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1,063 : 해방과 건국 23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 8)
5.16 군사혁명과 제3공화국(1960~70년대) 8
10.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10·26 사건(十二六事件) 또는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 |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 ” |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총을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 역시 확인 사살했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당했다.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1]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아 살해당함.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정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사살함.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사망자
-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가슴과 머리를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안재송 - 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김용섭 - 대통령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 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 박상범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 심수봉
- 신재순
사건 처리자들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유고후 계엄 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 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 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이기주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김태원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석술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 서영준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12.12 군사쿠테타
12·12 군사 반란(- 軍事 叛亂) 또는 12·12 사태(- 事態)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사건의 배경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 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개 과정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 경 전두환은 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공수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거사를 협의했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 연행은 일과 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실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같은 날 오후 6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 수사관 허삼수, 우경윤은 정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오후 7시,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을 투입했다. 헌병대 병력은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으로 경비원들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했다.[4] 오후 7시 21분, 반란군은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21시 30분경,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등에 대해 하극상의 대항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 1 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 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지휘관이었던 제 5 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서울로 출동했다. 또한 노태우 소장은 자신의 지휘관이던 9사단 29연대 병력을 중앙창 앞에 집결시켰다.
박희도 준장의 제 1 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향해 달려갔다. 얼마 후, 1 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경비병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하고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그리고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은 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끌고갔다. 한편 최세창 준장의 제 3 공수특전여단은 부대 영내에 있던 특전사령부를 완전히 장악,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사살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생포하였다.
결국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4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됐다.
미국 측 판단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12 사태 발생 8일후인 12월 20일 작성한 `남한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상황판단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또한,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간의 합의를 위반한데 대해 백악관과 미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민간정부만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보름 뒤 신군부 세력에 대한 비판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사실 상 군부 내 반란을 묵인했다.
북한 측 판단
1979년 12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은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 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란 이후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5.17 쿠데타)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5월 24일 김재규 등 박정희 피살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9월 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처벌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2.12 사건 기소 유예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1995년 1월 20일 12·12사건 기소유예처분취소청구에 대하여 각하 및 기각 결정을 내렸다. 1995년 7월 검찰은 5ㆍ18 사건은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결국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에서의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2·12, 5·18 사건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고등법원에서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경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게 반란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사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반란군(전두환 측)과 진압군(정승화 측)
군사 반란 당시 하나회 핵심 인물(전두환 측)
국군보안사령부
-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소장)
- 허화평 비서실장 (대령)
- 허삼수 인사처장 (대령)
- 이학봉 수사과장 (중령)
- 정도영 보안처장 (대령)
- 수도경비사령부
- 장세동 제30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진선 작전보좌관 겸 상황실장 (중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진백 인사참모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소장) 직속부하)
- 조홍 헌병단장 (대령)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최석립 제33헌병경호대장 (중령) (제33헌병경호대는 대통령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본부장:전두환)에 임시로 배속됨 )
- 신윤희 헌병부단장 (중령)
- 육군본부 및 국방부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 우경윤 범죄수사단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당시 김진기 헌병감 (준장) 직속부하)
- 변규수 보안부대장 (준장)
- 사단 군단 및 여단 제군 사령부
- 차규헌 육군 수도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김성환 육군 수도군단 참모장 (준장)
- 황영시 육군 제1군단장 (중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최동수 육군 제1군단 헌병대장 (대령)
- 백운택 육군 제71방위보병사단장 (준장)
- 박준병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박희모 육군 제30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송응섭 육군 제30보병사단 90연대장 (대령)
- 노태우 육군 제9보병사단장 (소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구창회 육군 제9보병사단 참모장 (대령)
- 이문섭 육군 제9보병사단 28연대장 (대령)
- 이필섭 육군 제9보병사단 29연대장 (대령)
- 김봉규 육군 제9보병사단 30연대장 (대령)
- 정호용 육군 제50보병사단장 (소장)
- 이상규 육군 제2기갑여단장 (준장)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 (중장) 직속부하)
- 특전사령부
-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기룡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 (대령)
- 김경일 제1공수특전여단 1대대장 (중령)
- 백남석 제1공수특전여단 헌병대장 (대위)
- 권대포 제1공수여단 작전참모 (소령)
- 박덕화 제1공수특전여단 5대대장 (중령)
-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박종규 제3공수특전여단 15대대장 (중령)
-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김정룡 특전사령부 보안부대장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신우식 특전사령부 작전참모 (대령)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이병구 특전사령부 작전처장 (대령)(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직속부하)
- 대통령 경호실
- 고명승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진압측 인물(정승화 측
수도경비사령부
-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소장)
- 김기택 참모장 (준장)
- 김수택 비서실장 (중령)
- 박동원 작전참모 (중령)
- 구명회 야전포병단장 (대령)
- 황동환 방공포병단장 (대령)
특전사령부
- 정병주 특전사령관 (소장)
- 김오랑 특전사령관 부관 (소령)
- 이순길 부사령관 (준장)
- 윤흥기 제9공수특전여단장 (준장)
- 신수종 제9공수특전여단 참모장 (대령)
사단 및 군단 사령부
- 이건영 육군 제3야전군사령관 (중장)
- 최영구 육군 제5군단장 (중장)
- 강영식 육군 제6군단장 (중장)
- 배정도 육군 제26보병사단장 (소장)
- 손길남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소장)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한미연합사령부, 국방부
- 노재현 국방부 장관
- 김용휴 국방부 차관
- 김종환 합동참모의장 (대장)
- 류병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대장)
-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 (대장)
- 로젠 크랜스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직무대리 (중장)
-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중장)
- 문홍구 합동참모본부 본부장 (중장)
-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준장)
-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소장)
- 구정길 육군본부 헌병경호대장 (중령)
- 천주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소장)
- 황의철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소장)
- 채항석 육군본부 교육참모부장 (소장)
- 정정택 육군본부 예비군참모부장 (소장)
- 김시봉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 (소장)
- 이정랑 육군본부 통신감 (준장)
- 신정수 육군본부 민사군 정감 겸 계엄사령부 참모장 ()
- 이범진 국방부 소속 (소장)
- 김광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비서실장 (중령)
- 박종곤 해군본부 헌병감 (준장)
- 황관영 육군본부 본부사령관 (준장)
- 황원탁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령)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대장)
- 김인선 육군참모총장 경호대장 (대위)
-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부관 (소령
기타
- 최규하 제10대 대통령
- 신현확 국무총리
-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 (중장)
-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장 (소장)
- 우국일 보안사령부 참모장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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