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5 : 역사에서 본 개혁과 오늘날 '마피아공화국' 한국

 

 

강남의 봄 15 : 역사에서 본 개혁과 오늘날의 '마피아공화국' 한국

  

                                                                                                                           반포천 새벽 풍경

 

 

이 땅에도 새벽은 어김없이 밝아오고 있다. 온 국민이 실의와 분노에 빠져 안타까움으로 울부짖고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인가 아니면 지도자를 잘못 만난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이치인가 신의 조화인가?

 

자전거를 타고 나서면 새벽 바람은 아직 차다. 오늘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새벽 풍경은 이채롭다. 내가 살아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렇게 자전거라도 탈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가족이 병들지 않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기지 않아서 감사한다.

 

현재 이 땅의 국민들은 풍요속에 살아가지만 사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숨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비명횡사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로위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무질서와 편법, 뇌물과 비리로 국민들의 안전은 도외시 되고 있고 오로지 세금과 수탈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5월의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또 이번 연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찌든 이 사회의 무질사와 불법, 탐욕의 굴레속에서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설마 나에게...... 하면서 불나비처럼 죽음의 불구덩이가 기다리는 지름길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말하던가?  같이 죽은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단 말인가?  아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며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람팔자 알 수 없다듯이 아침까지도 멀정하던 우리들의 피붙이 아들 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비리와 탐욕으로 찌든 마피아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가족들이 울부짖고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모두가 내 아들이요 딸 자식들이다. 종교집단 교주의 탐욕은 노후 선박을 개조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승객과 화물은 돈벌이 수단이 되었고 선박의 안전보다 화물을 더 싣고 더 태우기 위해서 선실을 증축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다. 인천-제주 한번 왕복에 수억 원씩 수익이 생기니 안전은 이미 사라졌다.  정비.검사업체는 뇌물을 먹고 눈감아 주었고 주먹구구식 점검은 수분을 초과하지 않았다. 평형수 물을 빼고 화물을 더 싣고 승객도 더 태우고 띠뚱거리면서 밤하늘 파도를 헤치며 사탄으로 변한 세월호는 인천을 출발했다. 이미 엄청난 불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사고는 현재의 한국사회 축소판이나 다름 없는 듯하다. 우리사회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대대적으로 혁신하지 않는한 이런 유사한 사고는 반드시 재발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목숨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를 믿지 못하는 국민들이 어제께 상왕십리 지하철 충돌사고에서도 '그대로 있어라'는 방송을 무시하고 대부분 문을 열고 철길로 뛰어 내렸다고 한다.

 

이제는 어떠한 사고시에도 통제불능이다. 승객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선장이나 국민들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지도자나 똑 같기 때문이다. 솔직하지 못한 후진국 수준의 무능한 정부, 비리와 부패로 점철된 뇌물구조의 관료사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은 세금과 수탈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인명경시풍조, 미래에 일어날 국난에서도 그대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개혁은 피를 부른다. 기존의 이권을 챙기려는 무리의 반발이 거세며 누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내려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박대통령은 기로에 섰다. 개혁의 명분을 주어졌다. 어떻게 개혁을 시도할 것인가? 재난청을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개혁되어야 한다.  100만 공무원과 수많은 마피아 집단과의 싸움이다. 과감한 개혁을 시도할 세력과 인물이 필요하다.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두고볼 일이지만 만약 지지부진하다면 국민들의 공분이 들불처럼 타올라 이 땅을 모조리 불태울지 모른다는 우려감이 앞선다.

 

그래서 우리 역사속에서 개혁을 시도한 군주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진단하고 개혁의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려 광종의 개혁

 

고려는 궁예를 제거하고 견훤을 포용한 왕건에 의해 후삼국을 통일하여 자력으로 고려를 창업하였다. 왕건은 당시 수많은 지방 호족들과 결혼동맹을 맺고 그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는데, 태조 왕건이 죽자 유약한 혜종, 짧은 치세의 정종을 거치면서 왕권이 호족세력을 견제하지 못하고 호족세력에 의해 후계자가 선정될 정도로 호족천하 세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종도 마찬가지 호족들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호족들에게 휘둘리면서 초기 7년 동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광종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호족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고려 왕실은 영원히 호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허약한 왕권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광종은 7년동안 죽어 지내면서 호족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개혁을 뒷받침할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여 호족세력을 제거할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개혁을 뒷받침한 사람들

고려시대 대표적인 개혁군주로는 광종과 공민왕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광종시대만 언급한다.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가 고려 전기 국가 안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광종의 개혁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광종의 개혁정치는 분명히 왕권의 강화를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그렇다면, 광종의 개혁정치에는 광종이라는 주체자 이외에 분명히 그 정치를 지지하고 뒷받침했던 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개국공신들인 수많은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까지에는 이 개혁작업을 뒷받침해 주었던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하나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해 온 지식인 층들이며, 또 하나는 참신성을 지닌 신진 관료층. 또 하나는 국초이래 숭상되어 왔던 불교측 인사들로 꼽을 수 있다.


우선 광종 시대 중국은 5대 10국이라는 분열기를 맞고 있었고 이 혼란기를 틈타 많은 지식인층이 고려로 귀화해 오게 되었다. 특히, 광종조에는 후주와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이에 따른 후주 출신의 지식인 계층들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광종에게 과거제라는 획기적인 인재 등용책을 건의했던 쌍기라는 인물은 바로 이러한 지식인 계층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과거제 시행 건의 외에도 광종의 개혁정치과정에 있어서 후주의 개혁과 연계시켜 많은 조언을 함으로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에 큰 힘을 불어 넣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후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광종의 개혁을 위해 대거 등용되자 후일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데 최승로의 비판 또한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광종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로서 또한 광종대의 과거 급제자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다른 호족들과는 달리 유교경전에 기반을 둔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관료들을 뽑는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관계로 진출한 인물들로서 광종의 재위기간에 확장시킨 문한기구와 근시기구에 참여하여 광종의 개혁작업을 뒷받침해 주었으며, 광종 자신도 재위초에 <정관정요>를 탐독했을 정도로 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유학자들은 이러한 광종의 전제주의적 개혁정치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데, 시무 28조를 통해 역대 왕들의 치적을 분석하고 평가했던 최승로도 여기에 해당된다.

 

개혁작업에 참여했던 마지막 계층으로는 불교계가 있다. 이것은 당대의 명승인 균여 대사와 광종과의 협조적 관계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균여대사는 광종의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며, 귀법사의 창건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려는 그의 의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광종이 불교를 깊이 믿게 된 사실에 대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그 죄업을 씻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를 깊이 심취하여 더 적극적으로 개혁작업에 나서겠다는 정치적인 의도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광종 재위 26년의 개혁정치기간동안 그를 뒷받침했던 인물들은 상당히 있었고 대부분 참신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광종의 개혁정치도 비록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던 것이다. 


광종시대 개혁의 의의
훗날 조선의 이야기이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 작업이 세종조의 융성기로 이어지듯이,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의 왕권강화 작업과 개혁은 훗날 5대 경종과 6대 성종조의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완성으로 연결, 마무리 되었다.


고려 시대 전기의 역대 임금 가운데 비교적 긴 26년을 재위한 광종을 두고 훗날 성종조의 정치가요 학자인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즉위한 해에서 8년에 이르기까지는 정사가 맑고 밝았으며, 상벌이 남발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그의 재위 초기가 상당히 훌륭했음을 극찬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불교를 혹신함과 아울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처음과 같이 하지 않았던 들 어찌 재위 26년에 수가 51에 불과 하였겠느냐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은 광종의 치세가 처음에 비해 많이 흐트러졌다는 비판으로서 당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년의 조치들과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 이 무렵의 신하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서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종의 이러한 일년의 개혁 작업들은 앞으로 고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광종의 이러한 노력들이 없었다면 성종조의 유교 정치와 국가 체제 완성 작업은 훨씬 험난한 길을 걷거나 혹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개혁정치가 이미 누차에 걸처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고려 전기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데에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참신한 인물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수 있는 개혁이 전개되었다면, 우리 역사의 흐름은 분명 달라 졌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 여명

 

2. 조선 태종 이방원의 왕권강화에 대한 평가

 

조선조 개혁을 시도하면서 왕권을 강화한 대표적인 군주로 태종을 들 수 있겠다. 그러면 조선 태종은 과연 어떠한 군주였을까? 조선을 개국한 것은 태조 이성계였으나 실질적으로 조선을 탄탄한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은 바로 태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교를 공부하여 고려 시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큰 꿈을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역성혁명이론에 동조하였고 친명파와 친원파간에 벌어진 권력싸움에서 상대의 우두머리였던 정몽주를 주살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요즘 드라마 '정도전'에서 태종 이방원의 활약이 보이고 있으며 그의 왕위 계승까지 지난한 피의 투쟁사가 보여질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상과 언행이 간접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주살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죽음은 세력의 반전을 가져와 정몽주 일파가 모두 제거되었고 공양왕이 폐위되자 정도전 등 조신들과 같이 이성계를 옹립하여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의 조선 개국에 대한 역활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동복 여러 형제들 중에서 가장 영민하였고 개국공신으로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현무문의 난'을 기억하고 왕위 계승을 위해서는 형제도 과감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계자로 자리를 확실히 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이성계의 후계자 자리인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형제라도 과감하게 제거하고 황제자리를 물려받았던 당태종의 일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은 친형인 세자와 동생을 살해하고 대통을 이어받았지만, 이방원은 이복형제인 세자 방석과 정도전 등 일파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성계는 병중이었고 정도전은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거의 실행만 남겨둔 상태였다. 당시 태조 이성계는 왕비 강씨의 집요한 청원과 정도전을 포함한 공신들의 건의만 듣고 후계자를 방석으로 선정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성계와 정도전이 사병을 거느리고 힘을 가지고 있던 방원의 속마음을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기타 왕족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면서 당장 살아있는 이성계의 뜻을 거스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설마하는 마음에 방심하였고 이성계가 살아 있는 한 왕족들의 사병만 혁파되면 왕족들의 힘이 모두 상실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왕자들을 물리치고 태조가 낙점한 방석의 옹립은 물론 정권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서두른 것이었다.

 

그러나 방원은 정도전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고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병중이라 왕자들이 모두 모여 문안을 하는 가운데 방원은 부인 민씨의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빠져나와 바로 사병을 동원하여 먼저 정도전과 그 일파를 모두 참살하였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제거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물론 그 일로 인해 태조의 방원에 대한 진노와 미움이 극에 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힘을 상실한 태조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방원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태조는 왜 어린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였을까? 적자 아들들이 수두록하였지만 모두 물리치고 강씨 소생의 서자인 방석을 선택한 배경에는 강씨와 정도전의 의도가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강씨는 불같은 성격에 욕심이 과하여 자신이 낳은 방번, 방석을 세자로 책봉되기를 원했고 정도전은 이미 장성하여 마음대로 조종이 불가한 적자들보다 어린 방석을 세자로 세워 후계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신권위주의 조선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조선을 개국하기전 그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고 당시 고려 사회의 영웅으로 떠오른 최영과 이성계 중에서 최영은 친원파로 이미 노쇄하였고 우왕의 장인이 된 상태라 그는 최영과 버금가는 영웅이며 친명파로 젊은 이성계를 선택하여 그의 힘을 이용하고자 그를 내세워 고려 조정을 무너뜨리는 데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배 이후 삼각산에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주변 유생들의 시기와 방해로 그곳을 떠나 당시 동북면에 변경을 지키던 이성계를 찿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무서운 역성혁명론을 이야기 듣고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달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명쾌하게 펼치는 그의 역성혁명론을 듣고서는 차츰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요즘 '정도전' 드라마에서도 정도전이 어떻게 이성계에게 접근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상을 설득해 나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중국의 한나라 장량을 자신에게 비유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조 이성계를 선택한 것이라며 호언망언을 일삼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자만스런 정도전의 망말이 방원에게 전달되자 방원은 정도전의 깊은 속셈을 눈치채고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조선 왕조의 왕권이 유명무실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에 때를 놓치지 않고 정도전 일파를 불시에 기습하여 일격에 제거하고 말았던 것이다. 

 

태종은 잔학한 살인마였던가 아니면 왕조를 다진 수성의 군주인가?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은 철저한 피의 숙청과 개혁을 통해 한 왕조를 다진 위대한 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개혁에는 기득권층의 반발이 격심하여 피의 숙청이 동반되지 않으면 쉽게 개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오늘날의 우리 생각과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왕권을 살리기 위해서 일어섰고 합리적이지 못한 잘못된 후계자 선정에 분연히 궐기하였다. 만약 실패하면 그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어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재상중심의 조정과 신하들이 전권을 행사하며 왕권을 농단하는 '신권론'을 주창하던 정도전 일파에 대한 적개심도 불같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처럼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권력에는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는 처절한 비정함이 베어 있는 것이며 권력을 추구하다 줄을 잘못 서거나 때를 놓치거나 힘을 잃는 자는 바로 죽음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태종의 리더쉽 

태종(1367~1422·재위 1401~1418)은 즉위 전부터 조선 왕조를 연 아버지 태조 못잖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새 왕조 개창에 저항한 정몽주(鄭夢周) 등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두 차례 왕자의 난 때는 친형제까지 죽였다. 여기에는 하륜(河崙)의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 조영무(趙英茂)의 빠른 정보 제공, 이숙번(李叔蕃)의 용기 있는 군대 통솔, 그리고 특히 부인 민(閔)씨와 그 동기들의 거사 준비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달랐다. 부인 원경왕후의 남자 형제 넷 모두를 군주에 대한 ‘불충(不忠)’이라는 죄목으로 제거했고, 태종 편에 선 공신 이숙번도 멀리 떨어진 함양 별장으로 내친 후 다시 보지 않았다. “인간을 대접하는 도리가 야박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토사구팽은 어느 새로운 왕조나 당연히 따랐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권력 내부에서는 비정할 만큼 공(公)과 사(私)를 나눴지만, 백성들의 평가는 달랐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사람들이 태종을 친부모처럼 여겼다고 쓰고 있다. 이런 리더십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태종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개혁적 통치 때문이었다. 권력 주변에는 사람이 꼬이게 마련이다. 또 권력을 잡으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 중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들만을 골라내 개혁의 완성으로 이끌고 갔다는 데 태종 리더십의 위대함이 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학을 공부했고, 스무살 전에 과거에 급제 한 뛰어난 학자였다. “고려 말 정치가 혼란스러워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政散民離)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는 게 유학을 공부한 이유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몽주와 길재(吉再)를 고려 충신으로 현양했다. 섬에 유배된 고려 왕족들을 육지에 나와 살게 했다. 태종에 맞섰기 때문에 죄인으로 죽은 남은(南誾)과 이제(李濟)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하여 태조 묘정에 배향했다. 민심의 향배를 꿰뚫어 본 것이다.

태종은 “예전 사람들은 재앙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고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는 유교 경전의 신조를 지켰다.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서 언관들이 책임 소재를 문제삼았을 때도 큰 틀을 지킨 신하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통치권자인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서 대신과 언관 모두를 보호하는 ‘책임정치’를 실천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가뭄이 지금 심하니 죽은 뒤에도 앎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은 비가 오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겨, ‘태종의 비(太宗雨)’라는 말이 퍼졌다. 청렴한 유학자 민제(閔霽)가 사위로 삼을 만한 면모,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없기를 구하는’ 정자(程子)의 지향과 같은 인간이자,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처신한 통치자라는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몽주와 태종이 주고받았다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도 백성들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유학자의 선택이란 측면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군주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사대부의 기상을 드러낸 데 반해, 태종의 ‘하여가’는 사대부의 기상을 꺾으려 했다고 본다. 하지만 태종의 시조를 왕조나 군주에 대한 충절보다 백성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선택으로 볼 순 없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새로운 삶의 욕구를 실현하려는 민초들의 공공영역이 확장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시대에는 고결한 ‘단심가’보다 함께 가는 ‘하여가’가 보다 의미 있지 않을까. 
  
실록은 민씨 형제들이 임금 태종보다는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신 이숙번 역시 교만방자해서 주색을 좋아하고 사치에 탐닉하면서도 민씨 형제처럼 세자 개인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다가 탄핵받았다. 강력한 통치권에 정면 도전(不忠)했다기 보다는 ‘호랑이의 위세를 여우가 (오래도록) 사용’하려 한 교만함, 곧 태종의 유교적 통치 리더십을 망가뜨려 버릴 위험성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를 “임금의 덕을 어지럽혀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렇다고 태종이 군주가 되도록 도운 신하들을 모두 제거한 것은 아니다. 개혁 목표에 동의하고, 사심없이 실천한 공신들은 끌어안았다. 조선왕조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의정부 제도를 정립하고, 화폐(저화)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의 큰 줄기를 잡아간 하륜은 죽을 때까지 태종의 스승으로 대접받았다. 평민 출신 장군인 조영무는 추진력은 부족했지만, 사사로운 정에 기대기보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올곧은 언론 때문에 인정받았다.

유학자 군주인 태종의 솔선수범은 이후의 군주들이 적극적으로 친·인척 또는 공신들의 비합법적 권력 행사를 통제하는데 앞장서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우가 왕 노릇 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사태가 생겨나서, 그 재앙이 통치 리더십은 물론 일반 백성의 생존권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큰 줄기’(大體)를 알고 지켜내는 대신과 올곧은 눈과 귀의 책임을 수행하는 언관은 흔들지 않지만, 사사로이 나서는 영특한 친·인척과 공신은 흔든다.” 태종이래 문민시대를 연 조선 사람들의 역사 경험이 말하는 지혜이다.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이 바라마지 않던 유학에 입각한 문민정치를 이상적으로 실현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태종은 조선 초의 혼란을 잠재우고 강력한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건국 공신이나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공신들, 외척들을 경계했는데 공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처형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처남 네 명을 모두 정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죽였다. 자신의 아내인 원경왕후를 교태전에 유폐시켜 왕비와 외척의 정치적 발언을 원천 봉쇄했다. 또한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처형시켜 외척을 또 한 번 숙청하였다.

 

 태종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해 놓음으로써 왕권 강화시켰는데, 왕실의 정통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왕실의 정통성의 범주를 태종 자신의 혈족으로만 정하고 여기에 적계, 서계의 구분을 엄중히 한 것이다. 적계 왕자는 대군으로, 서계 왕자는 군으로만 봉하였고 또한 종친이나 왕실과 혈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왕실과 외척, 공신들에 대한 정리를 끝내고 난 뒤 1414년 남아있는 공신들 모두를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모두 은퇴를 시켜 왕권에 도전할 만한 신권을 모두 없앴다.

 

 또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후에 세종)을 왕세자로 삼아 1418년 왕위에서 물러났음에도 4년간 국정을 감독하고 인사권과 군권을 감독하는 등 정사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신권의 비대화를 감독했으며,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1422년 승하한다.

 

 

  

 

태종의 왕권강화

태종은 조선을 건국하지는 않았지만, 건국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의 관제와 기본적인 제도를 완비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과 재위 기간 내내 공신들과 외척들에게 유배와 숙청을 끊임없이 행해 잔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나, 왕권과 국가 기반에 해가 되면 왕족과 공신을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조선의 기틀을 잡기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들인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정사를 직접 돌보았는데, 강력한 왕권을 물려주어 조선의 기반을 단단히 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1418년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즉위시키면서 자신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되풀이 될까봐 두려워한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아내 귀양을 보냈다. 이는 혹시라도 양녕이 자신처럼 반란을 일으켜 왕자들 사이에 피를 볼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양녕과 충녕은 사이가 좋아 양녕이 경기도 이천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이 몰래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은 아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스스로 출가를 했으며, 불교를 좋아해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처럼 안정적인 아들의 즉위를 위해 태종은 첫째 아들을 귀양 보내고 둘째 아들은 스스로 출가했는데, 여기에서 태종이 아들에게 강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인물들은 아들이라도 가차없이 내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지원과 혼란스러운 정세를 아들에게 되물려 주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자리’에 걸맞는 인물은 나서지 않고 고사하는 반면 실력이 못되는 인물은 각종 연줄이나 공훈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앞으로 나서다가 나라를 망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태종의 단호하고 원칙있는 친·인척, 공신 척결이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태종의 치적
태종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공신들이 거느린 개인 사병(私兵)을 없애고, 국가의 정규군 체제를 확립했다. 중앙 관료제 개혁도 뒤따랐다. 특히 대신들의 합의 기구인 의정부(議政府) 체제를 정비하여 대신들의 정책결정권을 제도화했다.

비판적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을 독립기구로 만들어서 언관 제도를 강화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신들의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였지만, 군주인 자신에 대한 비판도 수용했다. 관료 제를 감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경제 면에서는 전국적 토지 조사 사업인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의 토지 파악 능력을 극대화했다. 동시에 과전법 체제를 강화하여, 관료들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본인 당대에만 갖도록 하는 등, 관료들의 토지 지배권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토대를 완성했다.

호패법 실시와 호적제도 정비는 국가의 국민 파악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보통 농민인 양인(良人) 확대책을 사용하는 동시에, 양인의 노비화는 강력하게 막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런 태종 연간의 중앙정부체제 확립, 국민에 대한 파악과 지배력 강화, 전국 토지 상황 파악을 통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 등의 개혁 정책은 후계자인 세종의 학문 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조선 문화의 황금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3. 오늘날 '마피아공화국' 한국의 현실과 개혁문제

 

 

마피아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

 

비극스런 세월호 참사가 온 대한민국을 소용돌이 치게 만들고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안타까운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각종 마피아 집단들에 대한 문제점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다. 뇌물고리에 연결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아마 요즘 관련자들은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 모른다. 무능한 정부에 대해서 박대통령에 대한 비난도 그칠줄 모른다. 정치권의 부패고리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초 호족세력이나 고려말 권문세족, 왕권을 위협하던 조선초 태종시대의 신진사대부 세력을 들 수 있다.

 

 모피아(Mofia)는 재무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무부 (MOF, Ministry of Finance : 현 기획재정부)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이다. 재무부 출신의 인사들이 정계, 금융계 등으로 진출해 산하 기관들을 장악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면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였다.MOF와 마피아의 발음이 비슷하여 마피아에 빗대어 부르는 모피아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모피아는 미국의 '회전문 이론'(Revolving Door Theory)’에 적용되는 사례로, 회전문이론은 미국의 군 장성들이 은퇴 후에 국방부 관리로 임명되고 임기가 끝난 후 다시 방위 산업체 등의 간부로 들어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우려하며 생긴 말이다.

 

 

재난구조 과정에서 벌어진 정부의 무능력, 재난구조 집단의 부실대응, 관리 회사와 관련 기관의 얽히고 섥힌 뇌물고리와 탐욕성, 해수.해경마피아들의 무소불위의 로비와 뇌물고리, 비리천국인 연안해양기관들의 부패성, 소유주의 위선적이고 철저한 재산은닉, 종교집단 기업가 교주의 부도덕성과 탐욕이 불러온 자본주의 말기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적라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유주는 종교적 소왕국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고 유령기업을 설립하여 상호보증으로 은행대출을 받고 헌금과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 숨겨놓은 상태다. 정치권을 포함하여 정부기관, 기업, 종교집단, 교육계 등의 비도덕성, 비윤리성에 전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요즘 `해피아'란 말이 매스컴을 도배하고 있는바,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지면서 해양수산부 관료 출신과 마피아를 빗대어 생겨난 합성어다. 해수부 퇴직관료들이 해운조합, 선박안전기술공단 등 산하단체 요직에 앉아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패에 연루돼 사회적 지탄을 받으면서 만들어졌다.

이 같은 관료 중심의 낙하산 인사 폐해를 가리키는 신조어가 부쩍 많아졌다. 지난해 한국수력원자력 입찰비리로 특정 대학 원자력학과 출신 간부들이 많이 구속되자 `원전마피아'란 말이 등장했다. `산피아(산업통상자원부 출신 조직)' `금피아(금융감독원 등 금융계 공직자 출신 조직)' 등의 말도 같은 식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이런 신조어는 옛 재무부(MOF) 관료 출신들이 줄줄이 금융권 및 각종 산하단체 요직에 낙하산 인사로 내려앉아 온갖 이권과 비리에 연루되자 이들을 비꼬아 `모피아'란 조어가 생겨나면서 파생됐다.

마피아는 원래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근거로 하는 대형 범죄조직에서 나온 말이다.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 감베타가 쓴 보고서 `마피아 연구'에 따르면 마피아 조직은 공적 신뢰가 낮고, 사적 신뢰가 높아 친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연줄사회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마피아 조직의 연줄사회 문화는 시장 선점을 위해 제품 경쟁력에 투자하지 않고, 사적신뢰 즉 연줄 투자에 몰두하게 된다. 주한 다국적 기업의 한 대표는 `한국 사람들은 연줄모임에 살고 연줄모임에 죽는 것 같다'며 연줄 없이 사업에 성공하거나 출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비꼰다.

연줄 투자로 형성된 패거리 문화는 주로 지연 혈연 학연 관연(官緣)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세월호 침몰 수사에서 드러나듯이 관연 주도 낙하산 인사 폐해가 국가적 재난 유발 문제의 핵으로 떠올랐다.  해피아 산피아 금피아 등과 같이 관료 출신들이 기관장과 요직을 주고 받으며 이권에 개입하고 부정부패를 일삼게 되는 사회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소위 `관피아' 사회로 고착화된 것이다. 한국형 패거리 문화의 특징은 경조사와 접대에 많은 투자로 사적신뢰를 부풀리는 행태를 이룬다.

연간 경조사 비는 10조원에 이르고 기업 접대비는 6조6,000억원에 달한다. 이 두가지 지출 비용에 뇌물성 상납금이 포함되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예로 해운조합의 안전교육비는 50만원인데 접대비는 수천만원이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애경사 문화는 향약·두레 등을 통해서 보듯이 서로 어려운 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품앗이 문화였다. 그토록 좋은 문화가 압축성장의 산업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사적신뢰를 쌓는 뇌물성 불건전 문화로 변질됐다. 지구촌 어느 나라를 봐도 이런 연줄 투자에 매몰된 과다경조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루가 멀다하고 곳곳에서 터지는 부정부패와 국가적 재난을 어떻게 하면 고칠까에 대한 대답은 이제 자명해졌다. 지연·학연·혈연, 그리고 직장 연고로 전염된 부패 유발 패거리 카르텔을 척결하는 것이다. 끗발을 내세워 뒤를 봐주고 끼리끼리 검은 돈을 챙기는 패거리 연줄문화가 여기저기 독버섯처럼 솟아 있는 한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든다 해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얼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까마득히 잊어버리기 전에 이번에는 단단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 종교집단의 부패성도 이참에 포함하여 척결해야 한다. 하느님, 예수, 천국을 빙자하여 소왕국을 건설하여 신도들의 헌금을 은근히 강요하여 치부를 일삼고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며 탐욕에 빠진 사이비 교주들을 척결해야 한다. 부패연줄의 시작과 끝에는 다름 아닌 권력과 금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과연 개혁은 가능한 것인가?

 

위에서 고려 광종의 개혁과 조선 태종의 개혁을 살펴보았지만 봉건시대 개혁에는 반드시 피가 수반되었다. 그러면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혁은 진정 가능한 것인가?

 

오늘날 마피아 관료개혁을 개혁시키는 일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단호하게 척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개혁을 위한 인재층을 양성하고 새로운 신진세력을 등장시켜야 가능하다. 고려 공밍왕은 신돈이라는 인물을 기용하여 권문세가를 척결하는데 앞장세웠다. 그는 기존 권력층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인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었다. 개혁은 반드시 기존 권력층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어 있고 퇴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정권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여러 정권이 한국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관료 개혁은 실패하였다.  그것은 100만 공무원과 적이 되는 것이며 말 그대로 적폐(積弊), 40년 넘게 쌓여온 관료와 이익집단의 카르텔을 깨는 어려운 일이다. 그들 카르텔의 뿌리는 깊고 넓고 단단하며 원조인 모피아(재무부+금융)부터 국피아(국토교통부+건설업), 교피아(교육부+학계), 산피아(산업통산자원부+산업계) 해피아(해양수산부,해경+해운업계)까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나라 전체와 싸워야 한다. 대규모 권력형 비리가 터질 때마다 등장하는 그들은 5년 단임 정권이 해내긴 벅찬 과제다. 선거 상품으로 치면 인기도 실현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럼 개혁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국민적 지지와 요구가 따르면 할 수 있다. 과거에도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시도하거나 개혁 대상을 잘 못 선정하거나 개혁세력에게 개혁의 칼자루를 쥐어주는 우를 범하였다. 또 적절한 호기를 놓치게 되면 되려 악재로 작용하여 정권을 내놓고 물러나야 한다. 국민들의 공분이 최고조인 지금 우선적으로 관료사회의 마피아 척결에 단호하고 지혜로운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이 개혁을 박대통령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무리다. 개혁 대상이 아닌 새로운 신진세력이나 누군가 앞장세워 제대로 추진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만약 개혁이 실패한다면  박대통령 스스로 개혁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차기 대선에서 야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위기가 기회이듯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하면 이번 6.4 지방선거는 물론 차기 대선에서도 현 여당의 패배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재벌과 관료가 환란 주범으로 지목됐고, 나라 안팎에서 개혁 요구가 거셌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는 관료 대신 재벌 개혁을 택했다. 개혁의 칼자루를 되레 개혁 대상인 관료에게 쥐여줬다. 개혁은 개혁의 대상이나 출신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어서는 용두사미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번 마피아 척결 개혁은 개혁대상과 전혀 무관한 제3세력이나 시민단체에게 맡겨야 한다. 공민왕 시대 신돈처럼 개혁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외의 인물을 등용하여 시도할 수도 있다.

 

세상이 달라졌지만 공무원만 모른다. 그걸 깨닫게 해줘야 바뀐다. 공무원연금도 마찬가지고 낙하산 인사도 마찬가지다. 공무원 연금은 50여 년 전 만들어질 땐 연 10~20%의 고금리 시절이었다. 연금 다 받아도 지금 돈 1억원 가치밖에 안 됐다. 부러움의 대상이 못됐다. 은행 금리가 사상 최저로 떨어진 지금은 어떤가. 10억원 가치가 있다. 질시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연금 개혁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게 아니라 공무원들의 반발로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관기관·협회로의 낙하산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까지는 큰 문제가 안 되었는데,  퇴직 공무원은 적고 자리는 넘쳤기 때문이다. 국민의 눈초리도 그리 따갑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령화와 저성장의 충격이 온 나라를 덮쳤고 사오정·삼팔선으로 내몰린 국민들의 눈에 관피아의 3·3·3(퇴직 후 산하기관장 3년, 유관기관장 3년, 유관협회장 3년씩 낙하산을 타는 것)은 질시를 넘어 증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무조건 죄고 때리는 건 상책이 아니다. 퇴로는 열어주고 때려야 한다. 관가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50대 초반이면 후배들에 떠밀려 ‘용퇴’해야 한다. “1급은 1년만”이 관행처럼 된 지 오래다. 정권 말이면 국장들이 승진 안 하려고 버티기도 한다. 떠미는 후배와 떠밀린 선배가 합심해서 뭘 찾아냈겠나. 그게 바로 유관기관·협회 낙하산이다. 이런 구조를 깨야 한다. 낙하산은 전면 금지하되, 후배 밑에서도 일할 수 있게 시스템을 바꾸고 임금피크제를 들여와 고령화의 충격을 덜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개혁이 된다.

 

그러면 국민인 우리들은 개혁의 대상이 아닌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무능한 지도자를 뽑았고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며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세금을 포탈하고 법과 규정을 어기고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신과 가족, 무리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가? 뇌물과 비리에 연연하였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승진과 대가성을 기대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은 국가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국가가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는가? 나 스스로도 낙하산 인사에 기대를 하였고 마피아에 소속되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강자편에 빌붙어 약자를 억압하며 기업주의 탐욕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사이비 종교 교주의 감언이설에 빠져 재산을 헌납하고 노예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는가?  나 스스로 민주시민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는 아까운 꽃다운 젊은이를 포함하여 맹골수도에 가라앉았지만 그 처절한 분노와 슬픔의 부력은 다른 많은 것을 물 위로 띄워 올렸다. 그중 하나가 관료 개혁이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꽃 같은 목숨 300명과 바꾼 기회마저 놓쳐서야 이 나라에 미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