위)
-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부관 (소령
기타
- 최규하 제10대 대통령
- 신현확 국무총리
-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 (중장)
-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 (소장)
- 우국일 보안사령부 참모장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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