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8 : 4.19혁명의 역사적 평가와 의의

 

 

강남의 봄 8 : 4.19혁명의 역사적 평가와 의의

 

하늘을 누가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체, 초판 1979년, 개정판 1989년에 내놓은 같은 이름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참여 저항시, 4.19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피를 흘렸던 시인 신동엽은 4.19 때는 잠깐 맑은 하늘이 빛났다고 읊었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전체, 4.19를 떠오르게 하는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된 신동엽의 대표적인 시)’


한편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에 의하면 4.19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기붕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이고 여당은 이기붕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지만 끝내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는데 무리수를 두다가 사탄이 났다는 주장이다.

 

 

                                                                                             4.19 묘역

 

 

북한산 둘레길 제2구간 보광사를 지나면 4.19 묘역이 나타난다. 젊은이들은 4.19 혁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것이다. 4.19 혁명은 우리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일대 대혁명이었으나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으로 부정선거를 저지르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자 무차별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마산앞 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최류탄을 맞고 죽은 시신이 발견되자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혁명의 결과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이승만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도주하였고, 이어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혁명 주체세력인 학생들과 정치인들 간에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다. 그러자 정치와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고 북한의 대남 침략 움직임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일부 혁명주체 세력은 대북 협상을 주장하는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전혀 점 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에 의한 5.16 군사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혁명 주체세력들이 저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둘레길 곳곳에는 이준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여러 묘지가 산재해 있다. 그들이 흘린 피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지금 배부른 행복감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 사회적 비리와 부패,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를 둘레길을 걸으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미완의 혁명 4.19

 

4·19 혁명(四一九革命)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시위는 시위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3월 18일경에 실종되었다가 시신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은 경무대에 몰려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사퇴 후 동반 자살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4.19 묘역

 

제2공화국 출범

5월 민,참의원 총선거 후보 등록이 있었고, 이때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인 낙선운동과 선거방해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고관이자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장택상, 이범석 등은 학생들의 후보자 사퇴 요구를 묵살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했다. 7월 11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키고, 이 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6월 12일 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국무총리로 내각수반이었던 허정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을 선출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이자 한민당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민주당 신파가 집단 반발,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반대하여 낙마했다.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얼마 못 가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하여 막을 내리게 되고 1979년까지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평가

 

 

공주 노인회에서 세운 4·19 혁명 기념비

 

혁명의 의의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혁명의 의의를 7가지로 제시했다.

  1. 민주주의는 가열찬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2.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3. 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4.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5. 혁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6. 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7.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 반분열통일, 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 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시원, 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 목표로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 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 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있다.

 

 

 

 

 

부정적 평가

역사학자 겸 언론인 한홍구에 의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분출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유당 지지세력과 일부 우익세력 등 일각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태'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허정 등은 '4.19 사태'라고 평가하였다.

 

허정은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허정은 또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4.19 사태는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4.19 의거는 혁명이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고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

한편 보수주의 논객 지만원 등은 4.19 당시 이석, 김용규 등 간첩이 침투하여 소요사태를 조장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4.19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기붕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에 의하면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그에 의하면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이고 여당은 이기붕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든지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다. 나쁜 꾀를 내고 무리수를 두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

 

어떤 사건에 대한 용어를 살피는데 있어 가장 먼저 알아볼 문제는 당대에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불렀는가 하는 것이다. 4월혁명 당시에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는데, 당시부터 '혁명'이란 용어를 광범하게 사용했다. '4월 혁명', '4월 의거', '3·4월 민중항쟁', 민중 봉기', '학생 혁명', '민족 혁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는데, 주로 '4월 혁명'이란 용어를 썼고 모든 정부 공식 문서에도 그렇게 표기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4월혁명에 대해 얼마나 절절한 심정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붙였는지 김수영의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서비스 차원에서;;;; 김수영의 시 한 편 인용해본다. 안구정화 한 번 해보자. 아래 시는 4월혁명 직후 발표한 <푸른 하늘을>이다.

 

 

4.19 의거’ 의 역사적 의의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이 48주년을 맞았다.


4.19혁명은 한동안 ‘혁명’ 또는 ‘의거’로 지칭되었으나 5.16. 이후에는 ‘의거’로 공식화 되어갔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는 4.19혁명에 대한 개념이 ‘4.19의거’에서 ‘4.19’로 바뀌었다. 4.19혁명에 대한 역사적 가치판단이 정립되지 못하였다.

물론 4.19혁명을 연구하는 전공학자들은 ‘4.19’ ,‘4.19혁명’ 등으로 혼용해서 써왔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은 ‘4.19’ 혹은‘4.19의거’ 였다. 이는 4.19혁명 이후 30여년간 이 땅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우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랫동안 ‘의거’ 나 ‘4.19’로 불리우던 4.19혁명에 대한 평가가 199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 되어 ‘4.19혁명’ 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그동안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1997년 4월 19일에는 최신기법의 전시실 기능을 갖춘 4.19혁명 기념관을 개관함에 따라,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교육장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최고 성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4.19혁명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성격과 그 의의를 규명하여, 자유민주주의가 이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여야겠다.

4월혁명을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학술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각 이념·정치노선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4월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다. 당시 민주당 장면 정권의 시각이기도 했다. 그들은 4월혁명이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여 온전한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의 투쟁이라고 평가하고, 거리낌없이 '혁명'이라고 불렀다. 당시 진보세력과 같이 '혁명'이라고 불렀으되,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두번째는 진보적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시각이었다. 당시의 진보세력들은 분단시대에서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고, 민주화가 진전되고 있던 혁명의 공간에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평화통일 논의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흔히 '민족주의의 고양'이라고 평하는 시기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는 쿠데타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4월혁명을 통해 열어제낀 민주주의를 민족통일로 마무리짓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미완의 혁명'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세번째는 80년대 중반 변혁이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시각으로, 4월 혁명을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족해방의 실현을 위한 미완의 민중혁명이었으며 민중 자신이 아닌 학생에 의한 대리혁명'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4월혁명의 계기가 경제위기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승만정권 시기의 경제위기는 종속적 자본주의가 파탄나면서 비롯된 위기였으며, 이에 대해 자본가세력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위한 변혁을, 민중은 제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변혁의 길을 찾기 위해 혁명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대 민족경제, 세력으로는 자본가·군부 대 학생·민중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박정희정권이 수립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신식국독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견해이다.

네번째는 60년대 이후 꾸준히 계속된 민족민주운동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4월혁명을 민주화운동와 민족통일운동의 서막을 연 '항쟁'으로 보는 시각이다. 마치 광주항쟁, 87년 6월 민주항쟁이라 정의하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이 시각은 두번째 시각과도 유사한 것으로서, 당시에도 이러한 시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1961년 4월 19일 혁명 1주년을 맞아 진보적 청년 단체였던 민주민족청년동맹에서 발표한 성명서가 이러한 시각을 대변하는데, 그 내용을 인용해본다.

집권자 및 그 주변세력들과 어용학자 및 몰지각한 일부 학생 단체들은 '4.19혁명', 또는 '4월 혁명' 운운으로써 동포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혁명이란 경제·사회·정치의 사회 전반적인 변혁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변혁된 것이 무엇이며 발전된 것이 무엇인가? (중략) 3·4월 항쟁에서 뿌려진 붉은 피는 수많은 선열의 민족 항쟁의 피를 이어받고 2.8투쟁과 광주 학생 투쟁의 그 투혼을 이어받은 '3·4월 민족 항쟁'이었다. 이 민족항쟁은 3·4월로 그친 것이 아니요, 그 후에도 항진하고 있었으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이 쟁취되어 민족혁명이 완수되는 그날까지 줄기찬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최근의 학계에서는 여러 논의들이 대체로 세번째와 네번째의 시각으로 수렴되어 양립하고 있다고 한다. 엄밀한 학술적 정의로써 따지자면 '혁명'이란 용어가 적합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한국사회의 특성상 4월혁명이 갖는 지향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견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런 이유로 논쟁은 현재까지도 정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4월혁명에 대한 성격문제는 시대상황에 따라 계속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결론을 대신하며, 4월혁명에 대해 우리는 '의거'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될까?

4월혁명이 '의거'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를 '5.16군사혁명'으로 미화하면서 당시 널리 사용되던 '4월 혁명'을 '의거'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한동안 4월혁명이 '혁명'이냐 '의거'냐를 두고 논쟁이 있었지만, 군사정권이 몰락한 현재 이런 논쟁은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앞서 소개했듯이, 한국의 보수세력은 4월혁명을 기꺼이 '혁명'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의거'로 격하되었던 4월혁명은 김영삼 정부 때 다시 '혁명'으로 격상되었다.

4월혁명을 '의거'로 부르자는 일부 블로거들은 그럼 보수도 아니고 뭘까? 학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의 인식을 뒤엎어보려는 발상은 창의적이긴 하나 별로 쓸데있는 것 같진 않다. '혁명'이나 '항쟁'이냐를 가지고 논쟁해보자면 충분히 해 볼 의향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