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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59 : 일제강점기 4 ('조선 근대화' 보도는 일제의 왜곡)

 

 

 

한국의 역사 959 : 일제강점기 4 ('조선 근대화' 보도는 일제의 왜곡)

 

                            

                                                          일제식민지 통감부 건물(철거전 모습)

 

 

 

 

 

‘조선 근대화’ 보도는 일제의 왜곡

 
1910년 일러스트레이티드 러던뉴스 '제국적 논리' 일방 전달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이 이번에 「Weekly경향」을 통해 공개한 자료 중에는 조선병합을 선전하는 영국의 한 주간지 화보기사도 있다. 이 기사는 ‘일본이 합병한 부유한 땅: 조선의 자원, 식민지에 새로운 주인이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 아래 부존자원을 표시한 한반도 지도를 가운데 뒀다. 양쪽에는 ‘구 조선(old korea)’과 ‘일본에 의해 병합된 신 조선(New Korea)’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형식이다.(그림1) 기사를 게재한 잡지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3일자다. 한일병합 또는 경술국치가 이뤄진 것이 이 해 8월 29일이니 늑약(勒約) 5일 후 발행된 기사다.

 

 


<그림1>일본의 조선 병합을 알리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3일자 기사. 한일병합 5일 만에 일본 측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반영한 기사다.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제공

 


병합 5일 뒤 일본측 입장 일방 전달
우선 궁금한 점. 왜 일본의 잡지가 아닌 영국의 잡지가 일방적으로 일본 측 입장을 반영한 기사를 실었을까. 병합을 기준으로 신구를 나누는 잡지의 시각은 정당할까. 일단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국제적으로 꽤 유명한 잡지다. 인터넷 백과서전 위키피디아에 게재된 정보에 따르면 이 잡지는 세계 최초의 화보잡지다. 1842년에 창간되어 197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전에도 국내 학계에서 이 잡지에 실린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04년 중앙일보는 러일전쟁 당시 이 잡지에 실린 조선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 1904년 1월 기사다. 이번에 나온 이 잡지의 1910년 보도기사는 최초공개다. 이 기사가 일본의 합병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은 기사의 부제에서도 드러난다. “…세계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수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은 상태였는데, 당시 동아시아정책의 경우 서로 이해가 일치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제국주의 국가로서 영국이 조선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기사가 일방적으로 일본 측 시각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이 소장이 제공한 또 하나의 자료(그림2)에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신문 사이에 끼워 배포한 전단으로 추정되는 이 이미지는 한·일 양국의 대신이 한반도 지도를 두고 ‘조약’을 맺는 그림을 가운데 두고 철도 부설, 경작, 군대 양성, 교육 등이 이뤄지는 삽화가 배경에 깔려 있다. 자료를 공개한 이 소장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이 무진장한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단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제작된 연대는 메이지 40년이라는 문구로 미뤄볼 때 사법 및 내치권 관련 정미 7조약이 체결된 1907년께로 보인다. 1907년 일본에서 배포된 전단과 1910년 영국 화보잡지에 실린 기사에 담긴 내용이 거의 유사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한편 위의 기사에 게재된 지도에는 한반도에서 어떤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 세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주 항목은 담배, 인삼, 소금, 석탄, 구리, 철, 목재 등이다. 실제 당시 조선에 이런 자원이 풍부했던 것은 맞을까.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한말에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이권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이런 자원에 주목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날조한 자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당시 한국이 정말 탐나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다면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이 병탄하는 것을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7년 일본 전단과 같은 논리 담고 있어

김 교수에 따르면 석탄이나 철광석, 금과 같은 주목할 만한 자원은 현재 남쪽보다는 북쪽 지역에 더 많았다. 오히려 병탄 이후에 일본이 체계적 조사를 하면서 자원을 수탈할 여력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만주나 이북지역에 연관되는 산업시설을 건설했다. 반면 남쪽은 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식량기지, 즉 산미증산계획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림2>1907년 일본에서 배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일병합 선전 내용을 담고 있는 전단. 일본인들에게 한국을 무진장한 기회의 땅으로 선전하고 있다. |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제공


 

잡지의 기사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기사는 조선반도의 지도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낡은 조선’의 풍경을, 오른쪽에는 한일병합 이후의 새로운 조선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사진 설명은 이런 식이다. “구 조선은 죄수들을 원시적인 ‘새장’ 같은 감옥에 가뒀다. 이제 서울에서 이런 감옥은 사용되지 않는다.” “구 조선에서 열렸던 공개재판. 일본은 이런 형태의 재판을 없앴다.” “촌락의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일제가 도입한 근대 재판 제도와 ‘보통교육’을 고을 수령 주재의 전통적인 재판과 서당교육에 대비시켜 놓았다.

 

이기훈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영국이 인도를 문명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할 것이라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했다. 문명과 야만, 진보와 후퇴 또는 안정과 혼돈, 발전과 정체 식의 이분법적인 담론으로 과거와 현재를 구획하는 이분법적 역사인식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이 기사뿐 아니라 1910년대에 문화담론이나 정책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시켰다’는 관점을 투영해 만들어진 것이다. 단적인 예가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다. 공진회가 열리면서 일제는 ‘구정(舊政)’의 상징인 경복궁의 건물들을 한꺼번에 헐었다.


 

문명과 비문명 이분법 설득력 있나
실제 일본이 한국의 사법이나 교육제도를 근대화시킨 것은 맞을까.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실의 도시환 연구위원(법학 박사)은 “조선에 근대적 재판제도가 도입된 시점은 갑오경장(1894) 개혁안에 입각해 1895년 3월 25일 ‘재판소 구성법’이 제정되면서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등장한 일제의 통감부가 1907년 재판소 구성법을 새로 제정해 1심을 구 재판소와 지방 재판소가 맡고, 2심과 3심을 공소원과 대심원에서 맡게 한 후 다시 1909년 한국의 사법권과 감옥사무처리권을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기유각서를 체결한 후 3심격인 대심원의 이름을 고등법원으로 변경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최고재판소의 격을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보다 하위에 두었다”고 말했다.

근대교육 역시 사정은 엇비슷하다. 조선에서 근대교육의 시작은 1883년 원산 상인이 세운 원산학사로 본다. 역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되었고, 1905년까지 각급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교육이 민족운동적 성격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1907년 학부관제를 개정·공포하고 학무국에 사립학교의 담당부서를 신설한 뒤,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공포해 조선교육을 통제하는 체제를 갖췄다. 도 위원은 “결국 일본이 도입했다고 주장하는 근대 사법·교육 시스템은 한국 스스로 개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발생한 해당 제도를 억누르고, 강제병합을 통한 일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제도의 정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일제 시기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근대적 교육시스템이 정비되고 대중교육이 확산된 것은 사실이 아닐까. 이기훈 교수는 “역사적 평가에서는 계량화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최근 1920~30년대 보통학교로 대표되는 일제의 교육시스템이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에서 내놓은 공식통계만 보면 조선에서 1910년대 보통학교 즉 초등교육기관의 숫자는 몇 개 없다가 1920년대와 3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며 “하지만 이 통계숫자에는 실제 지역사회 공동체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지만 보통학교로 인가받지 못한 일체의 학교 숫자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계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