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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35 : 조선의 역사 277 (제16대 인조 52)

두바퀴인생 2012. 10. 11. 03:46

 

 

한국의 역사 735 : 조선의 역사 277 (제16대 인조 52)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청나라(후금)의 건국 과정과 정묘, 병자호란 33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항복형식을 왈가왈부 하는 동안 후금군 홍이포탄은 성안으로 떨어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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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강(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중앙에 경성(京城)과 북한산성, 오른편에 남한산성, 왼편에는 강화도가 그려져 있다. 서울 주변의 군사·방어시설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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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부근을 간략하게 묘사한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 산성의 4대문과 옹성, 서장대(西將臺)가 표시돼 있다. 남문에서 삼전야(三田野)를 거쳐 송파진(松波津)에 이르는 길 중간에 있는 비석은 청태종 송덕비다.
출처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東國輿圖)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 남한산성 남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은 이 남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인조의 절박함과 홍타이지의 절박함

 

'인조, 반정 통해 얻은 지존 위신 잃을까 出城 회피'

 

항복을 하더라도 산성에서 나가는 것만큼은 끝까지 피하고자 했던 인조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월20일 조선은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칭신(稱臣)했다. 찢고 다시 쓰는 우여곡절 끝에 작성한 국서였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조선의 칭신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답서에서 인조에게 산성에서 나오라고 다시 강요했다. 출성(出城)하지 않으면 항복을 결코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척화신(斥和臣) 두세 명을 묶어 보내라는 요구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그들의 목을 베어 ‘대국에 반항한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다.
▲ 기전도(畿甸圖).‘기전’은 도성 주변을 일컫는다. 한강과 임진강, 삼각산을 비롯한 산, 각 성과 방어 진지의 모습 등이 잘 묘사돼 있다. 특히 서울 주변의 광주(남한산성), 수원, 개성, 강화 등과 파주, 교동, 영종도 등지는 붉은색으로 뚜렷하게 드러냈다. 조선시대 도성 주변의 형세를 명확히 보여 주는 지도다.
출전 규장각 소장 동국여도

 

 

 

 

홍타이지의 ‘절박함’

1637년 1월20일 남한산성 주변의 날씨는 음산했다. 아침부터 뿌연 안개 때문에 사방을 분간할 수 없더니 하루 종일 큰 눈이 내렸다.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斥和臣) 두세 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 서양인이 그린 청군 무장(武將)의 모습. 왼쪽은 한인(漢人)이고 오른쪽은 만주인이다. 출전 ‘중국의 역사’(고단샤 펴냄).

‘그대를 나오라고 하는 것은 그대가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자 은혜를 베풀려는 것이다. 짐은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사방을 평정하고 있으니, 지난날 그대의 잘못을 용서해 줌으로써 남조(南朝)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 큰 천하를 어떻게 모두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인조를 안심시키려는 내용이었다. 인조가 우려하듯이, 그를 성밖으로 유인해낸 뒤 휘종(徽宗)이나 흠종(欽宗)의 경우처럼 청나라로 연행해 갈 생각은 없다고 강조한 것이다.

 

조선이 이미 칭신하여 자신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출성을 강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1636년 봄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이 심양에 모여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할 때, 조선 사신 이확(李廓)과 나덕헌(羅德憲)은 배례(拜禮)를 끝까지 거부했었다. 뿐만 아니라 ‘칭제건원(稱帝建元)’ 사실을 알리려 조선에 갔던 용골대와 몽골 버일러 일행은 조선의 ‘박대’에 밀려 도망치듯 심양으로 돌아왔었다.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孔有德)을 비롯한 한족(漢族)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藩國)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인조의 ‘절박함’

1월21일 인조는 청군 진영에 국서를 다시 보냈다. 이날의 국서에서 조선은 더 작아졌다. 인조가 신(臣)을 칭한 것은 물론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부르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청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했다.‘황제국’ 청이 요구했던 것을 사실상 모두 받아들이는 형식의 국서였다.

 

하지만 내용에서는 여전히 거부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출성 문제’였다. 인조는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거듭 애원했다.

 

‘오늘날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위태롭고 급박한 상황 때문에 귀순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에서 나가는 것만은 고려(高麗) 이래 없었던 일이라며 죽더라도 결코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성을 계속 독촉하신다면, 청군이 입성하는 날 산성 안에는 시체 더미만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출성을 계속 강요할 경우,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것임을 내세웠다. 인조는 그러면서 출성을 회피하는 자신의 진짜 의도를 슬쩍 내비쳤다. ‘소방의 풍속은 잗달아 예절이 너무도 꼼꼼합니다. 임금의 행동이 조금만 이상해도 신하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보며 괴상하게 여깁니다. 제가 출성할 경우, 나라를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신하들은 필시 저를 임금으로 떠받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귀순을 허락하신 것은 소방의 종사(宗社)를 보전시키려 함인데, 이 한 가지 때문에 나라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 채 멸망하고 만다면 그것은 폐하께서 돌봐 주시는 본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인조가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 하나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인조는 반정(反正)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그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너도나도 박송(縛送)을 자원하다

‘척화파를 묶어 보내라.’는 요구 또한 몹시 괴로운 것이었다. 홍타이지의 설명은 이러했다.‘그들이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짐의 서정(西征)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고, 조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서정’이란 명을 정벌하는 것을 말한다. 척화파가 청에 대한 저항을 ‘선동’하는 바람에 자신이 조선을 손봐주게 되었고, 그 때문에 궁극에는 명을 정복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로는 조선 신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저항하려는 의지를 꺾고, 자신이 이제는 조선의 신료와 백성들까지도 건사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과시하려는 깜냥이었다.

 

척화파를 박송(縛送)하라는 조건이 알려진 뒤부터 신료들 가운데 자원자들이 줄을 이었다.1월22일 사간 이명웅(李命雄)이 제일 먼저 나섰다. ‘신도 화친을 배척한 사람입니다. 만의 하나 포위를 푸는 데 보탬이 된다면, 신자(臣子)의 직분과 의리로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먼저 나가고 싶습니다.’

 

이조참판 정온(鄭蘊)도 나섰다. ‘신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존망(存亡)의 계책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예조판서 김상헌, 전 교리 윤집(尹集), 전 수찬 오달제(吳達濟), 부호군 윤황(尹煌) 등 자원자는 줄을 이었다.

 

마지막 결전을 벌이자는 주장도 나타났다. 김수현(金壽賢), 황일호(黃一皓) 등은 국서를 다시 써서 보내라고 촉구했다. ‘이제 노약자들을 먼저 죽이고, 남은 양식을 모두 태워 버린 뒤 날랜 장정을 뽑아 그대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 남한산성이야 완전히 망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은 들고일어나 자식은 아비의 원수를 갚고, 아우는 형의 원수를 갚고, 신하는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대들은 부질없이 만대(萬代)의 원한만 맺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청의 노여움만 더할 뿐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삼사(三司) 신료들의 면담 요청을 아예 거부해 버렸다.

 

1월22일 조정은 화친을 배척한 신료들에게 자수하라고 권고했다.1월 23일에는 수원(水原) 출신의 장수들이 정원(政院) 문밖에 몰려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소리쳤다. 기막힌 일이었다. 산성의 대오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