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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36 : 조선의 역사 278 (제16대 인조 5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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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36 : 조선의 역사 278 (제16대 인조 53)

두바퀴인생 2012. 10. 12. 03:48

 

 

 

 

한국의 역사 736 : 조선의 역사 278 (제16대 인조 53)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청나라(후금)의 건국 과정과 정묘, 병자호란 34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海戰 경험 적은 淸軍 얕보다 허찔려 철옹성 와르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 강화부도(江華府圖). 강화도와 김포 통진 교동 일대와 한강과 임진강 하구를 그린 지도이다. 갑곶, 광성진, 월곶 등이 표시되어 있다. 출전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 갑곶 돈대의 모습.

 

▲ 갑곶나루의 모습.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상길 영정.

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 ‘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孝宗))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 ‘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술 취한 장수는 도망가고… 죄 없는 백성은 어육 되고…'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빠른 배들이었다. 청군은 그 배들을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한강이 얼어 있던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또 믿었다. ‘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갑곶 방어선이 무너지다

 

▲ 이상길의 신도비.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 등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출발지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청군이 도해(渡海)를 시도하던 날 갑곶에 배치된 방어 전력(戰力)은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해안 방어의 주력은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 휘하의 수군이었는데, 광성진(廣城鎭)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강화성 방어를 맡은 초관(哨官)들 대부분도 장신의 선단에 소속된 배에 타고 있는 상태였다.

 

1637년 1월21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경징은 장신에게 휘하의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신은 급히 선단을 움직였지만 마침 조금(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스무사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금 때문에 전진이 여의치 않았던 장신의 선단은 이튿날 새벽까지도 갑곶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군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분전했다.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자신의 배 또한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의 수군이 도착했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등을 시켜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덩치가 훨씬 큰 조선 전함이 들이받자 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청군 병선들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선단을 향해 몰려들자 장신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정연 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광성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않고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강진흔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장신은 끝내 외면했다. ‘인조실록’과 ‘병자록’ 등에는 격앙된 강진흔이 장신을 질타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장신,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지만 장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 등은 전진하여 강진흔을 구원하려 했으나 장신의 위세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갑곶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다

갑곶에서 강진흔의 수군이 무너지자 청군이 상륙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섣불리 건너오지 않았다. 척후병이 먼저 상륙하여 주위를 둘러본 뒤,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획책했다. 청군 대병력과 해안에서 직접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호조좌랑 임선백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 ‘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대장이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봉림대군도 김경징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 이상길을 모신 충렬사.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의 산 등지로 물러나 버렸다.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진해루(鎭海樓) 아래를 비롯한 험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곶 건너편에 있던 청군의 대병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병자록’ 등에서는 ‘청군이 마치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 달려들었다.’고 적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이미 청군에게 도해를 허용하여 사기가 저하된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황선신과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 초관 정재신(鄭再新)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이미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도주했다. 격분한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상길 영정.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등의 휘하에서 강변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바다나 산으로 달아났다.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청군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갑곶 나루를 돌파한 청군은 사시(巳時·오전 9∼11시) 무렵 강화성으로 밀려들었다. 청군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성안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군을 배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선군은 조총과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집중 포격을 앞세워 몰려드는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강화성보다 몇 배나 견고한 대릉하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김경징 등 최고 지휘부의 오판과 태만,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강화성의 북문(北門)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청군은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지는 자결, 그리고 죽음들

불과 한나절여 만에 강화성은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또 ‘오랑캐’가 몰려오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남문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 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다. 그의 장렬한 죽음과 함께 문루도 사라져 버렸다. 김상용 말고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 도정(都正) 심현(沈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이 자결했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순절한 것이다.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비감했다. “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이 한마디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삶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다.‘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삼가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팽개쳤던 관인들 때문에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생령들의 희생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인(成仁)을 도모했던 관인들의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 가리어져 있었다.

 

 

 

 

강화도의 비극

 

 

강화도가 함락될 때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 조선군의 최고위 지도부는 바다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그들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연쇄적인 비극을 불렀다.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강화성에 있던 피란민들은 모두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청군은 성을 점령한 직후 군사들을 시켜 성호(城壕)를 헐어 버리고 행궁(行宮) 관사를 불태운 뒤, 성안에 있던 남녀노소들을 끌어냈다. 강화도의 이곳저곳에서 처참한 장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도망간 김경징, 삼대 여인들 모두 자결

비극의 손길은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로 뻗쳐 왔다. 청군이 몰려오자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가, 혹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때로는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성구(李聖求)와 이지항(李之恒)의 처는 청군의 손에 죽었다. 권순장(權順長)과 그 집안 여자들의 죽음은 특히 참혹했다. 권순장은 김상용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권순장의 아내는 자신의 목을 매기 전 세 딸을 먼저 목매어 죽게 했다. 권순장의 누이동생 또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민성(閔 )은 먼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 삼랑성이라 불린다.

 

▲ 강화도의 연미정(燕尾亭). 이 부근에서 병자호란 당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 강화유수부 동헌 모습.

 

▲ 교동(喬桐) 읍성의 모습.
문화재청 홈페이지

 

비극은 김경징 집안의 여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경징의 모친(김류의 처), 아내(김류의 며느리), 며느리(김류의 손자며느리) 등 삼대의 여인들이 모두 자결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협박하여 자결하도록 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김진표의 처가 자결하자 김경징의 어머니와 처도 따라서 자결했다는 것이다.

 

청군에게 포로가 된 사람도 줄을 이었다. 청군은 젊고 고운 여인들을 사로잡느라 혈안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희생자가 속출했다.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집에서는 열두 명,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俊謙)의 가족은 열한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명욱(韓明勖), 정백창(鄭百昌), 여이징(呂爾徵), 신익융(申翊隆), 정선흥(鄭善興), 김반(金槃), 이경엄(李景嚴), 한여직(韓汝稷) 등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일반 상민들의 피해도 참혹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경기도 연안의 백성들 또한 다투어 강화도 주변의 섬으로 밀려들었다.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섬으로 들어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과 달리 청군이 상륙하고 강화성으로 몰려오자 그들은 앞다투어 마니산(摩尼山) 등지로 도주했다. 청군은 연일 병력을 풀어 마니산 일대를 수색했고, 백성들은 그 와중에 피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세손의 비극

청군에 의한 살육과 자살이 속출하는 와중에 왕세손이 강화성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왕세손은 바로 인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의 아들이었다.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어 장차 보위(寶位)에 오를 인물이기에 청군이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된 존재이기도 했다.

 

청군이 강화성으로 밀려들 때, 강빈은 상민(常民)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여염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 강문성(姜文星)과 김인(金仁), 서후행(徐後行) 등 다섯 명의 내관(內官)에게 원손을 맡겼다. 그들은 원손을 업고 바닷가로 내달렸다. 청군은 추격해 오는데 내관 김인이 탄 말은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송국택(宋國澤)이 제공한 말로 바꿔 타고서야 겨우 해안에 이를 수 있었다. 마침 해안에는 배를 대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원손은 우여곡절 끝에 교동(喬桐)을 거쳐 다른 섬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젖먹이 시절부터 이렇게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던 원손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강화성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항복 이후 볼모가 되어 끌려갔던 아버지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원손은 1645년 귀국했지만 아버지 소현세자는 급사했고,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자신 또한 왕세자 자리에 올라보지도 못한 채 숙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에게 밀리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원손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이다.

 

강화도 공략을 지휘했던 구왕 도르곤(多爾袞)은 강화성 점령 직후 역관 정명수(鄭命壽)와 김돌시(金乭屎) 등을 시켜 항복을 요구했다. 조선 측에서 원임대신 윤방(尹昉)을 보내 요구를 받아들이자, 도르곤은 휘하의 병력을 들여보내 정전(正殿)을 점거한 뒤 성안에 계엄을 실시했다. 그들은 조선 포로 가운데 지체가 가장 높은 세자빈을 엄중히 감시하는 한편, 호서(胡書)가 쓰여진 신표(信標) 수십 개를 만들어 성을 드나드는 조선 사람들을 통제했다. 신표가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그것을 구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도르곤은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왕실과 고관들의 가족을 앞세워 남한산성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점령 직후, 포로들에게 대한 대우는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강빈 일행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강빈 일행을 이동시킬 때 병력을 풀어 호위하는가 하면, 지나는 길에 도랑이나 험한 곳이 있으면 길을 수리한 뒤 지나가도록 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청군 가운데 만주병들은 군율이 잡혀 있어서 탐욕과 음란함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몽골병이나 한병들은 달랐다. 특히 공유덕과 경중명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겁략이 심각했다. 그들은 몽골병과 함께 곳곳을 뒤져 여자들을 잡아가고, 주단과 패물을 약탈했다.

 

강화도를 점령 한 지 9일이 되던 날의 정경은 처참했다. 청군은 포로들을 남한산성으로 몰고 가면서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했다.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거나 ‘눈 위를 기어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율 시행의 난맥상

그렇다면 강화도의 ‘참극’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김경징 등은 어찌 되었을까? 항복 직후, 김경징 등에게 군율을 적용하여 극형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 오히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적었으며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손사래를 쳤다. 인조는 김경징 등을 서쪽 변방에 유배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했다. 언관들의 반발과 비판이 그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사형을 내렸다. 김경징에게는 끝까지 예우를 갖춰 사사(賜死)시켰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도 참수되었다. ‘잘 싸우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김경징이나 장신과 달리 끝까지 청군과 싸우려 했던 그였다. 그를 죽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청도 수영(水營)의 군관과 병졸들이 대궐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목놓아 울면서 강진흔의 원통한 정상을 비변사에 호소했다.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강진흔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함께 의금부에 갇혀 있던 김경징이 사형 결정 소식을 듣고 목놓아 울었는데 비해, 그는 태연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옥졸에게 주며 ‘이것은 예리한 칼이다. 이것으로 내 목을 빨리 벤 뒤 네가 가지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그는 처형을 앞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경징의 죽음을 기록한 ‘인조실록´사신(史臣)의 평가는 냉혹했다. 사신은 김경징을 가리켜 한낱 ‘광동(狂童)’이라고 평가했다.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식을 김류가 잘못 천거하여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강진흔이 김경징보다 심한 극형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강진흔과 김경징의 죽음. 그것은 분명 군율 시행의 난맥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